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곰돌이님의 서재 (곰돌이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Wed, 14 Oct 2026 02:47:52 +0900</lastBuildDate><image><title>곰돌이</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38014177507993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곰돌이</description></image><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오블로모프1 - [오블로모프 1]</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565772</link><pubDate>Sun, 11 Oct 2026 14: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56577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13195&TPaperId=1756577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2/coveroff/8932013195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13195&TPaperId=1756577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오블로모프 1</a><br/>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 지음, 최윤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03월<br/></td></tr></table><br/>흰 바탕에 &lt;오블로모프&gt;라는 제목과 작가 이름 정도만 덩그러니 적힌 표지. 왠지 러시아 문학의 묵직한 이야기와 웃음기 싹 빠진 인간사가 빼곡히 적혀 있을 것만 같아 괜히 읽기 전부터 허리를 한 번 펴고 앉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자 각 잡힌 분위기가 한 번에 무너졌다.<br><br>침대. 그것도 아주 편안해 보이는 침대.<br><br>부드럽고 신축성 좋은 잠옷을 입은 삼십 대 남자가 침실이면서 서재이고 거실이기도 한 방에 누워 있다. 오블로모프다. 이 인간, 누워 있는 것이 일상이다.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한다. 그런데 생각만 한다. 방 안을 둘러보면 더 가관이다. 곳곳에 먼지는 쌓여 있고, 거미줄은 죽죽 이어져 있고, 널브러진 접시에 먹다 흘린 빵 부스러기까지... 이걸 누가 치우느냐? 오블로모프가 부르면 언제든 하인 자하르가 투덜대며 와 줄 거다. 그런데 자하르도 만만치 않다. 주인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공중제비 두 바퀴쯤은 너끈히 돌 것 같다. 집구석이 이게 뭐냐며 청소를 좀 하라고 하자 자하르는 태연하게 대꾸한다.<br><br>“치워봐야 또 쌓일 텐디유 뭐.”<br><br>아니, 그럼 안 치우겠다는 거잖아? 서로 말로 이겨 먹는 데는 도가 튼 주인과 하인, 이 둘이 붙어 있으니 집안이 멀쩡할 리가 없다. 오블로모프가 한 번 호되게 나무라면, 처지가 처지인지라 자하르는 이내 걸쭉한 사투리를 쏟아내며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린다.<br><br>“가슴이 찡한 말도 재간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겨. 심장을 칼루다 도려내는 것 같어······ 내 집, 내 채소밭, 거기서 두 발 쭉 뻗구 누워보았으면!”<br><br>한때 부유했던 오블로모프 가문은 이제 가세가 기울어 다른 귀족들 사이에서도 잊힌 처지다. 아직 지방에 영지도 있고 재산도 남아 있지만, 오블로모프는 영지를 직접 돌보는 일도, 자기 삶을 꾸려가는 일도 좀처럼 하지 않는다. 늙은 하인들은 지난날의 기억을 귀한 보배처럼 간직하고 있다. 주인인 오블로모프 역시 그 시절의 흔적처럼 살아가고,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그는 여전히 침대 위에 있다. 아니, 그래서 언제 일어날 건데? 세수는 또 언제 할 거냐고! 눈앞의 거미줄이 거슬려 죽겠으면 그냥 가서 치우면 안 되는 거야? 하아, 일단 환기 좀 시키면 안 될까? 먼지가 뽀얗게 앉은 가구를 보고 있자니 내 목이 다 칼칼한 것 같다.<br><br>그. 러. 나.<br><br>오블로모프 본인은 또 별 불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근심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골 영지에서는 해마다 흉년이나 수입 감소 같은 좋지 않은 소식이 날아오고, 살고 있는 집까지 비워야 할 상황에 처한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을 해결하려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블로모프에게 움직인다는 것은 귀찮음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절망에 가깝다. 집에 이따금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보려 하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 그들은 하나같이 주옥같은(발음 조심) 소리를 늘어놓고 갈 뿐이다. 그런데 오블로모프의 게으름보다 더 궁금한 건 따로 있다. 농노제 폐지를 앞두고 낡은 귀족 사회가 흔들리던 19세기 러시아에서, 곤차로프는 왜 하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 인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br><br>이 책보다 수십 년 뒤에 나온 체호프의 &lt;구스베리&gt;를 최근에 읽다가, 오블로모프와 묘하게 겹쳐 보이는 인물을 만났다. 작품 속 수의사 이반 이바니치는 세상과 부딪히기보다 자신의 영지에 숨어 평생을 보내고 싶어 했던 동생 니콜라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br><br>“인간에게는 단지 3아르신의 땅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요. 하지만 3아르신은 산 사람이 아니라 시체에게나 맞는 크기잖아요. (…) 자기 영지에 숨는다는 것―그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 이기주의이고 나태함이며 덕행이 결여된 엉터리 수도생활 같은 것이죠.”<br><br>이반 이바니치의 말을 읽는데 오블로모프의 침대가 떠오르는게 아닌가.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다. 니콜라이는 바라던 영지를 얻고 그 안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문제는 그 만족에 빠져 영지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오블로모프 역시 자기만의 세계에 머물며 그 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이 책은 농노제가 폐지되기 전에 나왔고, &lt;구스베리&gt;는 그 뒤에 나왔다. 시대는 다르지만, 두 인물을 보며 되묻게 되는 건 같다. 자기만의 만족에 안주하는 것만으로 우리 삶은 충분한 걸까.<br><br>오블로모프는 꿈도 자기 같은 꿈만 꾼다. 옛 시절에 머물러 개울물이 졸졸 흐르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하인들이 짐수레에 건초더미를 수북하게 쌓아 올리는 모습이나 보는 삶. ‘내일도 오늘만 같아라.’ 배 두들기며 지내는 상상만으로도 벌써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니 말이다. 게으름이 뚝뚝 묻어나고 복장 터지는 소리나 늘어놓는 인물이었다면 진작 진력이 났을 텐데, 흥미로운 건 그가 하는 말이 마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다는 거다. 듣다 보면 은근히 납득도 된다. 오블로모프는 사람들이 그토록 애써 살아가는 이유부터 되묻는다. 의외인 건 정작 삶의 이유를 ‘인간’과 ‘사랑’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이다.<br><br>“인간, 제 말은 인간을 사랑하자는 겁니다······” (p. 48)<br><br>그가 영 못마땅해하는 건 사람들이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것들이다. 쓸데없는 분주함부터 허위의식, 사교적인 말들, 체면을 위한 삶까지. 남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부지런히 따라가는 게 정말 ‘사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오블로모프는 이런 의문을 품을 줄도, 다른 사람들의 삶을 생각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자기 삶을 바꾸는 일 앞에서는 좀처럼 움직이지 못한다는 거. 2권으로 넘어가면 어떨지 모르겠다만, 지금까지는 이게 오블로모프의 한계로 보인다. 곁에 뭐든 대신 해 주는 (시답잖긴 해도) 하인이 있으니.<br><br>딱 부러진 이념을 내세우는 사람도, 무언가에 푹 빠져 몰두하는 사람도 아닌 오블로모프. 유약하고 순한 데다 생각하고 느끼는 힘은 있지만, 현실의 압력을 견디고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영 힘을 못 쓴다. 무사태평하게 살아온 그에게 고달픈 인생이란 먹는 것이더냐! 알 리가 만무하다. 해야 할 일을 뻔히 알면서도 자꾸 미루니 내 속이 다 답답하다. 흠, 그런데 쓰다 보니 오블로모프를 두고 품평회라도 연 것 같아 마음이 썩 편치가 않군. ㅋㅋ 나 역시 첫발을 떼지 못한 채 누가 앞에 등불이라도 확 켜주길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를 마냥 욕하지는 못하겠다. <br><br>암튼 그건 그렇고, 세상에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란 없다 했던가! 오블로모프, 그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br><br>(2권으로...)]]></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2/cover150/893201319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2231</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amp;lt;상자 속의 사나이&amp;gt;중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553447</link><pubDate>Sun, 04 Oct 2026 09: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55344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22931480&TPaperId=1755344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115/55/coveroff/k522931480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115/55/cover150/k52293148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1155521</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오버스토리 - [오버스토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542783</link><pubDate>Tue, 29 Sep 2026 08: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54278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82534949&TPaperId=1754278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8117/36/coveroff/s17263548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82534949&TPaperId=1754278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오버스토리</a><br/>리처드 파워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02월<br/></td></tr></table><br/>“자연 속을 걸을 때마다 사람은 자신이 찾던 것 이상을 얻는다. 우주로 들어가는 가장 명확한 방법은 야생의 숲을 통하는 것이다”<br><br>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아무 연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차례로 등장한다. 나무와 함께 자라고, 나무를 연구하고, 삶의 한가운데서 나무를 만나고, 각각의 삶에 나무는 늘 가까이 있다. 줄기처럼 따로 뻗어가던 그들의 삶은 어느 순간 서로 맞닿기도 한다. 태어나고, 자라고, 가장 넓게 뻗어나가기도 하고, 베이기도 하고, 어딘가에서 또 싹을 틔우기도 하는 나무의 시간을 따라가면 인간의 짧은 생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자꾸 서두르지만, 나무는 기다린다. 계절이 돌아오기를, 비가 내리기를, 시간이 자기 몫만큼 흐르기를. <br><br>병충해가 나무 깊숙이 파고들 듯, 고난도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예상도 못 한 극단적인 상황을 맞닥뜨린 가족 이야기에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했다 싶다가도, 현실과 또 뭐가 다른지 똑 부러지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인생에 열 계단이 있다면 고작 한두 계단 올랐거나 말았을 내가, 어떠한 선택 하나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 삶을 통째로 뒤흔들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br><br>몇 해 전 그날이 잠깐 떠오르는 이야기도 있었다. 1948년 상하이의 한 부자의 이야기인데, 무역회사를 하는 후이족 무슬림 사업가 마 쇼잉은 공산세력이 곧 들어올 것을 염려해 아들에게 미국으로 떠나라고 한다. 비밀 금고에 간직해 둔 세 개의 옥반지도 아들에게 건넨다. 각각 과거와 현재, 미래를 뜻하는 나무가 세공된 반지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과 마 가문이 격변 속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때 아들은 그 반지와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의 의미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 우리 아빠도 첫 출근을 앞둔 내게 옥반지 같은 건 없었지만, 짧고 굵은 이야기 몇 마디를 건넨 적이 있다. “그놈이 가면 더 한 놈이 온다.” 지금 생각하니 좀 웃기다. 마 쇼잉이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상황과 내 첫 출근은 전혀 다른 일이었는데, 현실적인(?) 그때의 말 한마디가 왜 갑자기 생각나던지. 사람에게 남는 게 꼭 대단한 것만은 아닌가 보다.<br><br>저문다는 것. 한 사람이 평생 살아온 시간이 점점 뒤로 물러나고 앞으로 남은 시간이 조금씩 줄어드는 인간의 생애를 나무의 시간과 나란히 놓으니, 시간 자체가 왠지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지금 흘러가는 시간 하나하나가 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이는 건 무언가를 잃고 난 뒤에서야 생기는 것 같다. 슬픔에 잠식되지 말라며 놓고 간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간은 지나간 것을 잊게 만들고, 곁에 있던 것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나날의 연속에도 무언가는 천천히 쌓이고 있다는 것을 위안 삼아본다. 봄이면 어떨까, 여름은 또 어떻고, 가을엔 좀 다를까, 금방 또 겨울이군. 계절마다 속속들이 들어차 있던 대단치도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구나 싶지만, 그건 또 그런대로 나름의 역할을 해줄 때가 있다.<br><br>이어간다는 것. 한 사람의 생이 저물어도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억으로 남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삶에 닿기도 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이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무는? 나무는 더 긴 시간 속에서 이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한 그루가 사라져도 숲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는 또 무언가가 자라고 있을 테니까. 