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곰돌이님의 서재 (곰돌이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29 Aug 2026 10:14:37 +0900</lastBuildDate><image><title>곰돌이</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38014177507993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곰돌이</description></image><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프랑스어의 실종 - [프랑스어의 실종]</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74525</link><pubDate>Thu, 27 Aug 2026 08: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7452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4771&TPaperId=1747452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7189/20/coveroff/8932404771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4771&TPaperId=1747452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프랑스어의 실종</a><br/>아시아 제바르 지음, 장진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br/></td></tr></table><br/>어떤 감정을 전달받기도 전에 그 감정을 느끼기를 요구받는 듯한 느낌이 드는 글을 만날 때가 있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의 보통의 날, 유난히 감정이 잘 다루어지지 않는 날에 아직 정리되지도 못한 감정들이 톡 하고 튀어나온 글이라면 오히려 더 좋다. 아는 척하고 싶다는 유혹을 참을만큼. 이상하게 그 마음에는 내가 끼어들어도 될 것만 같다. 그런데 소설에서만큼은 조금 다르다. 뭘 느껴야 하는지 알아채는 식으로 읽게 만드는, 어떤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 감정에 먼저 도달해버린 듯한 문장을 만나면 김이 좀 샌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 읽은 아시아 제바르의 글에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그냥 인물이 그 상황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견디는지를 따라가게 할 뿐이었다. 무언가를 더 느끼라고 재촉하지 않으니 나도 내 속도대로, 내가 느낀 감정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br><br>그동안 내가 글로 접한, 식민 지배를 겪은 인물들은 대체로 지배자의 언어로 자기 감정을 말해야 할 때, 분명 자기 감정인데 자기 말이 아닌 듯한 순간, 입 밖으로 말을 내뱉는 그 순간부터 감정조차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어지는 비참함을 들여다보도록 했다. 그래서 &lt;프랑스어의 실종&gt;이라는 제목에 갸우뚱했다. 알제리 작가가 쓴, 알제리 남자의 이야기인데? 사라진 건 프랑스어가 아니라 아랍어 쪽 아닌가. 모국어도 아닌 프랑스어를 배우고 글을 써야 했던 사람에게, 그 프랑스어마저 사라졌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라도 있었던 걸까.<br><br>20년 전 알제리를 떠난 베르칸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일하며 한 여자를 만났고, 서로 사랑했고, 결국 이별을 통보받았다. 글을 쓰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글쓰기에서도 멀어졌고 자신의 성장소설을 쓰겠다던 계획도 몇 년 전 접은 상태다. 자신의 기억과는 사뭇 달라진 고국에서 베르칸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고, 자신의 이야기도 조금씩 꺼내놓는다. 그런데 이 소설의 시점 변화가 참 독특하다. 베르칸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도 어느 순간 제3자의 시선으로 넘어간다. 알제리에 와서 친해진 어부 라시드와 대화를 나누다가 현재에서 자연스럽게 과거로 흘러가기도 한다.<br><br>“난 여섯 살이었네.” 베르칸이 다시 말을 잇는다. “프랑스 학교 2학년이었지. 그날의 카스바 거리에서 나는 우리 국기를 보았다네, 처음으로 말이야!” (p. 43)<br><br>“우리는 누구나 학창시절의 추억을 갖고 있지…. 그런데 그 시절에 대한 내 추억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날 밤의 꿈에서 벗어난다) 프랑스 선생에게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뺨을 맞은 거라네!” (p. 44)<br><br>아버지는 독립전쟁이 발발하고 알제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하나뿐인 형도, 베르칸 자신도. 그런 기억을 품고 있는 베르칸은, 이제 알제리 사람들의 눈에 그저 돈 많은 외국인으로 보일 뿐이다. 어느 정도 갖춰진 생활을 했던 프랑스에서의 삶을 접고 돌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무언가를 써야만 했던 것 같다. 그는 글이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br><br>어느 날, 방문객으로 찾아온 한 아랍 여성을 알게 된다. 모든 걸 다 잊기 위해 떠났었지만 다시 돌아왔다는 나지아. 첫 만남이라는 낯선 분위기 속에서도 서로의 시간을 빼앗으려 할 생각은 없지만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또 듣고 싶어 하는 그 드러내지 않는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서 너무나 조심스럽게 새어 나왔다. 시간은 소리도 없이 흐르는 듯했고, 나지아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 안에는 알제리의 복잡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독립운동에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민족해방전선에 의해 암살된 할아버지와 그 뒤에 남겨진 가족들의 삶까지. 베르칸과 나지아가 떠올린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독립전쟁과 죽음, 그리고 알제리 국기를 그렸다는 이유로 맞았던 한쪽 뺨이었다.<br><br>동류를 향한 끌림이라고 해야 할지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베르칸이 나지아에게 마음을 여는 데에는 언어가 분명 한몫했을 것이다. 헤어진 프랑스인 여자친구와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프랑스어로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 했다면, 나지아에게는 굳이 애써 번역하지 않아도 됐다. 자신의 감정을 다른 언어로 옮기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게다가 나지아가 들려주는, 이제는 잊어버려 정확한 뜻조차 알 수 없는 사투리와 희귀한 단어들. 가깝고도 어딘가 멀게 느껴지는 그 말들을 듣는 일이 베르칸에게는 묘한 편안함이었을 것이다. 말을 고르지 않아도 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앞에 있다는 것. 말과 몸과 생각 사이에 번역이 필요 없는 순간. 애쓰지 않아도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것. 베르칸이 나지아에게서 느낀 편안함이란 어떤 경계도 의식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그 순간에 빠져도 된다는 것이 아니었을지.<br><br>알제리 독립전쟁을 거쳐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맞은 1960년대와 1990년대 초의 알제리를 오가며, 베르칸의 삶과 기억을 따라간다. 베르칸이 자신의 성장소설 &lt;청소년&gt;을 쓰기 시작하면서 다시 열다섯 살 소년으로 돌아가기도 하는데, 그중에서도 1960년 12월 11일 알제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중시위를 묘사한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잔인한 장면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어린 베르칸이 그 나이에 느꼈을 민족주의적 열망과 흥분을 고스란히 따라가게 한다. 맨몸으로 뛰쳐나온, 아직 사춘기도 벗어나지 못한 아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것에서 뿜어져 나온 액체에 눈이 젖어 붉어지고,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혼란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무질서 속에서 손도끼 하나를 얻어 들고, 자신보다 더 앞에 서 있는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베르칸. 그리고 그들은 암담한 열광 속에서 외친다.<br><br>“알제리인의 알제리!” (p. 179)<br><br>베르칸이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식자공으로 일하다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던 이야기를 나지아에게 들려주는 장면은, 프랑스어가 그에게 무엇이었는지가 처음으로 보였다. 당시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정치적인 이야기를 좀처럼 꺼내지 않았는데, 어느 날 한 신참이 토론을 시작하며 프랑스어로 ‘라익(laïc)’이라는 단어를 내뱉는다. ‘세속적’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세속적, 합의, 대표자 회의, 내각처럼 독립 이후의 사회를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이 그들에게는 낯설었다. 가장 어린 축에 속했던 베르칸은 그때 독립만을 꿈꾸고 있던 자신들에게 정작 독립 이후의 사회를 상상하고 논의할 언어가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베르칸에게 프랑스어는 단순히 모국어의 자리를 대신한 고통의 언어라기보다는, 자신을 지배한 세계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그 세계를 넘어가기 위해 익혀야 했던 언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프랑스어를 붙들었던 건가.<br><br>어찌할 수 없는 일에 마음을 쏟아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일찍 알았던 것처럼, 어린 시절 고문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상대에 대해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고 있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견디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이었을 만큼 베르칸이라는 인물은, 자신이 겪은 일을 감정적으로 폭발시키기보다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고, 언어로 다시 정리한다. 