숲의 소실점을 향해 민음의 시 271
양안다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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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그간 시나 시집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확실히 전하는 편이었으며, 필요하다면 작품의 얼개도 숨기지 않고 소략해 밝혔다. 이 시집 숲의 소실점을 향해 또한 이것이 앞선 두 시집과 이어지는 작품이며 그 흐름의 대단원임을 말했다. (출처 : 시인 인스타그램). 이러한 미덕 덕분에 독자에게 창작 대개의 의도가 오해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해된 적이 없음이 온전히 이해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이 탁월한 시집의 엔딩을 맡은 박동억 님의 해설은 우리가 그것을 마주할 때 흔히 하는 우려(해설은 시집을 감상할 때 도리어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다)에도 불구하고 뜻깊은데, 시인의 시집 각각이 마냥 독립된 작품은 아님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앞선 책들까지 소급하여 그 흐름을 짚어주기 때문이다. 그 상세는 생략하고, 나는 특히 해설의 3번으로 배치한 불안의 완수를 주의 깊게 읽었다. 이전부터 시인의 시에서 좀 더 이야기되어야 한다 여긴 지점을 주목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해설의 말씀대로, 시인은 "세상의 잔혹과 냉혹을 비판하는 데 주저함이 없"(229p). 문제는 화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백 혹은 폭로가 어느 반대 진영에 서서 규탄하는 진술이 아니라는 점이다. 화자는 "불안에 중독된 인간"(후유증)이고 "자기 진실과 마주하는 데 중독된 인간"(242p)이기에 그의 말은 증언보다 고백에 가깝고, 그리하여 "잔혹과 냉혹"이 향하는 칼날은 자신에게도 향해 있다. 이 덕분에 시인은 해설 마지막의 제목인 마음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무엇에 닿는가로 가닿았지만, 도리어 그 결실 때문에, 시인이 환한 바깥으로 나오기까지 통과해야 했던 긴 "금단의 터널"(나의 작은 폐쇄병동)이 종종 결락된 채 설명되기도 했다. 다시 해설의 말씀을 받자면, 시인이 "자아의 진실을 외면한 죄에 관해서 고백한"(242p)것들, "이미 망가졌다는 사실을 모른 체하고 싶었던 것입니다"(휘어진 칼, 그리고 매그놀리아) 따위의 '모른 척'이 가능하려면 어떠한 사건의 적극적 목도가 선행하여야 한다. 보지 않은 자는 모르는 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를 보면 이렇다.

 

"나는 너의 메마른 입술만 바라봤어"

"모진 돌만 골라 주머니에 넣은 채 강가로 뛰어드는 이를 바라보았습니다"

 

나의 작은 폐쇄병동

 

 

"우는 건 너인 데 눈물을 보는 건 언제나 나였다"

 

여름잠

 

 

"누군가 나를 간호하듯이/창밖으로 앙상한 개를 바라보는 것이 취미입니다/선명한 갈비뼈를 바라보고 있자면/머릿속에 기타가 떠오르고 음악이 흘러나옵니다/()/친구,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건/답장이 아니라 쇠붙이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주소를 모르기 때문에

 

 

기계적인 방식으로 '보다'라고 서술한 부분만 골라내더라도 화자가 상당 상세히 아픔의 사건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데, 그럼에도 앞서 말한 '모른 척'을 수행하기 위해, 즉 당신의 주소를 '모르기' 위해, 화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진술로 덮어버리는 방식을 취하고, 느끼건대 대체의 독자가 여기에 빠져든다.

 

"늦더위가 쏟아지는 날에는 친구의 팔뚝에는 칼자국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문틈을 유의해요"

 

후유증

 

 

결국 화자가 보는 것은 "칼자국" 같은 "문틈"이다. 이 문틈은 열리기 전의 것인지 닫히기 전의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화자의 '모른 척'에 대한 알리바이는 시집 후반에 배치한 시의 제목이기도 한 혼자 추는 춤이란 말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 '혼자 추는 춤'은 앞서 시인이 출간한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에서 시인이 말한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이기도 하다. "나는 고민하다가./"혼자 추는 춤"이라고 대답했다./혼자 추는 춤./그런데 나는 춤을 출 때마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였다."(시인의 말,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시는 "혼자 추는 춤"이다. 그러나 "춤을 출 때마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이다. 그런데 이 '함께'는 '우리'라고 부르기엔 미묘하다. 시인이 춤을 추는 동안, 모두가 바라봐주거나 혹은 같이 일어서서 춤을 추기에 시인은 외롭지 않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시인의 춤은 무도회나 댄스파티에서 추는 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함께'의 춤은 얼마간 '모른 척'의 관계로 맺어져 행해지며 다시 한 번 이 '모른 척'은 서로를 보고 있음의 관계로 행해진다.

돌아와서 나는 이 시집의 문장들도 그렇다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대체로의 시편이 '보고 있음'의 문장을 수많은 '모른 척' 문장이 둘러싸고 있고, 사람들은 거기에 몰려들지만, 결국 그 중심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고독하며 가만한 단 한 줄이며, "혼자 추는 춤"이다. 춤의 고독이며 활동하는 고독이며 사람들 속에 자신을 내밀어버리는 고독이다.

일견 우리가 느끼는(느낀다고 느끼는) 외로움은 두 가지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타인을 배제하고 추방한, 혹은 배제당하고 추방당했다고 느끼는 그것이 첫째고, 둘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어깨로부터 몰려오는 막막함이다. 시집에서 대체로의 시편들은 등장인물들을 끌어옴으로써 후자의 정경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둘 중 무엇이 더 외로운가 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는데 이러한 순간들은 따로 분리할 수 없이 우리에게 매번 방문하고 있으므로, 둘은 같은 삶의 양태이기 때문이다.

 

급히 마무리 짓자면 우리는 이 시인의 춤을 '모른 척' 하여야 한다.

이 시인은 본디 더 큰 침묵의 시인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 담긴 수많은 말보다 더 큰 침묵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같은 자리에 서서 함께 보자.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어디까지 보고 있는지, 그리하여 어디서 "소실점"이 나타나는지, 그러나

 

그러나 소실점은 원근을 표현하기 위해 캔버스에 찍은 가상의 점일 따름이니

거기에 부딪힌다 한들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어깨는 부서지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 또한 소실되지 않으니, 우리는 나아간다. 풍경 너머 풍경으로.

 

"이토록 작고 작은 세계는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하나의 소실점에서 다시 만난다면

 

우리들은 그곳에서 불을 끄고 춤을 추겠지"

 

우리들은 프리즘 속에서 갈라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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