그런 나무를 베어내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한 숲에서 맞선다. 나무를 베는 데는 법도 있고 이유도 있다. 그래서 베는 사람은 할 일을 하는 것이고, 막는 사람은 법 밖에 서게 된다. 이상하다. 법이 허락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한 걸까.<br><br>무엇을 소유할 수 있고 누가 소유를 할 수 있을까? 무엇이 권리를 부여하고 왜 전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그걸 가져야 할까? (p. 351)<br><br>나무를 연구하는 박사 패트리샤 웨스터퍼드는 “나무가 서로에게 말을 한다.”고 알려준다. 나무들이 뿌리와 균류를 통해 연결되어 서로 신호를 주고받고, 필요한 물질을 나누기도 한다며 숲을 하나의 연결된 사회처럼 바라본다. 언제나 숲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녀를 보고, 사람들은 나무가 지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여자라며 조롱하듯 수군거렸다. 내가 자연으로부터 얻은 치유, 모든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나’와 ‘나무’ 사이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느낀 숲의 보살핌에, 어느 것 하나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이룬 것 같고, 또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그 개운함을 나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숲이 우거진 공간에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잎들에게서 얻는 생의 약동감을. 지나가다 보이는 들꽃 이름 하나도 알지 못하는 내가, 그 알지 못하는 이름을 하나하나 알려주는 엄마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아, 그렇구나’라는 힘도 안 드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던, 그런 나에게도 무언가를 쥐여주는 자연의 관대함을.<br><br>나무가 그래봤자 나무일 뿐인데, 나무에서 나올 만한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지나쳐 버렸었다. 사실 예전 같으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거다. 이 또한 상실 이후에 생긴 변화 중 하나일 듯싶다. 마음에 잔물결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에 매료될 줄도, 나무에 아무 의미도 두지 않던 내가 자연에 빚을 졌다고 말하게 될 줄도, 이 책을 읽게 될 줄도 몰랐다. 베트남전에서 반얀나무 한 그루 덕에 목숨을 건진 한 남자는 그 이후, 벌거벗은 땅에 나무를 심고 숲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 뇌 손상을 입은 남편을 병간호하던 한 여성은, 삶이 강제로 느려지고 나서야 뒤뜰에 심어 둔 나무들을 남편과 함께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한다. 알면 알수록 그녀의 가슴에 놀라움 덩어리가 자리하고, 그 무렵 책에서 이런 문장을 만난다. “개간된 땅에 숲을 되돌아오게 만드는 가장 훌륭하고 쉬운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는 나무를 심으며 손을 보탰고, 누군가는 손을 거두며 자연에게 자리를 내주는 법을 배웠다.<br><br>덩굴이 벽을 한 뼘씩 타고 오르는 것처럼 책장이 더디게 넘어갈 때마다, “숲을 산책하고 나서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것은 특정 종이 당신을 매수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나무들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닿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에는 너무 낮은 주파수로 말을 한다”는 단순한 말 안에 담긴 확신이 생각을 건드렸다. 앞으로 자연과 나무가 또 내게 어떤 의미가 될지는 모르겠다. “개개의 나무들의 생화학적 행동은 이들을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볼 때에만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는 패트리샤의 말을 떠올리며, 또다시 숲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러, 나무에게 매수당하러 가고 있지 않을까.]]></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8117/36/cover150/s17263548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81173622</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9월에, 책들과, 커피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526589</link><pubDate>Sun, 20 Sep 2026 03: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52658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30073&TPaperId=1752658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1330/22/coveroff/893203007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64973&TPaperId=1752658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19/1/coveroff/893646497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64965&TPaperId=1752658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18/96/coveroff/8936464965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64957&TPaperId=1752658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18/96/coveroff/893646495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3821&TPaperId=1752658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701/47/coveroff/s192138432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526589'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책장에 한 자리 차지하고는 있지만, 내내 읽을 기회를 놓쳐 ‘머무는 중’으로만 있던 세계문학 단편선 몇 권을 뽑아 들었다. 이 덩치들에게 숨통도 틔워줄 겸. 올해 안에 몇 권이라도 완독해 봐야지, 혼자 다짐을 실컷 하다가 이게 또 다짐까지 해야 할 일인가 싶지만, 다짐씩이나 필요하다. 몇 편 읽고 덮어도 좋고, 다른 책으로 넘어갔다 돌아와도 좋고, 이 책들과 조금 느슨하게 지내볼 생각이다.<br><br><br>랭스턴 휴스 &lt;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외 40편&gt;<br><br>「떳떳한 코라」에는 멜턴이라는 아담한 마을에서 40년을 살아온 코라가 나온다. 주민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 그녀를 사람들은 흑인, 검둥이라고 부른다. 스튜더반 집안의 잡부로 일하며 개처럼 취급받아도 코라는 견딘다. 나가봤자 더 가난한 백인 집에서 학대받을 게 뻔하니까. 망할 아버지는 주정뱅이에다가 딸린 자식은 또 왜 그리 많은지, 그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부담감에 코라는 아이였을 때부터 놀 시간조차 없이 지내왔다. “예, 마님.”을 입에 달고 순종하며 지내는 코라가 백인 노동자 조와 짧은 사랑을 나누고 임신하지만, 그가 떠나고 혼자 낳아 키운 아이마저 백일해에 걸려 품에서 떠나보냈을 때서야 신에게 악다구니를 해 본다. 그래서 주인마님의 딸 제시를 속으로 제 딸처럼 여기며 사랑으로 보살폈는데, 제시마저 그 집안의 위선과 거짓에 둘러싸인 채 죽게 된다. 그동안 참고, 보고, 알고 있었던 것들이 장례식장에서 더는 눌러지지 않는다. 오래도록 꾹꾹 눌러두었던 말들이 결국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br><br>“아가씨, 내가 잠깐 할 말이 있어요.”<br><br>이 단편선에 담긴 이야기들은 인종차별을 이야기하면서도 누군가를 줄곧 짓눌리는 사람으로만 두지 않고, 그렇다고 반대편 사람들을 악역으로 세우지도 않으면서도 사람을 좀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경매에 부친 소년」에서는 예술과 음악을 사랑하며 살아가던 백인 부부가 집에서 일하던 흑인 여성이 죽은 뒤, 그녀의 사촌인 흑인 소년을 집에 들이게 된다. 잘해준다. 친절하다. 그런데 그 친절 앞에 서 있으면 이상하게 한 발 물러서고 싶어진다. 선의라고 하기엔 어딘가 미심쩍고, 악의라고 하기엔 또 너무 멀쩡하다. 그래서인지 이 부부에게는 늘 이상한 이물감이 남는다. 흑인 예술에 관심이 많은 부부는 영감을 얻기라도 한 듯 아이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곡을 쓴다. 이렇게만 말하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어 보이지만, 노예를 그려보고 싶었다며 그림의 제목마저 ‘경매 부쳐진 소년’이라고 붙이질 않나, 속옷을 벗어달라고 하질 않나. 이들이 아이에게 보인 애착과 관심이 너무나 기괴하다. 여기서 만만치 않은 인물이 하녀 매티다. 다루기 힘들어졌다며 주인부부가 내보낼 생각을 하자 그녀가 받아친다.<br><br>“우리도 당신들 백인들의 멍청한 짓거리에 염증이 나던 참이에요!”<br><br>부부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만큼 맹랑한 말. 매티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말. 차별, 억압 등 익숙한 이야기를 가져와, 익숙한 사람을 만들어내지 않는 거, 당연한 스토리 안 만드는 거, 이게 매력이다.<br><br><br><br>허먼 멜빌 &lt;선원, 빌리 버드 외 6편&gt;<br><br>작년에 이 책에 실린 「꼬끼오! 혹은 고귀한 수탉 베네벤타노의 노래」를 읽다가 허먼 멜빌이 보통 입담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뒤늦게서야 알아버리고는, 선뜻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lt;모비 딕&gt;을 샀건만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일단 맨 처음에 실린 「바틀비」를 읽어봤다.<br><br>화자는 변호사다. 자신의 법률 사무소에서 문서를 베껴 쓰는 필경사 몇 명과 함께 일하고 있다. 건물이며 직원이며 자기 성격까지 한참을 설명한다. 자신을 꽤 좋은 고용주라고 생각하는 이 변호사의 관찰력이 빛나는 온갖 설명과 변명을 잘만 듣고 있다가도 내심 속으로는 ‘아니 그래서 바틀비는 언제 나오는 건데’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는! 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일반적이지 않은 듯 보이면서도 그렇다고 주변에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변호사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해석하고, 혼자 이해하고, 또 납득이 안 돼서 머리를 굴리고, 속은 속대로 타는데 겉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느라 하루 에너지를 다 쓰는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집에 가면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서, “으으……” 영혼 빠져나가는 앓는 소리 내면서 잠들진 않을지ㅋㅋㅋ 이 와중에 드디어!!! 바틀비가 등장한다. 조용해 뵈는 바틀비가 새로 들어와 변호사는 너무나 만족스럽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참으로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진다. 피식 대다가 의아스럽고 답답하다가 착잡해지고 씁쓸함까지 맛보게 된다.<br><br>아, 행복은 빛을 불러들이고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즐거운 곳이라고 여기는 반면, 불행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잠복해 있어서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지. 병적이고 어리석은 머리가 빚어낸 망상임이 분명한 이런 서글픈 상상은 바틀비의 기벽과 관련된 좀 더 특별한 다른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는 뭔가 이상한 것들을 발견할 것 같은 예감에 휩싸였다. 무정한 낯선 이들 사이에서 하늘거리는 수의에 싸여 누워 있는 바틀비의 창백한 모습이 떠올랐다. (p. 35)<br><br><br><br>윌리엄 트레버 &lt;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gt;<br><br>맨 처음에 실린 「욜의 추억」은 시작부터 묘했다. 호텔 테라스에서 깜빡 잠든 미스 티처가 눈을 떠보니, 산책을 나간 친구 미스 그림쇼가 앉을 자리에 낯선 남자가 와 앉아도 괜찮겠느냐고 묻는다. 미스 티처는 차마 안 된다고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퀼런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대뜸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미스 티처는 그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준다. 나였다면 진돗개 하나 발령과 동시에 이 사람이 계속 앉아 있으면 어쩌지, 해코지하면 어쩌지, 나중에 따라오면 어떡하지, 아마 온갖 걱정과 추측부터 하느라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못했을 것 같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내 앞에 앉아 있게 되는 이 상황 자체를 이렇게 오래 두고 보지도 않았을 거다.<br><br>처음에는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지?’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왜?’를 따지고 있을 틈조차 주지 않으니 말이다. 퀼런이 욜에서 보낸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려줄수록,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이 상황을 조금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됐다. 미스 티처가 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왜 낯선 남자의 사정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등등, 이 모든 걸 판단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고 다른 한 사람이 그것을 들어준다는 일이 더 중요하게 느껴질 만큼. 이때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미스 그림쇼의 등장으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여기서 흥미롭게 들여다본 것은, 미스 티처가 퀼런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은 아주 사적인 마음과 그 마음을 옆에서 너무 아무렇지 않게 끊어버리는 미스 그림쇼에게서 느끼는 미묘한 불편함이었다.<br><br>“우리는 추억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br><br>윗옷 어깨에 비듬이 내려앉은 지저분한 낯선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짜증이 나 있는 미스 그림쇼에게 아무렇지 않게 껄껄대며 말하는 퀼런. 마치 ‘당신이 하는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사실인지조차 알 수 없군’ 하는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가벼운 대답 정도만 해주는 미스 그림쇼. 그런데 그 ‘가벼운 판단’이 미스 티처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아직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았는데 누군가의 아픔을 이미 자기가 아는 도식 안에 넣어버리는 모습에 실망한 것 같기도 했다. 