거기에서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밀어내지 않고 말없는 소통으로 서로를 끌어당겼던 베르칸과 나지아의 첫 만남처럼 말이다.<br><br>나의 카스바, 나는 그곳으로 돌아간다. 나는 다시 살기 위해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선 내 가슴이 뛴다. 나는 그곳에서 잠들고 싶고, 언제나 안에서 회상하고 싶고, 언제나 바깥에서 달리고 싶다. 그래, 어제도, 오늘도, 언제나 그렇듯이 그날도 비록 내가 다른 곳에 있을지라도 나는 이곳에 있는 것이다…. (p. 75)]]></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7189/20/cover150/8932404771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1892036</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8월에, 책들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66458</link><pubDate>Sun, 23 Aug 2026 07: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66458</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4990996&TPaperId=174664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312/97/coveroff/893499099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77517&TPaperId=174664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6565/84/coveroff/895467751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0799&TPaperId=174664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974/49/coveroff/8932320799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0780&TPaperId=174664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790/59/coveroff/893232078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670588&TPaperId=174664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5440/54/coveroff/8935670588_2.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66458'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주문한 책이 도착해 박스를 열어 볼 때마다 어찌나 후끈한 열기를 가득 품고 있던지, 거의 구해내듯 책을 꺼낸 것 같다. 한동안 책 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 책장에 새 책들을 옮겨 보지만, 그 생각도 오래가지는 않는다. 어느새 아침으로는 습하지만 조금은 선선해졌고, 또 이때쯤이면 눈길이 가는 이야기가 생긴다. 리처드 파워스의 &lt;오버스토리&gt;라는 책을 만났다. ‘아무도 나무를 보지 않는 시대’에 대한 경고를 담은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환경 서사시라는 소개가 눈에 들어왔다. 2019년 퓰리처상 수상작이라고 적힌 띠지를 떼어내고 한 장 한 장 넘겨보는데, 예상한 것보다 더 좋았다. 단순히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 영 마음에 안 차지만, 이 두툼한 책을 읽는 동안 내게 무언가 닿는 순간이 많을 것 같다는 섣부른 확신 같은 게 들었다. <br><br>자연을 의식하며 살아본 적이 거의 없다. 나무는 늘 나무였고, 산은 늘 산이었다. 계절은 알아서 바뀌었고, 나는 그 곁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늘 거기에 있었다. 당연했다. 아니, 당연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결락이라는 말이 내 삶에 들어왔고, 아무것에도 위안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지려 마음을 쓰지 않았으니 애쓸 일도 없고, 애태우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구름 위를 걷는 듯 살아왔던 걸까. 상실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경계 너머의 것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는 기억에서도 지워졌지만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는 것만은 분명한 그날, 걷다가 저 멀리 보이는 울창한 산을 바라봤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거짓말이다.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이는 그 산은, 보기만 해도 속이 답답했다.<br><br>그렇게 걸었고 또 걸었다.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그제야 안다.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아 잊고 있었던 것들을. 냄새도 맡아보고, 소리도 들어보고, 방향도 바꿔보라고. 자연은 내다볼 줄 안다. 그러니 나는 자연에 빚을 졌다. 자연만이 아니다. 책에도 빚을 졌다. 지금은 꼭 이유가 있어야 책을 펼치는 것은 아니다. 읽다 보면 읽고 싶어지고, 읽고 싶으면 또 펼친다. 그 사이 어딘가에 의리도 조금은 있는 것 같다. 이제 아주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지나간 순간의 숨을 다시 쉬는 날이 있긴 하지만, 예전처럼 오래 붙들고 있진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 나에게, 그때의 나와 내가 해보았던 여러 시도를 떠올리게 했다. 이 책이.<br><br><br>리처드 파워스 &lt;오버스토리&gt;<br><br>오버스토리. 숲의 지붕을 이루는 나무들의 층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뿌리, 몸통, 수관, 종자’로 이어지는 목차를 보니, 나무 한 그루를 들여다보듯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는 소설인 걸까. 전후 사정도 알지 못하면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있었다”라는 이 짧은 첫머리를 읽고, 어디라고 정확히 짚을 수 없는 곳에서부터 찌르르해지면서 나의 묵힌 감정들이 올라왔다. 자연에 기대어 본 적이 있기에 조금 더 특별한 감정으로 다가왔는가 보다. 그때의 나는 분명 이 책을 읽을 생각조차 안 했을 테지만, 지금은 읽고 있다.<br><br>어떤 여자가 바닥에 앉아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다. 나무껍질이 여자의 등을 인생처럼 딱딱하게 누른다. 솔잎은 허공에 향기를 뿌리고 나무 한가운데에서 전해지는 힘이 나직한 노래를 부른다. 여자의 귀가 가장 낮은 주파수에 집중한다. 나무는 말이 존재하기 전의 말로 이야기를 한다. (p. 13)<br><br>뒤이어 “신호가 여자의 주위로 씨앗처럼 떨어진다”는 문장에 시선이 한동안 머물렀고, 당장에 눈에 띄는 것은 없었지만 천천히 비집고 나오고 있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며, 아주 조금은 가상히 여겨보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책 속의 죽음을 읽으며 누군가를 잃었던 때를 떠올렸다. 글쎄, 그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만한 말은 잘 모르겠다. 그저 어쩌지 못하겠는 마음을 책을 통해 다시 마주하니 조금 힘들었다. &lt;모든 저녁이 저물 때&gt;라는 책 때문이다.<br><br><br>예니 에르펜베크 &lt;모든 저녁이 저물 때&gt;<br><br>갈리시아의 한 작은 도시, 유대교 여성과 기독교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여덟 달 된 아기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속하는 일 앞에서 아기 엄마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예전에 장례를 마치고 아직 슬픔에 잠겨 있는 유가족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곤 했던 그녀의 발치에는, 이제 한 친구가 가져다 놓은 음식 그릇이 놓여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할머니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더 이상 할머니가 아니다. 다시 딸의 엄마일 뿐이다. 이야기는 어머니가 오래전 겪었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br><br>딸이 이제 조만간 깨닫게 될 사실을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p. 24)<br><br>그런데 작가가 이야기를 참 묘하게 끌고 간다. 한 장면을 한 방향으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아주 작은 틈을 통해 자연스럽게 다른 결로 옮겨간다. 풀어가는 방식 자체가 꽤 마음을 잡아끌고 매력 있다. 예측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마음이 슬픈데, 아름답다. 너무 알겠는데, 어디서 읽어본 적은 없다. 이러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br><br><br>그리고,<br><br><br>시몬 드 보부아르 &lt;레 망다랭&gt;<br><br>디디에 에리봉의 &lt;랭스로 돌아가다&gt;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들과 동성애자로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내가 파리에 정착하게 만든 두 가지 큰 이유였던 것 같다”는 부분을 읽고 밑줄까지 그어 가며 궁금해했다. 보부아르를. 누군가의 글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과, 그 글이 실제로 삶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 아닌가. 출신 계급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처럼, 성적 지향은 평생 감춰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았을 그가 보부아르를 읽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 자신의 삶을 전부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발견했을 때의 그 표정이, 짧은 문장 안에서도 다 들여다보이는 것만 같았다.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게 된 자의 해방감이. 나도 보부아르를 펼쳤다. 여러 책 중에서도 &lt;레 망다랭&gt;을.