이쪽도 저쪽도 이해는 갔다. 언제나 타인의 마음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비난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막상 내가 아끼는 사람이 타인의 아픔을 가볍게 바라보는 모습을 마주하면 어쩔 수 없이 실망하게 되는 그 감정. 희한하게도 별 감흥 없이 읽어내려 간 줄 알았는데, ‘나란 사람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충분히 흘러갈 시간을 주었던가’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든다. 사람의 이야기를 오래 듣는다는 건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전처럼 낯선 사람으로만 바라볼 수 없게 만들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함께.<br><br>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이런 상황을 내가 맞닥뜨릴 일이 있을까 싶기도 한 묘한 어긋남이 「탁자」에서 이어진다. 지극히 계산적인 유대인 가구 중개업자 제프스는 탁자를 사고파는 일을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추측하고, 그들의 삶을 짜맞추며 거의 확신까지 한다. 상상은 자유. 게다가 돈도 안 들고. 그런데 짐작을 사실처럼 굳혀버리는 일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사는 게 바빠 남의 일에 관심도 없고 신경 쓸 필요성을 모르겠다며 무심한 얼굴로 마음속으로 중얼거릴진 몰라도, 조각조각 쪼개서 들여다보면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타인의 삶에 참 관심이 많다. 문제는 자기 안에서만 완결된 해석을 붙들고 내 짐작은 틀림이 없다고 자부하면서 그 생각을 어느 순간 사실처럼 믿어버린다는 것. 이런 심리를 드러내고 끝이 나버린다면 아, 뭐야 싶을 텐데, 제프스에게서 느껴지는 건 뜻밖에도 그의 고독과 결핍이었다.<br><br>제프스는 눈을 감은 채 마음속으로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넓은 빅토리아풍 집에 홀로 서 있는 자기 모습을 보았다. 그의 집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러 달이 흐르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구는 단 한 점도 없었다. 그는 팔고 또다시 샀다. 그는 카펫을 깔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온전히 제 것으로 소유한 거라고는 예전에 누군가가 아무런 가치 없는 물건이라고 일러 준, 오래된 라디오 하나밖에 없었다. (「탁자」, p. 46)<br><br>조금 더 황당하고 조금 더 긴장하며 읽게 만든 「펜트하우스」는 런던의 한 건물에서 개 한 마리와 함께 사는 중년의 독신 여성 윈턴의 이야기다. 그녀가 사는 건물의 꼭대기층에는 돈 많은 런카 부부가 살고 있다. 그 집에서 일하는 비안카가 식료품점에서 만난 윈턴에게 펜트하우스 구경을 부추기고, 윈턴은 본의 아니게 자신의 개와 함께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게 된다. 수줍음이 많아 15년을 외롭게 지낸 윈턴이 먼저 다가와준 비안카의 손길을 저버릴 수가 없었나 보다. 마침 수도를 고치러 와 있던 관리인 모건까지 합세해 칵테일을 마시는 세 사람. 그런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모건이 꽃병을 깨트리고, 카펫 한가운데가 큼직하게 젖어버리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뭔가 이럴 줄 알았어 싶은 일이 기어코 벌어지니 속이 탄다. 어휴. 게다가 오늘은 런카 부부의 펜트하우스를 잡지에 싣기로 한 사람들이 오기로 한 날. 당황스러운 윈턴 앞에서 모건과 비안카는 깔깔대고, 모건은 윈턴이 데려온 개가 꽃병을 깨트렸다고 하자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 그 뒤로도 짜증 나고 어이없는 상황이 이어지는데 나랑 윈턴만 쫄려 죽게 생겼다.<br><br>자신보다 한참 어린 비안카와, 관리인으로 지내며 여러 세입자의 못 볼 꼴을 다 봐온 탓에 분노와 억한 심정으로 가득한 모건. 이런 두 사람을 보며 윈턴은 나이도 훨씬 많고,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p. 71)인 자신이 이 상황을 정리해야겠다고 느끼기라도 한 건지, 온갖 상황을 머릿속으로 상상한다. 곧이어 펜트하우스 주인 부부와 잡지사 사람들이 도착하고, 서로를 이해시키고 오해를 풀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는다. 윈턴이 이 집에 발을 들일때 부터 왜인지 그냥 제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천만 번 했던 내 속도 점점 끓어올랐다.<br><br>재미? 글쎄. 집중하느라 손톱을 잘근거리며 읽게 만드는 그런 재미는 아마 이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없을지도 모른다. 아직 이 한 권도 다 읽지 않은 터라 대단히 섣부른 판단일 수 있지만, 느낌상 그렇다. 그런데 왜 자꾸만 그 한 장면, 그 잠깐 느껴진 분위기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무심히 뽑아내는 한마디와 그 순간의 감정 속에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마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 굳이 재미를 찾지 않게 만드는 이유가 되어주는 것 같다. 「펜트하우스」의 윈턴만 해도 내내 외롭게 지내다가 타인의 손길에 15년 만에 용기를 냈다. 처음으로 남들처럼 평범하고 소소한 즐거움에 어렵게 한 발 내딛어 본 날, 그야말로 개떡같은 일에 휘말린 거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럼 그렇지. 살던 대로 살지, 내가 무슨.’ 이런 자괴감에 다시 몸을 움츠리진 않을까. 그런데 또 누가 알아. 사람이라면 아주 진절머리가 나서 ‘아, 됐다. 나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거야!’ 할지도 모르지. <br><br>윌리엄 트레버라는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 때문인지 궁금했었다. 그의 글이. 몇 편의 이야기를 읽으며 느낀 건, 이해가 필요한 여러 상황 속에서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는 거다. 인물의 말에 담긴 뉘앙스가 어느 순간 ‘아, 이거’ 하고 확 읽히면서 내가 알던 그 마음을 알아보게 되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한 번씩 붙잡히기도 한다. 잔잔하게 이야기가 흘러가다가도 어느 순간 공기를 확 제압해버리는 문장이 툭 등장한다. 그 갑작스러움에 쓸쓸했고 서글펐고, 때로는 간사했고 오만했고 외로웠던 그때의 내 마음들이 자연스럽게 불려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나의 곁이 필요한 때가 있다는 생각도 하면서. 그러던 중 최근에 받아든 헤르만 브로흐의 &lt;현혹&gt;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br><br>“나에게 속하지 않고 인류에게 속해 있는 무한성, 어제를 지워버리고 내일만을 인정하는 무한성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시시한 일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일이란 이제는 인식하는 일이 아니고 살기, 함께 살기, 필요할 땐 가끔 도움을 베풀기이다. 나의 내일이 점점 짧아지고 있으니 그렇게라도 해서 어제를 구원하고 싶은 모양이다” <br><br><br>8월이 가고, 9월이 왔다. 지나가고, 새로 왔다.<br>새로 온 것 중에는 책도 몇 권 있다. 그리고 커피까지. 드립백, 오랜만이다. 알라딘에서 커피를 사는 건 처음이다. 디카페인은 제외하고 싱글 오리진으로만 고르다 보니 종류가 몇 가지밖에 없어, 일단 종류별로 골라봤다. 궁금하니까. 이제 차가운 컵을 쥔 손의 시원함보다 온기를 찾게 되는, 따뜻한 커피가 생각나는 계절에 다다르긴 했나 보다. <br><br>그래도 아직은 아아!<br clear="all">]]></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909/70/cover150/897275725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9097016</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세레나데 - [세레나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512717</link><pubDate>Sun, 13 Sep 2026 05: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51271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2047&TPaperId=1751271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532/61/coveroff/893204204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2047&TPaperId=1751271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세레나데</a><br/>쥴퓌 리바넬리 지음, 오진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09월<br/></td></tr></table><br/>“나는 차 뒷좌석에 앉아서 창밖만 바라봤다. 정말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그들 대부분은 서로 단절된 채,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삶이라는 건 다양한 목적을 좇아, 수많은 근심과 함께 흘러가는 것일 뿐.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속사정은 알지 못한다”<br><br>서른여섯 살 마야. 이혼했고 열네 살 아들을 키운다. 양육비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생활비와 학비는 혼자 감당한다. 문학을 좋아해 한때 소설을 써보려고도 했다. 먹고살아야 했고, 돌봐야 할 아들이 있었고, 일은 쉴 수 없었다. 그렇게 마야는 원해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비행기 안에서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시작에는 석 달 전 이스탄불 공항에서 만난 87세의 독일계 미국인 막시밀리안 바그너가 있었다.<br><br>어떤 얼굴은 웃고 있어도 슬픔을 숨기지 못한다. 마야가 공항에서 마주한 얼굴이 그랬다. 여행 가방과 바이올린 케이스를 나눠 든 노교수. 지치고 슬픔에 잠긴 듯한 눈빛, 그러면서도 웃고 있는 얼굴. 이전에 만나던 손님들과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마야는 금세 알아챘다.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이스탄불 대학에서 외국인 손님을 맞이하고 수행하는 계약직 공무원인 그녀에게 손님을 마중 나가는 일은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바그너가 묵을 숙소로 향하는 택시 뒤로 낯선 차 한 대가 계속 따라붙는 게 아닌가. 우연일까. 이 교수가 혹시 스파이는 아닐까. 뒤따르는 차는 정보국 차량인 걸까. 갑자기 요원들이 들이닥쳐 교수를 납치하는 것은 아닐까. 공상하기 좋아하는 마야의 머릿속에는 벌써 위험한 이야기가 한 편 펼쳐진다. <br><br>하루는 바그너의 제안으로 둘이 마주 앉아 저녁을 먹는다. 대화는 1930~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히틀러 정권을 피해 이스탄불로 온 유대인 교수들과 그 시절 튀르키예를 둘러싼 국가 간 정보전의 역사가 바그너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그런데 그는 왜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갔고, 하필 59년 만에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온 걸까. 마야의 의구심은 커지기만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행의 정체도 드러난다. 정보기관 소속이라는 세 사람이 총장실에서 마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간단했다. 바그너 교수의 모든 말과 행동을 보고하라는 것. <br><br>어느 날 이른 새벽, 바그너의 일정이 잡혀 있었다. 이 시간에 대체 어디를 가려는 걸까 싶었는데 목적지는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이스탄불 북쪽 흑해 연안의 쉴레였다. 쉴레 부근에 이르러 바다가 보이자, 바그너는 차를 세우게 한다. 언덕 뒤에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바이올린 가방과 ‘나디아에게’라는 글귀가 적힌 화환을 들고 내린다. 강추위 속, 파도가 거칠게 몰아치는 흑해 해변으로 87세의 노인이 바이올린 가방과 화환을 들고 걸어간다. 언덕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야와 운전기사는 두 눈을 의심했다. 바그너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화환을 바다에 던진 그는 눈보라 속에서 아름답고 서정적인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면서도 돌아올 답은 알 수 없는 사람처럼, 그는 같은 곡을 연주하고 또 연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곡은 같은 곳에서 자꾸 막힌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또 그곳에서 멈춘다. 왜 하필 이 추운 날 바다까지 찾아왔는지도, 왜 바이올린을 켜는지도 아직 알지 못한다. 그저 매서운 바람과 거센 파도 속에서 어디론가 소리를 보내고 있는 바그너의 모습만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남았다. 바다는 계속 파도치는데, 이 노인만 그곳에 붙들려 있다.<br><br>아, 길고 긴 하루가 참으로 고단하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일에 놓인 건지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말할 수 없는 일만 잔뜩 안고 있는 마야는 온몸이 녹초가 되어 돌아온다. 피곤에 절은 머리를 뉜 베개가 눈물로 젖어버린다. 꿈속에서는 어린 시절 부모님, 오빠, 할머니와 함께했던 평온한 날을 보낸다. 온몸에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이 편안함. 깨고 싶지 않은 꿈. 그런데 마야에게는 아무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가족의 이야기가 있었다. 아르메니아인이었던 할머니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의 강제 이주와 학살을 피해 다른 이름과 종교로 살아야 했다. 크림반도의 튀르크계 주민 후손인 외할머니에게도 숨겨야 할 과거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으로 넘겨질 위기에 놓였고, 살아남기 위해 이름을 바꿨다. 한 사람은 아르메니아인이라는 뿌리를 숨겼고, 또 한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이름을 숨겼다.<br><br>나치와 유대인, 독일 학자들의 망명, 튀르키예의 역사와 문학까지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데도 장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콕콕 박히면서 책장이 쉼 없이 넘어갔다. 이상하게 이야기가 많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아니면 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마야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이 사람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들어야 할 것 같은 마음. <br><br>내가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거대한 역사나 이스탄불의 풍경이 아니었다. 그저 아침에 눈을 뜨면 버스에 몸을 싣고 지랄맞은 직장으로 향해야 하는 사람. 사이가 좋지 않은 아들과의 거리를 좁힐 기회만 엿보며 나름 무진 애를 쓰고, 이 녀석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는 엄마이면서도, 시간이 조금 남으면 괜히 그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 하고, 삶의 의무에서 잠시 벗어나면 뭔가 더 해보고 싶어 하는 사람. 대단히 평온할 것도 없는 하루를 살아가는 마야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어서인지, 이 소설이 꽤 가까이 느껴졌다. 솔직하고 불평도 많지만 그런 마야가 나는 좋았다. 어쩌다 생기를 보이면 내 가족일처럼 반갑기까지 했다.<br><br>마야는 힘들 때면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그런데 바그너를 만나면서 기억은 과거를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 과거를 찾아가는 일이 되었다. 가족에게 묻혀 있던 이야기에서 튀르키예의 역사까지 하나씩 따라가다 보니, 결국 쓰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가 생겼다. 무엇이 그녀를 다시 쓰게 만들었을까. 곧 마야가 탄 비행기는 보스턴에 착륙한다. 그 전에 글을 마무리할 생각이다.<br><br>“나는 작가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내가 어떤 주제에 관해서 쓰고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튀르키예로 망명 온 독일 교수에 대해서 쓰고 있다고 답했다. 그녀는 놀란 듯 그런 사실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해한다는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라고 했다” (p. 215)]]></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532/61/cover150/893204204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5326101</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프랑스어의 실종 - [프랑스어의 실종]</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74525</link><pubDate>Thu, 27 Aug 2026 08: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7452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4771&TPaperId=1747452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7189/20/coveroff/8932404771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4771&TPaperId=1747452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프랑스어의 실종</a><br/>아시아 제바르 지음, 장진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br/></td></tr></table><br/>어떤 감정을 전달받기도 전에 그 감정을 느끼기를 요구받는 듯한 느낌이 드는 글을 만날 때가 있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의 보통의 날, 유난히 감정이 잘 다루어지지 않는 날에 아직 정리되지도 못한 감정들이 톡 하고 튀어나온 글이라면 오히려 더 좋다. 아는 척하고 싶다는 유혹을 참을만큼. 이상하게 그 마음에는 내가 끼어들어도 될 것만 같다. 그런데 소설에서만큼은 조금 다르다. 뭘 느껴야 하는지 알아채는 식으로 읽게 만드는, 어떤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 감정에 먼저 도달해버린 듯한 문장을 만나면 김이 좀 샌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 읽은 아시아 제바르의 글에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그냥 인물이 그 상황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견디는지를 따라가게 할 뿐이었다. 무언가를 더 느끼라고 재촉하지 않으니 나도 내 속도대로, 내가 느낀 감정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br><br>그동안 내가 글로 접한, 식민 지배를 겪은 인물들은 대체로 지배자의 언어로 자기 감정을 말해야 할 때, 분명 자기 감정인데 자기 말이 아닌 듯한 순간, 입 밖으로 말을 내뱉는 그 순간부터 감정조차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어지는 비참함을 들여다보도록 했다. 그래서 &lt;프랑스어의 실종&gt;이라는 제목에 갸우뚱했다. 알제리 작가가 쓴, 알제리 남자의 이야기인데? 사라진 건 프랑스어가 아니라 아랍어 쪽 아닌가. 모국어도 아닌 프랑스어를 배우고 글을 써야 했던 사람에게, 그 프랑스어마저 사라졌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라도 있었던 걸까.<br><br>20년 전 알제리를 떠난 베르칸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일하며 한 여자를 만났고, 서로 사랑했고, 결국 이별을 통보받았다. 글을 쓰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글쓰기에서도 멀어졌고 자신의 성장소설을 쓰겠다던 계획도 몇 년 전 접은 상태다. 자신의 기억과는 사뭇 달라진 고국에서 베르칸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고, 자신의 이야기도 조금씩 꺼내놓는다. 그런데 이 소설의 시점 변화가 참 독특하다. 베르칸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도 어느 순간 제3자의 시선으로 넘어간다. 알제리에 와서 친해진 어부 라시드와 대화를 나누다가 현재에서 자연스럽게 과거로 흘러가기도 한다.<br><br>“난 여섯 살이었네.” 베르칸이 다시 말을 잇는다. “프랑스 학교 2학년이었지. 그날의 카스바 거리에서 나는 우리 국기를 보았다네, 처음으로 말이야!” (p. 43)<br><br>“우리는 누구나 학창시절의 추억을 갖고 있지…. 그런데 그 시절에 대한 내 추억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날 밤의 꿈에서 벗어난다) 프랑스 선생에게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뺨을 맞은 거라네!” (p. 44)<br><br>아버지는 독립전쟁이 발발하고 알제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하나뿐인 형도, 베르칸 자신도. 그런 기억을 품고 있는 베르칸은, 이제 알제리 사람들의 눈에 그저 돈 많은 외국인으로 보일 뿐이다. 어느 정도 갖춰진 생활을 했던 프랑스에서의 삶을 접고 돌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무언가를 써야만 했던 것 같다. 그는 글이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br><br>어느 날, 방문객으로 찾아온 한 아랍 여성을 알게 된다. 모든 걸 다 잊기 위해 떠났었지만 다시 돌아왔다는 나지아. 첫 만남이라는 낯선 분위기 속에서도 서로의 시간을 빼앗으려 할 생각은 없지만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또 듣고 싶어 하는 그 드러내지 않는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서 너무나 조심스럽게 새어 나왔다. 시간은 소리도 없이 흐르는 듯했고, 나지아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 안에는 알제리의 복잡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독립운동에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민족해방전선에 의해 암살된 할아버지와 그 뒤에 남겨진 가족들의 삶까지. 베르칸과 나지아가 떠올린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독립전쟁과 죽음, 그리고 알제리 국기를 그렸다는 이유로 맞았던 한쪽 뺨이었다.<br><br>동류를 향한 끌림이라고 해야 할지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베르칸이 나지아에게 마음을 여는 데에는 언어가 분명 한몫했을 것이다. 헤어진 프랑스인 여자친구와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프랑스어로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 했다면, 나지아에게는 굳이 애써 번역하지 않아도 됐다. 자신의 감정을 다른 언어로 옮기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게다가 나지아가 들려주는, 이제는 잊어버려 정확한 뜻조차 알 수 없는 사투리와 희귀한 단어들. 가깝고도 어딘가 멀게 느껴지는 그 말들을 듣는 일이 베르칸에게는 묘한 편안함이었을 것이다. 말을 고르지 않아도 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앞에 있다는 것. 말과 몸과 생각 사이에 번역이 필요 없는 순간. 애쓰지 않아도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것. 베르칸이 나지아에게서 느낀 편안함이란 어떤 경계도 의식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그 순간에 빠져도 된다는 것이 아니었을지.<br><br>알제리 독립전쟁을 거쳐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맞은 1960년대와 1990년대 초의 알제리를 오가며, 베르칸의 삶과 기억을 따라간다. 베르칸이 자신의 성장소설 &lt;청소년&gt;을 쓰기 시작하면서 다시 열다섯 살 소년으로 돌아가기도 하는데, 그중에서도 1960년 12월 11일 알제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중시위를 묘사한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잔인한 장면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어린 베르칸이 그 나이에 느꼈을 민족주의적 열망과 흥분을 고스란히 따라가게 한다. 맨몸으로 뛰쳐나온, 아직 사춘기도 벗어나지 못한 아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것에서 뿜어져 나온 액체에 눈이 젖어 붉어지고,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혼란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무질서 속에서 손도끼 하나를 얻어 들고, 자신보다 더 앞에 서 있는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베르칸. 그리고 그들은 암담한 열광 속에서 외친다.<br><br>“알제리인의 알제리!” (p. 179)<br><br>베르칸이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식자공으로 일하다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던 이야기를 나지아에게 들려주는 장면은, 프랑스어가 그에게 무엇이었는지가 처음으로 보였다. 당시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정치적인 이야기를 좀처럼 꺼내지 않았는데, 어느 날 한 신참이 토론을 시작하며 프랑스어로 ‘라익(laïc)’이라는 단어를 내뱉는다. ‘세속적’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세속적, 합의, 대표자 회의, 내각처럼 독립 이후의 사회를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이 그들에게는 낯설었다. 가장 어린 축에 속했던 베르칸은 그때 독립만을 꿈꾸고 있던 자신들에게 정작 독립 이후의 사회를 상상하고 논의할 언어가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베르칸에게 프랑스어는 단순히 모국어의 자리를 대신한 고통의 언어라기보다는, 자신을 지배한 세계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그 세계를 넘어가기 위해 익혀야 했던 언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프랑스어를 붙들었던 건가.<br><br>어찌할 수 없는 일에 마음을 쏟아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일찍 알았던 것처럼, 어린 시절 고문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상대에 대해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고 있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견디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이었을 만큼 베르칸이라는 인물은, 자신이 겪은 일을 감정적으로 폭발시키기보다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고, 언어로 다시 정리한다. 거기에서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밀어내지 않고 말없는 소통으로 서로를 끌어당겼던 베르칸과 나지아의 첫 만남처럼 말이다.<br><br>나의 카스바, 나는 그곳으로 돌아간다. 나는 다시 살기 위해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선 내 가슴이 뛴다. 나는 그곳에서 잠들고 싶고, 언제나 안에서 회상하고 싶고, 언제나 바깥에서 달리고 싶다. 그래, 어제도, 오늘도, 언제나 그렇듯이 그날도 비록 내가 다른 곳에 있을지라도 나는 이곳에 있는 것이다…. (p. 75)]]></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7189/20/cover150/8932404771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1892036</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8월에, 책들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66458</link><pubDate>Sun, 23 Aug 2026 07: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66458</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4990996&TPaperId=174664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312/97/coveroff/893499099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77517&TPaperId=174664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6565/84/coveroff/895467751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0799&TPaperId=174664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974/49/coveroff/8932320799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0780&TPaperId=174664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790/59/coveroff/893232078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670588&TPaperId=174664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5440/54/coveroff/8935670588_2.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66458'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주문한 책이 도착해 박스를 열어 볼 때마다 어찌나 후끈한 열기를 가득 품고 있던지, 거의 구해내듯 책을 꺼낸 것 같다. 한동안 책 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 책장에 새 책들을 옮겨 보지만, 그 생각도 오래가지는 않는다. 어느새 아침으로는 습하지만 조금은 선선해졌고, 또 이때쯤이면 눈길이 가는 이야기가 생긴다. 리처드 파워스의 &lt;오버스토리&gt;라는 책을 만났다. ‘아무도 나무를 보지 않는 시대’에 대한 경고를 담은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환경 서사시라는 소개가 눈에 들어왔다. 2019년 퓰리처상 수상작이라고 적힌 띠지를 떼어내고 한 장 한 장 넘겨보는데, 예상한 것보다 더 좋았다. 단순히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 영 마음에 안 차지만, 이 두툼한 책을 읽는 동안 내게 무언가 닿는 순간이 많을 것 같다는 섣부른 확신 같은 게 들었다. <br><br>자연을 의식하며 살아본 적이 거의 없다. 나무는 늘 나무였고, 산은 늘 산이었다. 계절은 알아서 바뀌었고, 나는 그 곁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늘 거기에 있었다. 당연했다. 