<br><br>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앙리는 ‘희망’이라는 뜻의 신문사 &lt;레스푸아&gt;를 운영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 앙리와 그의 동거녀이자 전직 가수인 폴이 사는 원룸에 작가 뒤브뢰유와 그의 아내 안, 딸 나딘을 비롯한 사람들이 모인다. 전쟁이 끝나가는 시기, 이들은 한자리에 모여 술과 음식을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뒤브뢰유는 앙리에게 자신의 정치적 활동에 함께할 것을 권한다. 신문사를 계속 운영하는 한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앙리도 잘 알지만,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br><br>늘 똑같은 얼굴들, 똑같은 환경, 똑같은 대화, 똑같은 문제들, 변하면 변할수록 더욱 비슷해지다니. 결국 살아 있는 채로 죽어가는가 싶은 것이다. (p. 22)<br><br>“나는 생각하는 것을 반드시 있는 그대로 말하려고 해. 조직에 매이지 않은 채 말이야.” (p. 36)<br><br>서로 다른 생각으로 충돌하고, 사랑하고, 상처받으면서도 자기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초반부만 읽어서 다 짐작할 순 없지만, 정치와 이념을 둘러싼 이야기라 읽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릴 줄 알았는데, 결국은 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생각보다 흥미롭게 읽히고 가독성도 괜찮다.<br><br><br>디노 부차티 &lt;타타르인의 사막&gt;<br><br>처음 만나는 이탈리아 작가 디노 부차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는 작가라는데, 몇 쪽을 읽는 동안 가장 크게 느낀 건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담담한데, 어딘가 착잡한 기운이 감돈다는 것.<br><br>힘들었던 기숙사 생활을 끝내고 장교가 된 조반니 드로고는 첫 부임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로 떠난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나 활기가 느껴진다기보다는 미래에 큰 기대도 없어 보이고, 심지어 헛헛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머니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길을 나선 그는 어디에 있는지도, 얼마나 먼지도 모르는 요새를 찾아 계속 산을 오른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마부에게 요새의 위치를 묻자, 뜻밖의 답이 돌아온다.<br><br>“이 부근에는 요새가 없어요.”<br><br>불안감이 밀려오지만, 그가 잘못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렇게 한참 더 올라 마침내 거대한 군사시설과 마주한다. 황량하고 냉랭한 건축물. 이번에는 정말 요새인가 싶었는데, 또 아니다. 걸인으로 보이는 어떤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며 이곳은 이미 십 년도 넘게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곳이라고 한다. 거센 바람까지 불어닥친다. 잠잠해지고 난 뒤 다시 길을 나서고, 마침내 사람이 눈에 보인다. 오르티츠라는 이름의 대위였다. 인사를 나누던 중, 대위가 드로고에게 묻는다.<br><br>“당신은 누굽니까?”<br><br>드로고는 두려움을 느낀다. 아무 뜻 없이 던진 평범한 질문이었을 텐데, 왜 이 말이 드로고에게는 대답하기 두려운 질문이었을까.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안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라도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와 쉽게 입을 떼기 어려웠을 것 같다. 드로고에게도 그랬던 건 아닐까. 이어 대위에게서 또 한 번 예상 밖의 이야기를 듣는다. 드로고의 목적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는 더 이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br><br>저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이 거주하기 힘들어 보이는 저 건물과 흉벽, 포대와 탄약고 뒤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아무도 지나쳐간 적 없다는 돌투성이 사막의 북쪽 왕국은 어떠할까? 어렴풋이 기억하건대, 지도에서 국경선 너머 광활한 지역에는 몇 안 되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요새의 높이 정도라면 몇몇 마을이나 초원, 하다못해 집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아니면 오직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의 황량함뿐일까? (...) 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요새 입구에 발조차 내딛지 않고 다시 그가 떠나온 평야로, 그의 도시로, 익숙한 옛 생활로 내려갈 수만 있다면! (p. 21)<br><br><br>버나딘 에바리스토 &lt;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gt;<br><br>흑인 여성 최초로 부커상을 받은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작품이다. 열아홉 살 딸을 둔 오십 대 여성, 자칭 전투력 넘치는 중년의 베테랑 ‘앰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앰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구 도미니크에게로 시선이 옮겨가고, 또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사람의 가족과 친구, 과거의 시간까지 닿는다. 한 사람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 사람을 둘러싼 다른 삶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열두 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내가 알지 못했던 삶의 모양들을 하나씩 만나게 될 것 같다.<br><br>한 사람을 내가 본 모습 하나, 그 단면으로만 기억하는 건 어쩐지 아쉽다. 지나고 나서야 후회로 남는 순간들이 있어서일거다. 누구나 남들이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시간이 있고, 누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니까. 그런데 참 웃긴 것이, 소설 속 인물을 바라볼 때는 내가 알지 못하는 모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깊이 들여다보려고 하면서, 현실에서는 영 그러질 못한다.<br><br><br>아무튼, 오늘도 이렇게.<br clear="all">]]></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8117/36/cover150/s17263548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81173622</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죔레는 거기에 - [죔레는 거기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45261</link><pubDate>Tue, 11 Aug 2026 21: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4526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032812&TPaperId=1744526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55/98/coveroff/k58203281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032812&TPaperId=1744526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죔레는 거기에</a><br/>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02월<br/></td></tr></table><br/>긴 호흡과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도입부에 확 빨려 들어가 100쪽을 쭈욱 읽어버리게 만든 &lt;사탄탱고&gt;의 매력에 빠졌던 작년의 그 짜릿함을 기억한다. 황폐한 마을, 곰팡내 가득한 방,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던 그 음울함이 아직도 잔재처럼 머릿속에 콱 박혀 있는데, &lt;죔레는 거기에&gt;를 펼치자 웬걸, 점심으로 먹을 감자국수를 만드는 한 노인이 나온다. 예상 밖이다. 뭔가 소박하고 인간미도 느껴지고, 첫인상부터 내가 알던 작가의 느낌과는 꽤 다르다. 그런데 또 가만히 읽고 있으면 이 편안함 속에 놓치기 힘든 미세한 긴장감이 있다. 대체 이 노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역사와 맞물려 돌아가는 이야기도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하고, 그렇게 몰입해서 읽다 보니 결국 이러나저러나 역시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이 맞긴 하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br><br>마을과도 거리가 멀어 사람도 거의 살지 않는 산 위의 집에서 살아가는 올해 아흔두 살의 은퇴한 전기 기술자 요제프(요지 아저씨)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전기 기술자와 유랑 가수, 전직 교사, 퇴역 군인 등 서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찾아오기 시작한다. 더 이상한 건 모두가 그를 “폐하”라고 부른다. 요제프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살아온 왕위 계승자라는 것이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집을 찾아온 사람들은 그를 헝가리 국가의 기틀을 세운 중세 마자르계 왕조, 아르파드 왕가의 마지막 후손으로 여기며 왕으로 추대해 왕정복고를 이루려고 한다. 물론 단순한 호기심으로 찾아온 사람도 있고, 정치적 계산을 하는 이들에게는 그가 더없이 좋은 상징이기도 하다. 영 느낌이 싸하다. 어쨌든 숱한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요제프는 왕좌에 오르는 일에 별다른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정작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랑했던 사람들, 가족, 그리고 한 인간으로 살아온 긴 세월에 관한 기억들이다. 무엇을 잃었고, 누구를 사랑했으며, 무엇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지.