아니, 당연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결락이라는 말이 내 삶에 들어왔고, 아무것에도 위안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지려 마음을 쓰지 않았으니 애쓸 일도 없고, 애태우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구름 위를 걷는 듯 살아왔던 걸까. 상실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경계 너머의 것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는 기억에서도 지워졌지만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는 것만은 분명한 그날, 걷다가 저 멀리 보이는 울창한 산을 바라봤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거짓말이다.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이는 그 산은, 보기만 해도 속이 답답했다.<br><br>그렇게 걸었고 또 걸었다.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그제야 안다.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아 잊고 있었던 것들을. 냄새도 맡아보고, 소리도 들어보고, 방향도 바꿔보라고. 자연은 내다볼 줄 안다. 그러니 나는 자연에 빚을 졌다. 자연만이 아니다. 책에도 빚을 졌다. 지금은 꼭 이유가 있어야 책을 펼치는 것은 아니다. 읽다 보면 읽고 싶어지고, 읽고 싶으면 또 펼친다. 그 사이 어딘가에 의리도 조금은 있는 것 같다. 이제 아주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지나간 순간의 숨을 다시 쉬는 날이 있긴 하지만, 예전처럼 오래 붙들고 있진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 나에게, 그때의 나와 내가 해보았던 여러 시도를 떠올리게 했다. 이 책이.<br><br><br>리처드 파워스 &lt;오버스토리&gt;<br><br>오버스토리. 숲의 지붕을 이루는 나무들의 층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뿌리, 몸통, 수관, 종자’로 이어지는 목차를 보니, 나무 한 그루를 들여다보듯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는 소설인 걸까. 전후 사정도 알지 못하면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있었다”라는 이 짧은 첫머리를 읽고, 어디라고 정확히 짚을 수 없는 곳에서부터 찌르르해지면서 나의 묵힌 감정들이 올라왔다. 자연에 기대어 본 적이 있기에 조금 더 특별한 감정으로 다가왔는가 보다. 그때의 나는 분명 이 책을 읽을 생각조차 안 했을 테지만, 지금은 읽고 있다.<br><br>어떤 여자가 바닥에 앉아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다. 나무껍질이 여자의 등을 인생처럼 딱딱하게 누른다. 솔잎은 허공에 향기를 뿌리고 나무 한가운데에서 전해지는 힘이 나직한 노래를 부른다. 여자의 귀가 가장 낮은 주파수에 집중한다. 나무는 말이 존재하기 전의 말로 이야기를 한다. (p. 13)<br><br>뒤이어 “신호가 여자의 주위로 씨앗처럼 떨어진다”는 문장에 시선이 한동안 머물렀고, 당장에 눈에 띄는 것은 없었지만 천천히 비집고 나오고 있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며, 아주 조금은 가상히 여겨보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책 속의 죽음을 읽으며 누군가를 잃었던 때를 떠올렸다. 글쎄, 그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만한 말은 잘 모르겠다. 그저 어쩌지 못하겠는 마음을 책을 통해 다시 마주하니 조금 힘들었다. &lt;모든 저녁이 저물 때&gt;라는 책 때문이다.<br><br><br>예니 에르펜베크 &lt;모든 저녁이 저물 때&gt;<br><br>갈리시아의 한 작은 도시, 유대교 여성과 기독교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여덟 달 된 아기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속하는 일 앞에서 아기 엄마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예전에 장례를 마치고 아직 슬픔에 잠겨 있는 유가족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곤 했던 그녀의 발치에는, 이제 한 친구가 가져다 놓은 음식 그릇이 놓여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할머니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더 이상 할머니가 아니다. 다시 딸의 엄마일 뿐이다. 이야기는 어머니가 오래전 겪었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br><br>딸이 이제 조만간 깨닫게 될 사실을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p. 24)<br><br>그런데 작가가 이야기를 참 묘하게 끌고 간다. 한 장면을 한 방향으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아주 작은 틈을 통해 자연스럽게 다른 결로 옮겨간다. 풀어가는 방식 자체가 꽤 마음을 잡아끌고 매력 있다. 예측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마음이 슬픈데, 아름답다. 너무 알겠는데, 어디서 읽어본 적은 없다. 이러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br><br><br>그리고,<br><br><br>시몬 드 보부아르 &lt;레 망다랭&gt;<br><br>디디에 에리봉의 &lt;랭스로 돌아가다&gt;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들과 동성애자로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내가 파리에 정착하게 만든 두 가지 큰 이유였던 것 같다”는 부분을 읽고 밑줄까지 그어 가며 궁금해했다. 보부아르를. 누군가의 글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과, 그 글이 실제로 삶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 아닌가. 출신 계급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처럼, 성적 지향은 평생 감춰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았을 그가 보부아르를 읽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 자신의 삶을 전부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발견했을 때의 그 표정이, 짧은 문장 안에서도 다 들여다보이는 것만 같았다.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게 된 자의 해방감이. 나도 보부아르를 펼쳤다. 여러 책 중에서도 &lt;레 망다랭&gt;을.<br><br>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앙리는 ‘희망’이라는 뜻의 신문사 &lt;레스푸아&gt;를 운영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 앙리와 그의 동거녀이자 전직 가수인 폴이 사는 원룸에 작가 뒤브뢰유와 그의 아내 안, 딸 나딘을 비롯한 사람들이 모인다. 전쟁이 끝나가는 시기, 이들은 한자리에 모여 술과 음식을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뒤브뢰유는 앙리에게 자신의 정치적 활동에 함께할 것을 권한다. 신문사를 계속 운영하는 한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앙리도 잘 알지만,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br><br>늘 똑같은 얼굴들, 똑같은 환경, 똑같은 대화, 똑같은 문제들, 변하면 변할수록 더욱 비슷해지다니. 결국 살아 있는 채로 죽어가는가 싶은 것이다. (p. 22)<br><br>“나는 생각하는 것을 반드시 있는 그대로 말하려고 해. 조직에 매이지 않은 채 말이야.” (p. 36)<br><br>서로 다른 생각으로 충돌하고, 사랑하고, 상처받으면서도 자기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초반부만 읽어서 다 짐작할 순 없지만, 정치와 이념을 둘러싼 이야기라 읽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릴 줄 알았는데, 결국은 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생각보다 흥미롭게 읽히고 가독성도 괜찮다.<br><br><br>디노 부차티 &lt;타타르인의 사막&gt;<br><br>처음 만나는 이탈리아 작가 디노 부차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는 작가라는데, 몇 쪽을 읽는 동안 가장 크게 느낀 건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담담한데, 어딘가 착잡한 기운이 감돈다는 것.<br><br>힘들었던 기숙사 생활을 끝내고 장교가 된 조반니 드로고는 첫 부임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로 떠난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나 활기가 느껴진다기보다는 미래에 큰 기대도 없어 보이고, 심지어 헛헛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머니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길을 나선 그는 어디에 있는지도, 얼마나 먼지도 모르는 요새를 찾아 계속 산을 오른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마부에게 요새의 위치를 묻자, 뜻밖의 답이 돌아온다.<br><br>“이 부근에는 요새가 없어요.”<br><br>불안감이 밀려오지만, 그가 잘못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렇게 한참 더 올라 마침내 거대한 군사시설과 마주한다. 황량하고 냉랭한 건축물. 이번에는 정말 요새인가 싶었는데, 또 아니다. 걸인으로 보이는 어떤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며 이곳은 이미 십 년도 넘게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곳이라고 한다. 거센 바람까지 불어닥친다. 잠잠해지고 난 뒤 다시 길을 나서고, 마침내 사람이 눈에 보인다. 오르티츠라는 이름의 대위였다. 인사를 나누던 중, 대위가 드로고에게 묻는다.<br><br>“당신은 누굽니까?”<br><br>드로고는 두려움을 느낀다. 아무 뜻 없이 던진 평범한 질문이었을 텐데, 왜 이 말이 드로고에게는 대답하기 두려운 질문이었을까.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안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라도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와 쉽게 입을 떼기 어려웠을 것 같다. 드로고에게도 그랬던 건 아닐까. 이어 대위에게서 또 한 번 예상 밖의 이야기를 듣는다. 드로고의 목적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는 더 이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br><br>저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이 거주하기 힘들어 보이는 저 건물과 흉벽, 포대와 탄약고 뒤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아무도 지나쳐간 적 없다는 돌투성이 사막의 북쪽 왕국은 어떠할까? 어렴풋이 기억하건대, 지도에서 국경선 너머 광활한 지역에는 몇 안 되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요새의 높이 정도라면 몇몇 마을이나 초원, 하다못해 집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아니면 오직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의 황량함뿐일까? (...) 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요새 입구에 발조차 내딛지 않고 다시 그가 떠나온 평야로, 그의 도시로, 익숙한 옛 생활로 내려갈 수만 있다면! (p. 21)<br><br><br>버나딘 에바리스토 &lt;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gt;<br><br>흑인 여성 최초로 부커상을 받은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작품이다. 열아홉 살 딸을 둔 오십 대 여성, 자칭 전투력 넘치는 중년의 베테랑 ‘앰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앰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구 도미니크에게로 시선이 옮겨가고, 또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사람의 가족과 친구, 과거의 시간까지 닿는다. 한 사람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 사람을 둘러싼 다른 삶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열두 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내가 알지 못했던 삶의 모양들을 하나씩 만나게 될 것 같다.<br><br>한 사람을 내가 본 모습 하나, 그 단면으로만 기억하는 건 어쩐지 아쉽다. 지나고 나서야 후회로 남는 순간들이 있어서일거다. 누구나 남들이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시간이 있고, 누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니까. 그런데 참 웃긴 것이, 소설 속 인물을 바라볼 때는 내가 알지 못하는 모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깊이 들여다보려고 하면서, 현실에서는 영 그러질 못한다.<br><br><br>아무튼, 오늘도 이렇게.<br clear="all">]]></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8117/36/cover150/s17263548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81173622</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죔레는 거기에 - [죔레는 거기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45261</link><pubDate>Tue, 11 Aug 2026 21: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4526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032812&TPaperId=1744526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55/98/coveroff/k58203281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032812&TPaperId=1744526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죔레는 거기에</a><br/>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02월<br/></td></tr></table><br/>긴 호흡과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도입부에 확 빨려 들어가 100쪽을 쭈욱 읽어버리게 만든 &lt;사탄탱고&gt;의 매력에 빠졌던 작년의 그 짜릿함을 기억한다. 황폐한 마을, 곰팡내 가득한 방,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던 그 음울함이 아직도 잔재처럼 머릿속에 콱 박혀 있는데, &lt;죔레는 거기에&gt;를 펼치자 웬걸, 점심으로 먹을 감자국수를 만드는 한 노인이 나온다. 예상 밖이다. 뭔가 소박하고 인간미도 느껴지고, 첫인상부터 내가 알던 작가의 느낌과는 꽤 다르다. 그런데 또 가만히 읽고 있으면 이 편안함 속에 놓치기 힘든 미세한 긴장감이 있다. 대체 이 노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역사와 맞물려 돌아가는 이야기도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하고, 그렇게 몰입해서 읽다 보니 결국 이러나저러나 역시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이 맞긴 하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br><br>마을과도 거리가 멀어 사람도 거의 살지 않는 산 위의 집에서 살아가는 올해 아흔두 살의 은퇴한 전기 기술자 요제프(요지 아저씨)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전기 기술자와 유랑 가수, 전직 교사, 퇴역 군인 등 서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찾아오기 시작한다. 