<br><br>처음에는 요제프가 비밀을 간직한 채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은둔자 같은 노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국회와 대주교, 유럽연합 관계자, 독일 대통령에게까지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논리를 끊임없이 세상에 던졌다. 자신을 왕위에 올리든지, 아니면 그에 걸맞은 존엄을 인정해 연금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답장을 기다린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답은 오지 않는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요제프 역시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br><br>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헝가리. 요제프는 독일 병사들의 무덤 6천 기를 찾아내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 훈장에는 당시 헝가리가 겪어야 했던 복잡한 역사도 함께 담겨 있다. 그런데 왕위 계승자이자 전쟁 영웅이었던 노인의 현실은 영 빠듯하다. 가진 돈의 거의 전부를 전기료로 쓰면서도 그는 “더 이상은 불을 때지 않겠다”며 전기난로를 사용한다. 전기료가 그렇게 부담스러우면서도 왜 굳이 전기난로를 고집하는 걸까. 그건 그렇고 잔뜩 모여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곁들인 와인 탓인지, 세월이 무거워진 탓인지 이내 잠에 들어버린 요지 아저씨. 거대한 역사와 한 사람의 초라한 일상이 한 몸 안에서 겹쳐 보이는 모습에 착잡함을 느끼며 눈길을 거두기 어려운데, 역사학자 버디지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이 요제프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한 말을 꺼낸다.<br><br>“우리에게는 아르파드 왕가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이 좋은 서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왕이 필요하고, 당신은 바로 그 자리에 딱 맞습니다.” (p. 68)<br><br>여기서 ‘좋은 서사’라는 말이 여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지 아저씨에게 지금 왕좌에 오르는 일보다 더, 더,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서로 등을 돌리게 된 가족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다. 해 질 녘 테라스에 앉아 늦봄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는 평온한 일상. 그 아름다운 풍경 너머로, 늘 목에 큰 가시가 박힌 듯한 심정으로 살아온 건 아닐까. 눈앞의 풍경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누리기에는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았을 것만 같다.<br><br>더 이상의 전개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여러 소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저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움직이듯 세상과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기준이 분명한 요지 아저씨의 시선과 말을 따라가면 될 뿐이다. 사뭇 진지함이 오가는 상황에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읽다가 난데없이 입에서 어이없는 실소가 터지게 만들기도 하는 이야기에 웃어? 울어? 말어? 싶은 순간들. 최대한 웃음 포인트를 살리고자 했다는 번역가의 마음이 곳곳에서 느껴졌고, 즐기기만 하면 됐다. 에구, 이렇게만 말하고 끝내는 것이 아쉬워, 기억에 남는 이야기 조금만 더 담고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br><br>요지 아저씨가 오늘날의 삶에서 사라진 도덕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br><br>“정직해지시오, 용감해지시오, 인내하시오, 그의 목소리는 울려 퍼졌다, (...) 이러한 고귀한 원칙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도우시오, 이것이 단순한 이성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바이며, 이것만 따르면 충분하고, 다른 어떤 지침도 필요하지 않소.” (p. 161)<br><br>요지 아저씨가 말하는 삶의 원칙은 거창한 교리나 신념이 아니라, 의외로 단순했다. 정직할 것, 용감할 것, 인내할 것. 그런데 이게 참 별것 아닌 말 같으면서도 쉽지가 않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기, 두려워도 해야 할 말을 하기, 금방 달라지는 게 없어도 조금 더 견디기. 다 아는 이야기인데 막상 내 일이 되면 또 달라진다. 무엇이 옳은지는 알고 있는데, 매번 그쪽을 선택하며 사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그저 상황이 조금은 나아지는 쪽으로 기울여 보는 거다, 오늘도.<br><br>사람이 평생을 살아도 그 인생 안에 도저히 들어맞지 않는 일이 항상 하나쯤은 있어요, (p. 274)<br><br><br>이 책의 번역가 김보국 님은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br><br>“&lt;죔레는 거기에&gt;의 경우 외국어로는 처음으로 한국어로 번역한다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선뜻 번역 의뢰를 받고는 덥석 번역을 맡겠다고는 하였으나, 헝가리 내에서 작품 관련 논의를 살펴보던 중, &lt;사탄 탱고&gt; 이후 점점 더 난해해지는 크러스너호르커이 작품의 정점이라는 어느 독자의 댓글을 읽고, ‘큰 나무에 도끼가 제대로 물렸다’라는 헝가리 속담이 떠올랐다.”<br><br>번역가에게는 처음으로 이 작품을 한국어로 옮기는 호사였다면, 독자인 나에게는 그 번역을 통해 이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한 여름날의 즐거움이었다. 헝가리를 사랑하는 번역가가 헝가리를 사랑하는 요지 아저씨의 마음을 헤아리고, 헝가리를 사랑하는 크러스너호르커이의 글을 우리에게 전해준 것 같은 느낌. 헝가리를 향한 마음이 한 사람에서 또 한 사람을 거쳐 내게까지 건너온 것 같다. 작가의 또 다른 매력, 아름답기까지 한 문장을 만날 수 있었고, 요지 아저씨와 그의 심장, 죔레까지 한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55/98/cover150/k58203281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4559880</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지금, 그리고 그때 - [지금, 그리고 그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27772</link><pubDate>Sun, 02 Aug 2026 05:1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2777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8860&TPaperId=1742777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49/18/coveroff/k90213886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8860&TPaperId=1742777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지금, 그리고 그때</a><br/>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04월<br/></td></tr></table><br/>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작품 중, 겉으로는 아버지의 이야기지만 결국 딸이 오랫동안 삼켜온 감정을 꺼내는 일이기도 했던 &lt;미스터 포터&gt;를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이들의 삶까지 토해내듯 써 내려간 딸의 심정이 오래 남았고, 그 인연이 &lt;내 어머니의 자서전&gt;으로 이어졌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한 사람의 삶에 식민주의와 사랑의 결핍이 남긴 흔적을 끝까지 따라가는 지독한 결기를 느끼면서도, 그런 삶마저 끝내 살아내는 사람의 힘 앞에서 서글픈 안심을 했던 기억이 난다.<br><br>&lt;지금, 그리고 그때&gt;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이전 작품들처럼 분노가 격렬하게 터져 나오기보다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증오와 슬픔이 삶에 깊이 배어 있었다. 이전 작품들이 과거를 끌어올려 현재를 바라보게 했다면, 이번에는 과거가 현재를 찾아오는 이야기처럼 읽혔다. 킨케이드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자전적 성격이 짙고, 카리브해 앤티가섬 출신의 한 중년 여성이 작곡가인 남편 미스터 스위트와 미국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br><br>삶은 어떤 잔인한 뜻밖의 일을 준비했을까, 어떤 부당한 과업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고된 임무를 이겨내야 할까. (p. 82)<br><br>어릴 적 엄마의 사랑을 받았지만, 결국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바나나보트를 타고 타국으로 떠나야 했던 미시즈 스위트. 사랑받았던 기억과 버려졌다는 마음의 상처를 동시에 안고 살아온 그녀에게 미국에서의 삶 역시 결코 아늑하지 않았다. 유럽 작곡가의 클래식을 듣고 자란 남편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섬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 이민자 아내. 두 사람의 출발점은 너무나 달랐다. 한때는 그 다름에 끌렸을지 몰라도, 둘 사이에 놓인 문화와 기억의 차이는 끝내 메워지지 않았고, 그 틈은 차가운 권태로 남았다. 길쭉한 다리가 매력이었던 젊은 시절의 아내는 사라지고 지금은 그저 “바나나보트를 타고 온 끔찍한 년”(p. 17)이자 자신의 삶을 가로막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남편. 그런 무시와 냉소 속에서도 미시즈 스위트는 자식을 사랑하고, 집안을 돌보고, 부엌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가 글을 쓰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기 삶의 한 조각만큼은 끝내 놓지 않는 사람. 어릴 적부터 그랬다. 그림책 너머의 의미를 먼저 읽어내던 아이였고, “그냥 내 맘대로 사는 게 내 권리”라고 말할 만큼 자신의 마음을 먼저 따르던 아이였다.