더 이상한 건 모두가 그를 “폐하”라고 부른다. 요제프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살아온 왕위 계승자라는 것이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집을 찾아온 사람들은 그를 헝가리 국가의 기틀을 세운 중세 마자르계 왕조, 아르파드 왕가의 마지막 후손으로 여기며 왕으로 추대해 왕정복고를 이루려고 한다. 물론 단순한 호기심으로 찾아온 사람도 있고, 정치적 계산을 하는 이들에게는 그가 더없이 좋은 상징이기도 하다. 영 느낌이 싸하다. 어쨌든 숱한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요제프는 왕좌에 오르는 일에 별다른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정작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랑했던 사람들, 가족, 그리고 한 인간으로 살아온 긴 세월에 관한 기억들이다. 무엇을 잃었고, 누구를 사랑했으며, 무엇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지.<br><br>처음에는 요제프가 비밀을 간직한 채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은둔자 같은 노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국회와 대주교, 유럽연합 관계자, 독일 대통령에게까지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논리를 끊임없이 세상에 던졌다. 자신을 왕위에 올리든지, 아니면 그에 걸맞은 존엄을 인정해 연금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답장을 기다린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답은 오지 않는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요제프 역시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br><br>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헝가리. 요제프는 독일 병사들의 무덤 6천 기를 찾아내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 훈장에는 당시 헝가리가 겪어야 했던 복잡한 역사도 함께 담겨 있다. 그런데 왕위 계승자이자 전쟁 영웅이었던 노인의 현실은 영 빠듯하다. 가진 돈의 거의 전부를 전기료로 쓰면서도 그는 “더 이상은 불을 때지 않겠다”며 전기난로를 사용한다. 전기료가 그렇게 부담스러우면서도 왜 굳이 전기난로를 고집하는 걸까. 그건 그렇고 잔뜩 모여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곁들인 와인 탓인지, 세월이 무거워진 탓인지 이내 잠에 들어버린 요지 아저씨. 거대한 역사와 한 사람의 초라한 일상이 한 몸 안에서 겹쳐 보이는 모습에 착잡함을 느끼며 눈길을 거두기 어려운데, 역사학자 버디지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이 요제프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한 말을 꺼낸다.<br><br>“우리에게는 아르파드 왕가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이 좋은 서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왕이 필요하고, 당신은 바로 그 자리에 딱 맞습니다.” (p. 68)<br><br>여기서 ‘좋은 서사’라는 말이 여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지 아저씨에게 지금 왕좌에 오르는 일보다 더, 더,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서로 등을 돌리게 된 가족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다. 해 질 녘 테라스에 앉아 늦봄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는 평온한 일상. 그 아름다운 풍경 너머로, 늘 목에 큰 가시가 박힌 듯한 심정으로 살아온 건 아닐까. 눈앞의 풍경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누리기에는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았을 것만 같다.<br><br>더 이상의 전개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여러 소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저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움직이듯 세상과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기준이 분명한 요지 아저씨의 시선과 말을 따라가면 될 뿐이다. 사뭇 진지함이 오가는 상황에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읽다가 난데없이 입에서 어이없는 실소가 터지게 만들기도 하는 이야기에 웃어? 울어? 말어? 싶은 순간들. 최대한 웃음 포인트를 살리고자 했다는 번역가의 마음이 곳곳에서 느껴졌고, 즐기기만 하면 됐다. 에구, 이렇게만 말하고 끝내는 것이 아쉬워, 기억에 남는 이야기 조금만 더 담고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br><br>요지 아저씨가 오늘날의 삶에서 사라진 도덕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br><br>“정직해지시오, 용감해지시오, 인내하시오, 그의 목소리는 울려 퍼졌다, (...) 이러한 고귀한 원칙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도우시오, 이것이 단순한 이성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바이며, 이것만 따르면 충분하고, 다른 어떤 지침도 필요하지 않소.” (p. 161)<br><br>요지 아저씨가 말하는 삶의 원칙은 거창한 교리나 신념이 아니라, 의외로 단순했다. 정직할 것, 용감할 것, 인내할 것. 그런데 이게 참 별것 아닌 말 같으면서도 쉽지가 않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기, 두려워도 해야 할 말을 하기, 금방 달라지는 게 없어도 조금 더 견디기. 다 아는 이야기인데 막상 내 일이 되면 또 달라진다. 무엇이 옳은지는 알고 있는데, 매번 그쪽을 선택하며 사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그저 상황이 조금은 나아지는 쪽으로 기울여 보는 거다, 오늘도.<br><br>사람이 평생을 살아도 그 인생 안에 도저히 들어맞지 않는 일이 항상 하나쯤은 있어요, (p. 274)<br><br><br>이 책의 번역가 김보국 님은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br><br>“&lt;죔레는 거기에&gt;의 경우 외국어로는 처음으로 한국어로 번역한다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선뜻 번역 의뢰를 받고는 덥석 번역을 맡겠다고는 하였으나, 헝가리 내에서 작품 관련 논의를 살펴보던 중, &lt;사탄 탱고&gt; 이후 점점 더 난해해지는 크러스너호르커이 작품의 정점이라는 어느 독자의 댓글을 읽고, ‘큰 나무에 도끼가 제대로 물렸다’라는 헝가리 속담이 떠올랐다.”<br><br>번역가에게는 처음으로 이 작품을 한국어로 옮기는 호사였다면, 독자인 나에게는 그 번역을 통해 이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한 여름날의 즐거움이었다. 헝가리를 사랑하는 번역가가 헝가리를 사랑하는 요지 아저씨의 마음을 헤아리고, 헝가리를 사랑하는 크러스너호르커이의 글을 우리에게 전해준 것 같은 느낌. 헝가리를 향한 마음이 한 사람에서 또 한 사람을 거쳐 내게까지 건너온 것 같다. 작가의 또 다른 매력, 아름답기까지 한 문장을 만날 수 있었고, 요지 아저씨와 그의 심장, 죔레까지 한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55/98/cover150/k58203281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4559880</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지금, 그리고 그때 - [지금, 그리고 그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27772</link><pubDate>Sun, 02 Aug 2026 05:1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2777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8860&TPaperId=1742777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49/18/coveroff/k90213886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8860&TPaperId=1742777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지금, 그리고 그때</a><br/>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04월<br/></td></tr></table><br/>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작품 중, 겉으로는 아버지의 이야기지만 결국 딸이 오랫동안 삼켜온 감정을 꺼내는 일이기도 했던 &lt;미스터 포터&gt;를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이들의 삶까지 토해내듯 써 내려간 딸의 심정이 오래 남았고, 그 인연이 &lt;내 어머니의 자서전&gt;으로 이어졌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한 사람의 삶에 식민주의와 사랑의 결핍이 남긴 흔적을 끝까지 따라가는 지독한 결기를 느끼면서도, 그런 삶마저 끝내 살아내는 사람의 힘 앞에서 서글픈 안심을 했던 기억이 난다.<br><br>&lt;지금, 그리고 그때&gt;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이전 작품들처럼 분노가 격렬하게 터져 나오기보다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증오와 슬픔이 삶에 깊이 배어 있었다. 이전 작품들이 과거를 끌어올려 현재를 바라보게 했다면, 이번에는 과거가 현재를 찾아오는 이야기처럼 읽혔다. 킨케이드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자전적 성격이 짙고, 카리브해 앤티가섬 출신의 한 중년 여성이 작곡가인 남편 미스터 스위트와 미국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br><br>삶은 어떤 잔인한 뜻밖의 일을 준비했을까, 어떤 부당한 과업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고된 임무를 이겨내야 할까. (p. 82)<br><br>어릴 적 엄마의 사랑을 받았지만, 결국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바나나보트를 타고 타국으로 떠나야 했던 미시즈 스위트. 사랑받았던 기억과 버려졌다는 마음의 상처를 동시에 안고 살아온 그녀에게 미국에서의 삶 역시 결코 아늑하지 않았다. 유럽 작곡가의 클래식을 듣고 자란 남편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섬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 이민자 아내. 두 사람의 출발점은 너무나 달랐다. 한때는 그 다름에 끌렸을지 몰라도, 둘 사이에 놓인 문화와 기억의 차이는 끝내 메워지지 않았고, 그 틈은 차가운 권태로 남았다. 길쭉한 다리가 매력이었던 젊은 시절의 아내는 사라지고 지금은 그저 “바나나보트를 타고 온 끔찍한 년”(p. 17)이자 자신의 삶을 가로막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남편. 그런 무시와 냉소 속에서도 미시즈 스위트는 자식을 사랑하고, 집안을 돌보고, 부엌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가 글을 쓰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기 삶의 한 조각만큼은 끝내 놓지 않는 사람. 어릴 적부터 그랬다. 그림책 너머의 의미를 먼저 읽어내던 아이였고, “그냥 내 맘대로 사는 게 내 권리”라고 말할 만큼 자신의 마음을 먼저 따르던 아이였다.<br><br>누군가의 노동과 노력 위에서 자신의 일상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미스터 스위트는, 아이를 돌보고 집을 지키며 자신의 몫까지 감당하고 있는 아내의 큰 목소리를 싫어한다. ‘전혀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싫어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그녀에게 해보지만, 매번 묵묵히, 그것도 ‘척척’ 해내는 미시즈 스위트의 유능함은 다시 그의 열등감과 좌절을 건드린다. 아내가 일상을 버텨낼수록, 그는 자신이 빼앗겼다고 믿는 삶의 피해자가 되어버렸다.<br><br>미스터 스위트는 차고 위의 작업실에 있었다. 그는 항상 그곳에 있기를 좋아했는데, 그곳이 장례식장은 아니었고, 단지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한 자신의 삶을 애도하며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p.65)<br><br>끝없이 자기 연민에 잠긴 미스터 스위트의 작업실이 마치 장례식장처럼 보이는 그 한 줄이 꽤 신랄했다. 내가 느낀 미시즈 스위트라면 남편의 이런 꼴사나운 슬픔마저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오히려 작업실 앞에 국화꽃 한 송이를 말없이 놓고 문을 닫아줄 것만 같다. 그녀는 아들 헤라클레스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모습도 그저 애들 장난으로 넘기지 않고, 아이의 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니까. 맥도날드 해피밀 사은품으로 받은 작은 플라스틱 인형은 병사가 되기도 하고, 영웅이 되기도 하며, 온 세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편 눈에 아내는 사소한 것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일 뿐이었다.<br><br>소설은 계속해서 ‘지금’과 ‘그때’를 오간다. 시간은 결국 모든 것을 그때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현재로 되살아나, 다시 지금이 된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저마다 지나온 수많은 ‘그때’를 데리고 흘러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시간을 계속 불러오는 일은 자신을 위로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시간을 자신의 삶에서 떼어내지 않는다. 행복도 상처도 결국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라는 듯이. 지워질 수도,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었던 시간을 다시 생생하게 불러내는 것. 그리하여 누군가를 쉽게 이해하거나 판단하기보다, 한 사람을 여기까지 데려온 시간을 먼저 바라보게 하는 것. 미시즈 스위트가 끝까지 붙드는 것은 바로 그런 시간이었을까. <br><br>그녀는 지나간 시간을 밀어내지 않는다. 좋았던 일이든 아팠던 일이든, 그것까지 자신의 삶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닿고 싶고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붙잡는 시간과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이 내겐 쉽지 않았다. 미시즈 스위트의 시선과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조금 피로하게 느껴졌고, 계속 애를 써야 하는 독서가 되어버리더라. 그런데도 킨케이드의 글을 읽을 때면, 글로도 말로도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품고 살아온 내 곁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사랑했는지, 미워했는지, 참고 삼켰는지 그 마음의 결을 나는 다 알 수가 없다. 분명 말해지지 못한 것이 있었을 텐데. 어쩌면 한 사람이 잊지 못한 시간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그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느린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끝내 버리지 못한 시간을 읽어야 비로소 그 사람의 현재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마음에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다시 내 엄마를 떠올렸다. 