<br><br>누군가의 노동과 노력 위에서 자신의 일상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미스터 스위트는, 아이를 돌보고 집을 지키며 자신의 몫까지 감당하고 있는 아내의 큰 목소리를 싫어한다. ‘전혀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싫어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그녀에게 해보지만, 매번 묵묵히, 그것도 ‘척척’ 해내는 미시즈 스위트의 유능함은 다시 그의 열등감과 좌절을 건드린다. 아내가 일상을 버텨낼수록, 그는 자신이 빼앗겼다고 믿는 삶의 피해자가 되어버렸다.<br><br>미스터 스위트는 차고 위의 작업실에 있었다. 그는 항상 그곳에 있기를 좋아했는데, 그곳이 장례식장은 아니었고, 단지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한 자신의 삶을 애도하며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p.65)<br><br>끝없이 자기 연민에 잠긴 미스터 스위트의 작업실이 마치 장례식장처럼 보이는 그 한 줄이 꽤 신랄했다. 내가 느낀 미시즈 스위트라면 남편의 이런 꼴사나운 슬픔마저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오히려 작업실 앞에 국화꽃 한 송이를 말없이 놓고 문을 닫아줄 것만 같다. 그녀는 아들 헤라클레스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모습도 그저 애들 장난으로 넘기지 않고, 아이의 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니까. 맥도날드 해피밀 사은품으로 받은 작은 플라스틱 인형은 병사가 되기도 하고, 영웅이 되기도 하며, 온 세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편 눈에 아내는 사소한 것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일 뿐이었다.<br><br>소설은 계속해서 ‘지금’과 ‘그때’를 오간다. 시간은 결국 모든 것을 그때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현재로 되살아나, 다시 지금이 된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저마다 지나온 수많은 ‘그때’를 데리고 흘러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시간을 계속 불러오는 일은 자신을 위로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시간을 자신의 삶에서 떼어내지 않는다. 행복도 상처도 결국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라는 듯이. 지워질 수도,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었던 시간을 다시 생생하게 불러내는 것. 그리하여 누군가를 쉽게 이해하거나 판단하기보다, 한 사람을 여기까지 데려온 시간을 먼저 바라보게 하는 것. 미시즈 스위트가 끝까지 붙드는 것은 바로 그런 시간이었을까. <br><br>그녀는 지나간 시간을 밀어내지 않는다. 좋았던 일이든 아팠던 일이든, 그것까지 자신의 삶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닿고 싶고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붙잡는 시간과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이 내겐 쉽지 않았다. 미시즈 스위트의 시선과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조금 피로하게 느껴졌고, 계속 애를 써야 하는 독서가 되어버리더라. 그런데도 킨케이드의 글을 읽을 때면, 글로도 말로도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품고 살아온 내 곁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사랑했는지, 미워했는지, 참고 삼켰는지 그 마음의 결을 나는 다 알 수가 없다. 분명 말해지지 못한 것이 있었을 텐데. 어쩌면 한 사람이 잊지 못한 시간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그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느린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끝내 버리지 못한 시간을 읽어야 비로소 그 사람의 현재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마음에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다시 내 엄마를 떠올렸다. 내 엄마의 그때와 지금은 어떨까. 그 속에 나는 어떤 인간일까.]]></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49/18/cover150/k90213886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491808</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최근에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었...</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12021</link><pubDate>Sun, 26 Jul 2026 04: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1202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5336&TPaperId=174120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034/29/coveroff/8932405336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87X&TPaperId=174120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94/71/coveroff/893746487x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861&TPaperId=174120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94/62/coveroff/8937464861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756687&TPaperId=174120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0/79/coveroff/897275668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52630783&TPaperId=174120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291/25/coveroff/k952630783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412021'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최근에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었는데, 호아킨 폰트라는 인물이 자기 딸의 친구이자 젊은 시인인 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이런 말을 했다.<br><br>지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그런 문학은 넘쳐 난다.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최고의 문학이다. 슬플 때를 위한 문학도 있다. 기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지식에 갈증을 느낄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절망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이 마지막 문학이 울리세스 리마와 벨라노가 하고 싶어 한 문학이다. 곧 알겠지만 심각한 오류이다. 예를 들어 평온하고 교양 있고 대체로 건전한 생활을 하는 성숙한 독자, 즉 평균적인 독자를 생각해보자. 책과 문학지를 구매하는 사람을. 자 그 사람이 여기 있다. 그 사람은 차분할 때를 위해, 평온할 때를 위해 쓰인 문학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터무니없거나 유감스러운 공모(共謀) 없이 비판적인 눈으로 그리고 냉철하게 다른 모든 종류의 문학을 읽을 수 있다. (...) 사람이 평생을 절망하면서 살 수는 없다. 몸이 결국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고통은 결국 견딜 수 없어지고, 총명함은 차가운 세찬 물줄기 속에 사라진다. 절망하는 독자는 결국 책과 멀어지고, 필연적으로 절망만 하는 사람이 된다. 아니면 절망을 치료한다! (...) 광맥을 고갈시키지 말라고! 겸허해지라고! 미지의 땅에서 찾아 헤매고 방황하라고! 그렇게 하되 빵 부스러기나 하얀 조약돌 같은 생명줄은 유지한 채! (《야만스러운 탐정들 1》, p. 321)<br><br>기존 문단의 질서에 맞서 자신들만의 문학을 꿈꾸던 반항심 가득한 청년들에게 건넨 조언이었다. 물론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지만... ㅋㅋ 내가 그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호아킨이 최고의 문학이라고 말한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을, 특정한 감정 하나에 독자를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문학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 말은 꼭 문학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br><br>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던진 호아킨의 문학적 조언이 다 와닿는 것은 아니었다. 절망에 깊이 잠긴 문학이 어떤 독자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게 하는 통로가 되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게 만들기도 하니까.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 곳도 갈 수 없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돼버린 이들에게도, 언젠가 문을 열면 자신을 기다려 줄 곳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이건 어디까지나 독자인 내 바람일 테다. 모든 종류의 문학을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을 만큼 자유롭고 성숙한 독자는 아닌, 그저 취향에 맞는 책을 집어삼키는 내게는 어둠 속을 방황하더라도 결국 삶으로 돌아올 ‘생명줄’을 쥐고 있으라는 당부의 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사실 늘 평온하기만 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아마 호아킨이 말한 평온함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기보다, 온갖 고통의 소요를 치르고도 끝내 자신을 잃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지. 지금의 나에게는 내공에 가까운 말이다.<br><br>예전에는 특정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 중 하나로 문학이 내게 이용당하곤 했다. 이제는 어떤 감정 속에 있더라도 그것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틈을 만들어준다. 그 감정에만 오래 머물지 않게 해준다고 해야 할까. 그 고마움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을 붙들고 읽어 나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삼십삼 년을 살아오며 어설프게나마 깨우친 것이 몇 있긴 해도 (진짜 있기나 한 건지...), 정말 앞날만큼은 알 수가 없다. 그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와도 모를 일이지. 그리고 오늘의 이런 건전한 생각(?)이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되면 좋겠다만, 온갖 것을 다 쏟아부어도 ‘영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싶은 개떡 같은 날은 또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런 날에는 화려한 수식어구가 필요치 않은, 그저 글을 썼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사람들의 글을 찬찬히 읽고 마음을 헤아려보며, 잠깐 내 사정은 잊고 몰입한다. 그러다 문득, 몰입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 그 어떤 틈새가 내게도 있었던 거구나 싶어 ‘이만해도 됐지 뭐’ 하며 지나간다. 그렇게 지나가진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편다.<br><br>돌고 돌아 7월에 산 책 이야기다. 이놈의 손가락이 인내라는 것을 몰라 장바구니를 비우고 또 몇 권 품에 들였다. 책을 고르는 일은 늘 그렇다. 읽고 싶은 마음은 앞서고, 참는 마음은 늘 한발 늦는다. 책 선택의 고민을 덜고, 또 다른 세계로 쉽게 발을 들일 기회를 얻는 일은 언제나 반갑고 귀한 일. 이번에도 먼저 읽고 좋은 리뷰를 남겨주신 알라디너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소박한 땡투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앞서 호아킨의 문장 하나를 붙잡고 이야기가 길어졌으니, 새 책 이야기는 가볍게 남겨야겠다.<br><br><br><br>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 눈》, 《솔로몬의 노래》<br><br>누군가의 상처를 개인의 불행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그 뒤에 놓인 사회와 역사의 그림자까지 드러내는 작품은 늘 내 책장 한 켠을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흑인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다. 그동안 만나봤던 저메이카 킨케이드는 식민지의 기억과 여성의 목소리를, 글로리아 네일러는 흑인 여성 공동체의 삶을, 옥타비아 버틀러는 SF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토니 모리슨이다.<br><br><br><br>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br><br>한 시대를 담아내는 소설, 역사와 인간이 얽힌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보스니아의 드리나강 위에 놓인 한 다리가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걸까. 시작은 다리를 둘러싼 오래된 전설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천천히 풀어낸다. 오스만 제국 시절 세워진 그 다리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가고 사라지는 시간을 지켜봤고, 제국이 바뀌고 전쟁이 휩쓸고 지나가는 시간도 묵묵히 견뎌냈다. 수백 년을 같은 자리를 지킨 다리라면, 웬만한 역사책보다 더 많은 사람의 삶과 시간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다리가 간직한 것은 거대한 역사의 기록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이야기로 남긴 순간들, 그리고 그들이 잊어버린 시간까지도 함께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br><br>사람들이란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고 전설로 바꿀 수 있는 것들만을 기억하고 다시 곱씹어 이야기하는 법이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여러 가지 자연 현상들에 대해 무관심하듯 그렇게 특별한 흔적을 남기는 법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갈 뿐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건드리지도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도 않는 법이니까. (p. 32)<br><br><br><br>알라 알아스와니 《야쿠비얀 빌딩》<br><br>1934년 아르메니아인 사업가 하굽 야쿠비얀이 카이로 중심가에 지은 10층짜리 유럽풍 건물. 처음에는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호화롭게 살아가던 최고급 아파트였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모습도 달라졌다.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떠나고, 일부 공간은 사무실이나 병원, 임대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과거 하인들이 머물던 옥상에는 값싼 거처를 찾는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또 하나의 서민 사회가 만들어졌다.<br><br>처음 만난 인물은 자키 베다. 상류층 명문가 출신이지만 혁명 이후 집안이 몰락하면서, 한때 꿈을 펼치던 엔지니어링 사무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여자를 좋아하고 음담패설을 즐긴다. 그리고 그런 그를 20년째 ‘주인님’이라 부르며 모시는 아바스카룬이 있다. 그렇다면 건물 꼭대기에는 어떤 삶이 펼쳐지고 있을까. 라크아를 행하는 모습, 침대에서 있었던 일을 부끄러움 없이 이야기하며 웃는 여자들, 그리고 빵 한 덩어리를 얻기 위해 고단한 하루를 버텨내는 사람들. 그곳에는 팍팍한 삶 속에서도 잠시나마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대단하지 않은 작은 순간들을 붙잡으며 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소곤소곤 대는 소리,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 기침 소리, 쉬지 않고 이어지는 기도문 소리와 함께.<br><br><br><br>쥴퓌 리바넬리 《세레나데》<br><br>소설의 주인공은 서른여섯 살의 마야 두란이다. 그녀는 지금 보스턴행 비행기에 올라 노트북을 펼쳤다.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생각이다. 마야는 석 달 전으로 돌아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스탄불 대학에서 외국인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하는 마야는 어느 날 독일 출신의 87세 미국인 노교수 막시밀리안 바그너를 수행하게 된다. 늘 그랬듯 튀르키예를 소개하고 손님의 편의를 도우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른손에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다른 손에는 여행 가방을 든 노교수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와 침묵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그러던 순간, 교수가 묵을 숙소로 향하는 택시 뒤를 계속 따라오는 수상한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뭐지? 공상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마야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바빠진다. 이 교수가 혹시 스파이는 아닐까. 뒤따르는 차는 정보국 차량은 아닐까. 갑자기 요원들이 들이닥쳐 교수를 납치하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상상을 펼치던 마야. 대체 왜 그녀는 몇 달이 지난 지금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 글로 남기려 하는 걸까. <br><br>나는 모든 걸 다 털어놓을 셈이다. 이렇게 다 이야기하고, 내가 목격한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야 내 고통도 극복될 테고, 삶도 단순해질 테니까. (p. 10)<br><br><br><br>마리아나 엔리케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br><br>최근에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몇 권 읽었던 터라 이쪽 작품들도 두루 살펴보던 중, ‘라틴아메리카 고딕 리얼리즘의 대가’라는 소개에 이끌려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작품을 집어 들었다. 아르헨티나의 어두운 역사와 오늘날의 사회 문제를 공포라는 장르에 녹여낸 열두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실제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방화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표제작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부터 읽어봤다. <br><br>“뭘 알고 싶어 하는 거죠?” 실비나가 물었다.<br>“음, 분신 의식이 언제쯤 끝날지 알고 싶어 하더구나.”<br>“언제쯤 끝날 걸로 보세요?”<br>“얘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지만 나는 말이다, 영원히 안 끝나면 좋겠어!” (p. 342)<br><br>어느새 웬만한 일에는 쉽게 놀라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실비나 역시 거창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소매치기가 자신의 가방 속을 들여다볼지 두려워 빈자리가 생기면 안도하는, 어디에서나 마주칠 법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실비나가 개인의 사건을 넘어 국가 폭력의 문제까지 마주하며 여성들의 연대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간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선뜻 앞에 서지는 못했던 이들이라면, 실비나를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연대는 처음부터 특별한 사람들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br><br>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사회에서는 자기 몸으로 저항하게 되고, 세상이 끝내 듣지 않는다면 사람은 결국 몸으로 말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고, 또 알려고 했을까. 