내 엄마의 그때와 지금은 어떨까. 그 속에 나는 어떤 인간일까.]]></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49/18/cover150/k90213886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491808</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최근에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었...</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12021</link><pubDate>Sun, 26 Jul 2026 04: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1202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5336&TPaperId=174120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034/29/coveroff/8932405336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87X&TPaperId=174120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94/71/coveroff/893746487x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861&TPaperId=174120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94/62/coveroff/8937464861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756687&TPaperId=174120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0/79/coveroff/897275668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52630783&TPaperId=174120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291/25/coveroff/k952630783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12021'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최근에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었는데, 호아킨 폰트라는 인물이 자기 딸의 친구이자 젊은 시인인 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이런 말을 했다.<br><br>지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그런 문학은 넘쳐 난다.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최고의 문학이다. 슬플 때를 위한 문학도 있다. 기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지식에 갈증을 느낄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절망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이 마지막 문학이 울리세스 리마와 벨라노가 하고 싶어 한 문학이다. 곧 알겠지만 심각한 오류이다. 예를 들어 평온하고 교양 있고 대체로 건전한 생활을 하는 성숙한 독자, 즉 평균적인 독자를 생각해보자. 책과 문학지를 구매하는 사람을. 자 그 사람이 여기 있다. 그 사람은 차분할 때를 위해, 평온할 때를 위해 쓰인 문학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터무니없거나 유감스러운 공모(共謀) 없이 비판적인 눈으로 그리고 냉철하게 다른 모든 종류의 문학을 읽을 수 있다. (...) 사람이 평생을 절망하면서 살 수는 없다. 몸이 결국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고통은 결국 견딜 수 없어지고, 총명함은 차가운 세찬 물줄기 속에 사라진다. 절망하는 독자는 결국 책과 멀어지고, 필연적으로 절망만 하는 사람이 된다. 아니면 절망을 치료한다! (...) 광맥을 고갈시키지 말라고! 겸허해지라고! 미지의 땅에서 찾아 헤매고 방황하라고! 그렇게 하되 빵 부스러기나 하얀 조약돌 같은 생명줄은 유지한 채! (《야만스러운 탐정들 1》, p. 321)<br><br>기존 문단의 질서에 맞서 자신들만의 문학을 꿈꾸던 반항심 가득한 청년들에게 건넨 조언이었다. 물론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지만... ㅋㅋ 내가 그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호아킨이 최고의 문학이라고 말한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을, 특정한 감정 하나에 독자를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문학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 말은 꼭 문학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br><br>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던진 호아킨의 문학적 조언이 다 와닿는 것은 아니었다. 절망에 깊이 잠긴 문학이 어떤 독자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게 하는 통로가 되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게 만들기도 하니까.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 곳도 갈 수 없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돼버린 이들에게도, 언젠가 문을 열면 자신을 기다려 줄 곳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이건 어디까지나 독자인 내 바람일 테다. 모든 종류의 문학을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을 만큼 자유롭고 성숙한 독자는 아닌, 그저 취향에 맞는 책을 집어삼키는 내게는 어둠 속을 방황하더라도 결국 삶으로 돌아올 ‘생명줄’을 쥐고 있으라는 당부의 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사실 늘 평온하기만 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아마 호아킨이 말한 평온함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기보다, 온갖 고통의 소요를 치르고도 끝내 자신을 잃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지. 지금의 나에게는 내공에 가까운 말이다.<br><br>예전에는 특정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 중 하나로 문학이 내게 이용당하곤 했다. 이제는 어떤 감정 속에 있더라도 그것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틈을 만들어준다. 그 감정에만 오래 머물지 않게 해준다고 해야 할까. 그 고마움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을 붙들고 읽어 나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삼십삼 년을 살아오며 어설프게나마 깨우친 것이 몇 있긴 해도 (진짜 있기나 한 건지...), 정말 앞날만큼은 알 수가 없다. 그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와도 모를 일이지. 그리고 오늘의 이런 건전한 생각(?)이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되면 좋겠다만, 온갖 것을 다 쏟아부어도 ‘영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싶은 개떡 같은 날은 또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런 날에는 화려한 수식어구가 필요치 않은, 그저 글을 썼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사람들의 글을 찬찬히 읽고 마음을 헤아려보며, 잠깐 내 사정은 잊고 몰입한다. 그러다 문득, 몰입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 그 어떤 틈새가 내게도 있었던 거구나 싶어 ‘이만해도 됐지 뭐’ 하며 지나간다. 그렇게 지나가진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편다.<br><br>돌고 돌아 7월에 산 책 이야기다. 이놈의 손가락이 인내라는 것을 몰라 장바구니를 비우고 또 몇 권 품에 들였다. 책을 고르는 일은 늘 그렇다. 읽고 싶은 마음은 앞서고, 참는 마음은 늘 한발 늦는다. 책 선택의 고민을 덜고, 또 다른 세계로 쉽게 발을 들일 기회를 얻는 일은 언제나 반갑고 귀한 일. 이번에도 먼저 읽고 좋은 리뷰를 남겨주신 알라디너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소박한 땡투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앞서 호아킨의 문장 하나를 붙잡고 이야기가 길어졌으니, 새 책 이야기는 가볍게 남겨야겠다.<br><br><br><br>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 눈》, 《솔로몬의 노래》<br><br>누군가의 상처를 개인의 불행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그 뒤에 놓인 사회와 역사의 그림자까지 드러내는 작품은 늘 내 책장 한 켠을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흑인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다. 그동안 만나봤던 저메이카 킨케이드는 식민지의 기억과 여성의 목소리를, 글로리아 네일러는 흑인 여성 공동체의 삶을, 옥타비아 버틀러는 SF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토니 모리슨이다.<br><br><br><br>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br><br>한 시대를 담아내는 소설, 역사와 인간이 얽힌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보스니아의 드리나강 위에 놓인 한 다리가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걸까. 시작은 다리를 둘러싼 오래된 전설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천천히 풀어낸다. 오스만 제국 시절 세워진 그 다리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가고 사라지는 시간을 지켜봤고, 제국이 바뀌고 전쟁이 휩쓸고 지나가는 시간도 묵묵히 견뎌냈다. 수백 년을 같은 자리를 지킨 다리라면, 웬만한 역사책보다 더 많은 사람의 삶과 시간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다리가 간직한 것은 거대한 역사의 기록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이야기로 남긴 순간들, 그리고 그들이 잊어버린 시간까지도 함께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br><br>사람들이란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고 전설로 바꿀 수 있는 것들만을 기억하고 다시 곱씹어 이야기하는 법이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여러 가지 자연 현상들에 대해 무관심하듯 그렇게 특별한 흔적을 남기는 법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갈 뿐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건드리지도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도 않는 법이니까. (p. 32)<br><br><br><br>알라 알아스와니 《야쿠비얀 빌딩》<br><br>1934년 아르메니아인 사업가 하굽 야쿠비얀이 카이로 중심가에 지은 10층짜리 유럽풍 건물. 처음에는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호화롭게 살아가던 최고급 아파트였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모습도 달라졌다.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떠나고, 일부 공간은 사무실이나 병원, 임대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과거 하인들이 머물던 옥상에는 값싼 거처를 찾는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또 하나의 서민 사회가 만들어졌다.<br><br>처음 만난 인물은 자키 베다. 상류층 명문가 출신이지만 혁명 이후 집안이 몰락하면서, 한때 꿈을 펼치던 엔지니어링 사무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여자를 좋아하고 음담패설을 즐긴다. 그리고 그런 그를 20년째 ‘주인님’이라 부르며 모시는 아바스카룬이 있다. 그렇다면 건물 꼭대기에는 어떤 삶이 펼쳐지고 있을까. 라크아를 행하는 모습, 침대에서 있었던 일을 부끄러움 없이 이야기하며 웃는 여자들, 그리고 빵 한 덩어리를 얻기 위해 고단한 하루를 버텨내는 사람들. 그곳에는 팍팍한 삶 속에서도 잠시나마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대단하지 않은 작은 순간들을 붙잡으며 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소곤소곤 대는 소리,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 기침 소리, 쉬지 않고 이어지는 기도문 소리와 함께.<br><br><br><br>쥴퓌 리바넬리 《세레나데》<br><br>소설의 주인공은 서른여섯 살의 마야 두란이다. 그녀는 지금 보스턴행 비행기에 올라 노트북을 펼쳤다.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생각이다. 마야는 석 달 전으로 돌아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스탄불 대학에서 외국인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하는 마야는 어느 날 독일 출신의 87세 미국인 노교수 막시밀리안 바그너를 수행하게 된다. 늘 그랬듯 튀르키예를 소개하고 손님의 편의를 도우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른손에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다른 손에는 여행 가방을 든 노교수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와 침묵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그러던 순간, 교수가 묵을 숙소로 향하는 택시 뒤를 계속 따라오는 수상한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뭐지? 공상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마야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바빠진다. 이 교수가 혹시 스파이는 아닐까. 뒤따르는 차는 정보국 차량은 아닐까. 갑자기 요원들이 들이닥쳐 교수를 납치하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상상을 펼치던 마야. 대체 왜 그녀는 몇 달이 지난 지금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 글로 남기려 하는 걸까. <br><br>나는 모든 걸 다 털어놓을 셈이다. 이렇게 다 이야기하고, 내가 목격한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야 내 고통도 극복될 테고, 삶도 단순해질 테니까. (p. 10)<br><br><br><br>마리아나 엔리케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br><br>최근에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몇 권 읽었던 터라 이쪽 작품들도 두루 살펴보던 중, ‘라틴아메리카 고딕 리얼리즘의 대가’라는 소개에 이끌려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작품을 집어 들었다. 아르헨티나의 어두운 역사와 오늘날의 사회 문제를 공포라는 장르에 녹여낸 열두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실제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방화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표제작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부터 읽어봤다. <br><br>“뭘 알고 싶어 하는 거죠?” 