세상이 보내는 신호들을 남의 일처럼 지나치고 또 하나의 끔찍한 사건 정도로 넘겨버리면서, 당장 내 앞의 현실을 살아내는 데 바빴던 내 얼굴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왜 많은 여성이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선택까지 했는지, 왜 마리아 엘레나는 끝나기를 바라야 할 이 의식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는지. 그 앞에서 나는 아직 불에 타지 않은 여성 중 하나일 뿐이었다.<br><br><br><br>H. P. 러브크래프트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br><br>공포 소설은 이상하게 손이 잘 안 갔다. 시청각적 자극 없이 활자만으로 과연 어디까지 몰입을 끌어낼 수 있을까, 늘 반신반의했다. 그런 작품이 있다고 해도 뭘 알아야 읽어볼 거 아닌가. 주구장창 고어만 늘어놓으며 사람 기분만 더럽게 만드는 공포보다는, 밤에 괜히 이불을 바짝 끌어당겨 덮고 싶게 만드는 그런 공포를 원하던 차에 이 책을 발견! 여름이 가기 전 늦은 밤에 펼쳐볼 생각이었는데,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가장 짧은 작품들 위주로 분위기만 먼저 느껴봤다. <br><br>꼿꼿한 자세로 감정 기복 없이 읽어 내려가다가도, 분명 별 타격감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읽는 도중이나 마지막 문장에 다다를 때 등을 훑고 가는 싸한 무언가가 있었다. 공포를 빌려 결국 시선을 다른 곳으로 이끄는 작품도 있었다. 난 이게 더 좋았다. 그 끝에서 마주한 기괴한 절망과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조용한 탄식. 나처럼 장르 소설과는 거리가 있는 독자에게도 의외의 재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총 14편 가운데 「랜돌프 카터의 진술」, 「에리히 잔의 연주」, 「시체를 되살리는 허버트 웨스트」, 「아웃사이더」까지 네 편을 먼저 읽었는데, 가장 오래 남은 건 마지막에 읽은 「아웃사이더」였다. 비명을 내지르게 만드는 공포가 아니라, 마치 피아노의 마지막 단조 화음을 쾅 하고 내리친 뒤, 그 울림이 한동안 가슴에 머무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br><br>과거를 망각한 덕분에 편안해지기는 했어도 내가 아웃사이더라는 것만은 언제나 기억하고 있다. 이 시대와 인간들 틈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낯선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거대한 황금 아치 너머에 있던 그 괴물에게 뻗은 내 손끝에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 표면이 만져졌을 때부터 깨달은 사실이었다. (「아웃사이더」, p. 109)<br><br><br><br>오노레 드 발자크 《잃어버린 환상》, 《골동품 진열실》<br><br>시작은 《사촌 퐁스》였다. 고구마 줄기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고른 《골짜기의 백합》도 시작부터 영 마음을 움찔거리게 했다. 아무래도 이번이 끝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래,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나. 읽으면 되지.<br><br>《잃어버린 환상》 1권의 시작을 알리는 니콜라 세샤르. 읽고 쓰는 능력이 없어 식자공이나 교정자의 역할은 할 수 없었던 수습 인쇄공 출신의 그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뜻밖의 기회를 얻는다. 국민공회의 법령을 빠르게 유포해야 했던 시대적 필요 덕분에 ‘어쩌다 보니’ 인쇄업 면허를 받고, 인쇄소 사장까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인쇄소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글을 읽고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이 운이 따르면 문짝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했던가. 때마침 몰락한 귀족 모콩브 백작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했던 백작은 살아남기 위해 인쇄소 감독관으로 일하게 되고, 세샤르는 그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다. 서로 전혀 다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뒤섞인 과정을 흥미롭게 따라가던 중에 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br><br>“가난이 끝나면 탐욕이 시작되는 법이다.” (p.21)<br><br>뒷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읽다 보면 끝이 없으니 함께 고른 《골동품 진열실》을 펼쳤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작은 지방 도시 알랑송, 아직도 옛 귀족 사회의 공기가 짙게 남아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앞서 읽어본 《잃어버린 환상》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뒤 부르봉 왕정복고를 거치며 사회 질서가 새롭게 자리 잡아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br><br>세상은 이미 신흥 부르주아가 돈의 힘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로 바뀌었건만, 발자크는 가장 먼저 혁명으로 몰락한 데그리뇽 가문을 보여준다. 많은 것을 잃었는데도 데그리뇽 후작은 여전히 과거 귀족의 명예와 품위를 붙들고 살아가고, 그 곁에서는 충직한 집사 쉐넬이 현실을 묵묵히 떠받친다. 아직은 인물들을 하나씩 소개하는 단계인데, 발자크 표 각성 한 방 기대 중.<br clear="all">]]></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369/47/cover150/k8529321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3694732</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야만스러운 탐정들 2 - [야만스러운 탐정들 2]</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99483</link><pubDate>Sun, 19 Jul 2026 05: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9948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561X&TPaperId=1739948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750/39/coveroff/893291561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561X&TPaperId=1739948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야만스러운 탐정들 2</a><br/>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06월<br/></td></tr></table><br/>기존 문단의 틀에 맞서 자신들만의 시를 꿈꾸던 겁 없던 청춘들은 자신들이 찾고자 했던 시의 뿌리를 더듬듯 오래전 자취를 감춘 여성 시인 세사레아 티나헤로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이후 이야기는 20년에 걸쳐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시인 한 사람을 찾는 이야기를 넘어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지나온 시간을 따라간다. 그 시간 속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의 기억 한가운데에는 늘 벨라노와 리마가 있다.<br><br>이름도 낯선 시인들이 쏟아지고, 담배 연기 자욱한 골방에서 문학을 이야기하던 젊은이들의 무모한 열기에 끌려갔던 1권을 지나 2권에 접어드니, 이번에는 그 뜨거움보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남는 쓸쓸함이 더 진하게 다가왔다. 볼라뇨는 분파주의에 갇힌 기성 문단을 꼬집으면서도, 그에 맞서 반항하는 젊은 시인들 역시 마냥 낭만적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삶에 시선이 더 오래 머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등장해 몇십 페이지 동안 자기 인생을 털어놓는 사람들. 그들의 삶 하나하나가 또 다른 소설처럼 읽혔다. 시적인 비약이 섞인 이야기들은 마음 한편을 묘하게 찜찜하게 만들고, 웃을 수만은 없는 삶도 끝내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들 덕분에 무겁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대단히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그렇다고 시선을 돌리게 하지는 않는 참 이상하고도 묘한 작품이다.<br><br>“지나간 시절을, 밤이 밤 속으로 침잠하던 그 순간의 시간을 생각하는 동안 위가 쓰려 왔다.” (p. 482)<br><br>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기대와 열정, 한때는 문학이 인생 그 자체였던 시절,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그때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 하듯 돌아보게 되는 감정이 왜 이리 헛헛하던지. 같은 시대를 살아도 기억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수십 명의 목소리를 통해서 말이다. 벨라노와 리마에 대해 누군가는 자유로운 예술가였다고 하고, 누군가는 무책임한 떠돌이였다고 말한다. 시대를 앞선 혁명가였다는 사람도, 시를 핑계 삼아 방황하던 청년들이었다는 사람도 있다. 특히 리마는 어느 한 곳에도 오래 머물지 않은 채 사람을 만나고, 떠나고, 또 사라진다. 그런데 리마를 잘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br><br>“리마잖아.”<br><br><br>소설 속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건축가 호아킨 폰트가 남긴 잔상도 꽤 깊었다. 자신의 딸 친구들이자 내장사실주의자로 활동했던 젊은 작가들과 인연을 맺고 있던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돌아온 뒤 자신은 이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다시 산책을 시작하고,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구하고, 상사에게 초대받아 파티에 가게 된다. 서로 닮아 있는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가 낯익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그는 이내 안도하고, 허기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배가 몹시 고팠다. 