실비나가 물었다.<br>“음, 분신 의식이 언제쯤 끝날지 알고 싶어 하더구나.”<br>“언제쯤 끝날 걸로 보세요?”<br>“얘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지만 나는 말이다, 영원히 안 끝나면 좋겠어!” (p. 342)<br><br>어느새 웬만한 일에는 쉽게 놀라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실비나 역시 거창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소매치기가 자신의 가방 속을 들여다볼지 두려워 빈자리가 생기면 안도하는, 어디에서나 마주칠 법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실비나가 개인의 사건을 넘어 국가 폭력의 문제까지 마주하며 여성들의 연대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간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선뜻 앞에 서지는 못했던 이들이라면, 실비나를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연대는 처음부터 특별한 사람들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br><br>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사회에서는 자기 몸으로 저항하게 되고, 세상이 끝내 듣지 않는다면 사람은 결국 몸으로 말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고, 또 알려고 했을까. 세상이 보내는 신호들을 남의 일처럼 지나치고 또 하나의 끔찍한 사건 정도로 넘겨버리면서, 당장 내 앞의 현실을 살아내는 데 바빴던 내 얼굴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왜 많은 여성이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선택까지 했는지, 왜 마리아 엘레나는 끝나기를 바라야 할 이 의식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는지. 그 앞에서 나는 아직 불에 타지 않은 여성 중 하나일 뿐이었다.<br><br><br><br>H. P. 러브크래프트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br><br>공포 소설은 이상하게 손이 잘 안 갔다. 시청각적 자극 없이 활자만으로 과연 어디까지 몰입을 끌어낼 수 있을까, 늘 반신반의했다. 그런 작품이 있다고 해도 뭘 알아야 읽어볼 거 아닌가. 주구장창 고어만 늘어놓으며 사람 기분만 더럽게 만드는 공포보다는, 밤에 괜히 이불을 바짝 끌어당겨 덮고 싶게 만드는 그런 공포를 원하던 차에 이 책을 발견! 여름이 가기 전 늦은 밤에 펼쳐볼 생각이었는데,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가장 짧은 작품들 위주로 분위기만 먼저 느껴봤다. <br><br>꼿꼿한 자세로 감정 기복 없이 읽어 내려가다가도, 분명 별 타격감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읽는 도중이나 마지막 문장에 다다를 때 등을 훑고 가는 싸한 무언가가 있었다. 공포를 빌려 결국 시선을 다른 곳으로 이끄는 작품도 있었다. 난 이게 더 좋았다. 그 끝에서 마주한 기괴한 절망과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조용한 탄식. 나처럼 장르 소설과는 거리가 있는 독자에게도 의외의 재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총 14편 가운데 「랜돌프 카터의 진술」, 「에리히 잔의 연주」, 「시체를 되살리는 허버트 웨스트」, 「아웃사이더」까지 네 편을 먼저 읽었는데, 가장 오래 남은 건 마지막에 읽은 「아웃사이더」였다. 비명을 내지르게 만드는 공포가 아니라, 마치 피아노의 마지막 단조 화음을 쾅 하고 내리친 뒤, 그 울림이 한동안 가슴에 머무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br><br>과거를 망각한 덕분에 편안해지기는 했어도 내가 아웃사이더라는 것만은 언제나 기억하고 있다. 이 시대와 인간들 틈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낯선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거대한 황금 아치 너머에 있던 그 괴물에게 뻗은 내 손끝에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 표면이 만져졌을 때부터 깨달은 사실이었다. (「아웃사이더」, p. 109)<br><br><br><br>오노레 드 발자크 《잃어버린 환상》, 《골동품 진열실》<br><br>시작은 《사촌 퐁스》였다. 고구마 줄기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고른 《골짜기의 백합》도 시작부터 영 마음을 움찔거리게 했다. 아무래도 이번이 끝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래,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나. 읽으면 되지.<br><br>《잃어버린 환상》 1권의 시작을 알리는 니콜라 세샤르. 읽고 쓰는 능력이 없어 식자공이나 교정자의 역할은 할 수 없었던 수습 인쇄공 출신의 그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뜻밖의 기회를 얻는다. 국민공회의 법령을 빠르게 유포해야 했던 시대적 필요 덕분에 ‘어쩌다 보니’ 인쇄업 면허를 받고, 인쇄소 사장까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인쇄소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글을 읽고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이 운이 따르면 문짝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했던가. 때마침 몰락한 귀족 모콩브 백작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했던 백작은 살아남기 위해 인쇄소 감독관으로 일하게 되고, 세샤르는 그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다. 서로 전혀 다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뒤섞인 과정을 흥미롭게 따라가던 중에 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br><br>“가난이 끝나면 탐욕이 시작되는 법이다.” (p.21)<br><br>뒷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읽다 보면 끝이 없으니 함께 고른 《골동품 진열실》을 펼쳤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작은 지방 도시 알랑송, 아직도 옛 귀족 사회의 공기가 짙게 남아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앞서 읽어본 《잃어버린 환상》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뒤 부르봉 왕정복고를 거치며 사회 질서가 새롭게 자리 잡아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br><br>세상은 이미 신흥 부르주아가 돈의 힘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로 바뀌었건만, 발자크는 가장 먼저 혁명으로 몰락한 데그리뇽 가문을 보여준다. 많은 것을 잃었는데도 데그리뇽 후작은 여전히 과거 귀족의 명예와 품위를 붙들고 살아가고, 그 곁에서는 충직한 집사 쉐넬이 현실을 묵묵히 떠받친다. 아직은 인물들을 하나씩 소개하는 단계인데, 발자크 표 각성 한 방 기대 중.<br clear="all">]]></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369/47/cover150/k8529321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3694732</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야만스러운 탐정들 2 - [야만스러운 탐정들 2]</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99483</link><pubDate>Sun, 19 Jul 2026 05: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9948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561X&TPaperId=1739948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750/39/coveroff/893291561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561X&TPaperId=1739948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야만스러운 탐정들 2</a><br/>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06월<br/></td></tr></table><br/>기존 문단의 틀에 맞서 자신들만의 시를 꿈꾸던 겁 없던 청춘들은 자신들이 찾고자 했던 시의 뿌리를 더듬듯 오래전 자취를 감춘 여성 시인 세사레아 티나헤로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이후 이야기는 20년에 걸쳐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시인 한 사람을 찾는 이야기를 넘어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지나온 시간을 따라간다. 그 시간 속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의 기억 한가운데에는 늘 벨라노와 리마가 있다.<br><br>이름도 낯선 시인들이 쏟아지고, 담배 연기 자욱한 골방에서 문학을 이야기하던 젊은이들의 무모한 열기에 끌려갔던 1권을 지나 2권에 접어드니, 이번에는 그 뜨거움보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남는 쓸쓸함이 더 진하게 다가왔다. 볼라뇨는 분파주의에 갇힌 기성 문단을 꼬집으면서도, 그에 맞서 반항하는 젊은 시인들 역시 마냥 낭만적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삶에 시선이 더 오래 머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등장해 몇십 페이지 동안 자기 인생을 털어놓는 사람들. 그들의 삶 하나하나가 또 다른 소설처럼 읽혔다. 시적인 비약이 섞인 이야기들은 마음 한편을 묘하게 찜찜하게 만들고, 웃을 수만은 없는 삶도 끝내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들 덕분에 무겁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대단히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그렇다고 시선을 돌리게 하지는 않는 참 이상하고도 묘한 작품이다.<br><br>“지나간 시절을, 밤이 밤 속으로 침잠하던 그 순간의 시간을 생각하는 동안 위가 쓰려 왔다.” (p. 482)<br><br>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기대와 열정, 한때는 문학이 인생 그 자체였던 시절,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그때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 하듯 돌아보게 되는 감정이 왜 이리 헛헛하던지. 같은 시대를 살아도 기억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수십 명의 목소리를 통해서 말이다. 벨라노와 리마에 대해 누군가는 자유로운 예술가였다고 하고, 누군가는 무책임한 떠돌이였다고 말한다. 시대를 앞선 혁명가였다는 사람도, 시를 핑계 삼아 방황하던 청년들이었다는 사람도 있다. 특히 리마는 어느 한 곳에도 오래 머물지 않은 채 사람을 만나고, 떠나고, 또 사라진다. 그런데 리마를 잘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br><br>“리마잖아.”<br><br><br>소설 속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건축가 호아킨 폰트가 남긴 잔상도 꽤 깊었다. 자신의 딸 친구들이자 내장사실주의자로 활동했던 젊은 작가들과 인연을 맺고 있던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돌아온 뒤 자신은 이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다시 산책을 시작하고,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구하고, 상사에게 초대받아 파티에 가게 된다. 서로 닮아 있는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가 낯익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그는 이내 안도하고, 허기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배가 몹시 고팠다. 나한테는 별로 없는 일이다. 너무 배가 고르고 너무 울고 싶고 너무 기뻤다. (p. 618)”라고 말한다. 아직 삶과 이어져 있다는 감각을 아주 잠시 되찾은 것만 같은 호아킨의 모습이 어찌나 반가우면서도 먹먹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벅찬 순간 뒤에 찾아오는 상실이 너무나 쓸쓸했다.<br><br>“보이다가 안 보이다가, 있다가 없다가 했다. 거리는 어둠의 퍼즐로 변했는데 조각이 몇 개 빠져 있었고, 모자라는 조각 중 하나가 기이하게도 나 자신이었다.” (p. 620)<br><br>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에서 조금씩 밀려난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마저 희미해진다는 것. 그런데 간신히 다시 삶의 감각을 되찾았다고 느낀 순간 마주한 것이 또 다른 상실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이 과연 호아킨만의 것일까.<br><br>1권 리뷰에서 ‘나와는 접점도 거의 없고, 호감 가는 인물도 그닥 없는데 이상하게 감겨서 읽게 된다’라고 썼었다. 지금 와서 보니 그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이 소설은 ‘1970~90년대 멕시코는 이랬다’라고 설명하는 대신 수많은 사람의 기억을 따라가게 만든다. 그들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먼발치에서 슬쩍 훔쳐보는 기분으로, 뭐랄까 그 시대와 사람을 이해한다기보다 잠깐 함께 살아본 기분이 들게 하는 분위기를 따라가게 한다. 그야말로 동행. 나와는 너무 달랐고 향한 곳도 달랐지만, 어딘가에 온 힘을 쏟던 시기의 갈망과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모든 것이 어정쩡했지만 피만큼은 끓었던 시절의 나를 끌어내기도 했다. 그들에게 끌렸던 건 닮아서가 아니라 끝내 닮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무모함은 부러움도 동경도 아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한 시절을 바라보는 낭만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낭만이 피어난 곳이 어디인가. 그야말로 “현실은 결코 꿈속에서 보고 사는 것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야만의 시절이다. <br><br>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래 듣고 싶다는 생각. 묵묵히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 그들이 내게 들려만 준다면.<br><br>“제 유일한 바람은 직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열 번에 아홉 번은 구불구불한 선에 이어 뾰족뾰족한 선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에 다다르면 제 몸이 쪼개지는 듯했습니다.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요. 복부에서 시작해서 이내 머리와 목구멍까지 쪼개지는 듯한 경험이었고, 그 고통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깨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지만요.” (p. 647)]]></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750/39/cover150/893291561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503972</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