나한테는 별로 없는 일이다. 너무 배가 고르고 너무 울고 싶고 너무 기뻤다. (p. 618)”라고 말한다. 아직 삶과 이어져 있다는 감각을 아주 잠시 되찾은 것만 같은 호아킨의 모습이 어찌나 반가우면서도 먹먹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벅찬 순간 뒤에 찾아오는 상실이 너무나 쓸쓸했다.<br><br>“보이다가 안 보이다가, 있다가 없다가 했다. 거리는 어둠의 퍼즐로 변했는데 조각이 몇 개 빠져 있었고, 모자라는 조각 중 하나가 기이하게도 나 자신이었다.” (p. 620)<br><br>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에서 조금씩 밀려난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마저 희미해진다는 것. 그런데 간신히 다시 삶의 감각을 되찾았다고 느낀 순간 마주한 것이 또 다른 상실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이 과연 호아킨만의 것일까.<br><br>1권 리뷰에서 ‘나와는 접점도 거의 없고, 호감 가는 인물도 그닥 없는데 이상하게 감겨서 읽게 된다’라고 썼었다. 지금 와서 보니 그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이 소설은 ‘1970~90년대 멕시코는 이랬다’라고 설명하는 대신 수많은 사람의 기억을 따라가게 만든다. 그들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먼발치에서 슬쩍 훔쳐보는 기분으로, 뭐랄까 그 시대와 사람을 이해한다기보다 잠깐 함께 살아본 기분이 들게 하는 분위기를 따라가게 한다. 그야말로 동행. 나와는 너무 달랐고 향한 곳도 달랐지만, 어딘가에 온 힘을 쏟던 시기의 갈망과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모든 것이 어정쩡했지만 피만큼은 끓었던 시절의 나를 끌어내기도 했다. 그들에게 끌렸던 건 닮아서가 아니라 끝내 닮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무모함은 부러움도 동경도 아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한 시절을 바라보는 낭만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낭만이 피어난 곳이 어디인가. 그야말로 “현실은 결코 꿈속에서 보고 사는 것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야만의 시절이다. <br><br>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래 듣고 싶다는 생각. 묵묵히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 그들이 내게 들려만 준다면.<br><br>“제 유일한 바람은 직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열 번에 아홉 번은 구불구불한 선에 이어 뾰족뾰족한 선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에 다다르면 제 몸이 쪼개지는 듯했습니다.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요. 복부에서 시작해서 이내 머리와 목구멍까지 쪼개지는 듯한 경험이었고, 그 고통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깨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지만요.” (p. 647)]]></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750/39/cover150/893291561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503972</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야만스러운 탐정들 1 - [야만스러운 탐정들 1]</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82049</link><pubDate>Thu, 09 Jul 2026 09: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8204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5601&TPaperId=1738204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37/51/coveroff/893291560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5601&TPaperId=1738204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야만스러운 탐정들 1</a><br/>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06월<br/></td></tr></table><br/>내가 접해 본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lt;염소의 축제&gt;가 유일하다. 길고 긴 이름 공격에도 불구하고 뚫고 올라오는 매력과 재미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부터 로베르토 볼라뇨까지 여러 권을 책장에 채우기만 했는데, 요즈음 무거운 소설만 읽었던지라 조금은 다른 분위기를 찾다가 예상보다 이 책을 빨리 펼쳐보게 됐다는 별 필요도 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본격적으로 멕시코의 세계로 들어가야겠다.<br><br>2권으로 구성된 이 소설의 1권은 다시 두 파트로 나뉜다. 1부는 열일곱 살의 시인 지망생 ‘후안 가르시아 마데로’의 일기로 시작한다. 시가 쓰고 싶었으나 등 떠밀리듯 법대에 입학한 마데로는 기성 시인 알라모가 수업을 진행하는 대학교 안 시 창작 교실에 발을 들인다. 그런데 워낙에 패기가 지붕을 뚫고 대기권을 향해 직진하는 마데로인지라 알라모의 말이 영 와닿지가 않는다. 가고자 하는 방향도 달랐던 것 같고. 그러던 어느 날, 자신들이 발간하려는 잡지에 참여할 시인을 찾는다며 ‘내장 사실주의’인 아르투로 벨라노와 울리세스 리마가 교실 안으로 들어온다. 이들이 누구인가. 기성 문단의 질서에 순응하느니, 그 판을 한 번 뒤집어엎고 자기들 방식대로 시를 써보겠다는 청춘들이다. (참고로, 벨라노와 리마는 로베르토 볼라뇨와 그의 친구이자 동료 시인인 마리오 산티아고를 모델로 한 인물이라고 한다.) <br><br>아니, 그런데 왜 이름도 영 껄쩍지근한 ‘내장 사실주의’를 만들었을까? 정확한 이유야 하나로 설명할 수 없겠지만, 당시 이들에게는 부모 세대처럼 순응하며 살아가는 방식이 영 답답하게 느껴지고, 사회뿐 아니라 기존 문단 역시 현실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세계처럼 보였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 반항심과 시대의 분위기가 내장 사실주의가 탄생하는 데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br><br>전투가 시작되었다. 내장 사실주의자들은 알라모의 비평을 문제 삼았다. 알라모도 내장 사실주의자들을 초현실주의자들의 아류나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판했다. (p. 17)<br><br>알라모의 눈에는 이 젊은이들이 그저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초라한 아류’로 보일 뿐이지만, 진짜 삶의 바닥에서 건져 올린 시를 쓰는 건 바로 자신들뿐이라는 듯 벨라노와 리마는 굴하지 않는 기세로 대응한다. 안 그래도 교실 구석에서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마데로에게 벨라노와 리마 같은 선배들의 등장은 가슴 속 불꽃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렇게 내장 사실주의자들의 품으로 쏙 빨려 들어간 마데로의 일기를 읽다 보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공부는 안 한다. <br><br>밤새 피워대는 담배 연기로 찌든 공간에서 자신들의 이정표가 되어주는 책들을 돌려 읽던 70년대 멕시코 변방 반항아들의 뜨겁고 퀴퀴한 골방 공기가 날 것 그대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이들에게 문학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자기들이 여기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꽤나 절박한 싸움에 가까워 보였다. 완고한 권위의 벽을 쌓아 올린 기성 문학의 세계에 이들은 잘 닦인 한복판으로 멧돼지처럼 들이닥친 존재들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따금 치기 어린 시절 특유의 거들먹거림과 마초적 허세, 여기에 거침없는 농담까지 첨가된 별 시답잖은 이야기로 괜히 에너지를 쏟을 때가 (자주) 있는데, 그 소란스러운 난장판 속에서도 중심을 꽉 잡고 있는 건 시와 시인들이다. <br><br>독특하게도 2부는 1976년부터 1996년까지를 오가며 벨라노와 리마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다만 1권에서는 1979년까지의 이야기만 담긴다. 흥미로운 점은 벨라노와 리마가 누구의 기억을 거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그려진다는 것. 그만큼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평가도 제각각이다. 그중에는 작가가 자신의 분신 벨라노를 “내가 본 사람 중 최고 미남이었다. 축구를 할 때는 웃통을 벗어 상반신을 드러냈다. 그리스 신화 잡지에 나오는 그리스인과 똑같다고 생각했고, 어떤 때는 가톨릭 성인 같았다. (p. 222)˝라고 기억하는 고등학교 친구의 눈을 빌려 자신을 조각상으로 박제해 두는 장면이 나오는데 뭐, 그렇다고 하니 그런걸로... (풉) <br><br>때론 무모해 보이기도 했지만, 풋풋했던 시절의 기억 가운데 유독 눈길이 머물렀던 것 중 하나는, 나이 차이는 한참 나지만 벨라노와 친구처럼 지냈던 ‘아욱실리오 라쿠트레’의 이야기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1968년 멕시코시티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권위주의 정부에 맞서 정치적 자유와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던 학생과 시민들이 국가의 폭력 앞에 쓰러졌던 공포가 선명히 박혀 있다. 탱크가 들이닥치고 전경들이 캠퍼스를 짓밟던 야만의 시간, 사람들을 어디론가 실어 나르는 트럭을 화장실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던 아욱실리오는 화장실 문을 꼭 걸어 잠근다. 배고픔은 수돗물로 채워가며, 기억나는 시를 암송하기 시작한다. 오직 ‘시’라는 마지막 끈 하나를 붙잡은 채 그 지옥 같은 며칠을 버텨냈다. <br><br>내가 미치지 않은 것은 늘 웃음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내 치마 때문에 웃고, 내 홀태바지 때문에 웃고, 줄이 간 내 스타킹 때문에 웃고, 점점 금발이 사라지고 흰머리가 늘어나는 내 프린스 밸리언트 헤어스타일 때문에 웃고, 멕시코시티의 밤을 세심히 살피는 내 푸른 눈 때문에 웃고, 대학의 이야기들, 즉 부상(浮上)과 추락, 개무시, 승진탈락, 납작 엎드리기, 아부, 허위 업적, 멕시코시티의 밤하늘에서 분해되었다가 다시 조립되는 흔들리는 침대들 등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내 분홍빛 귀 때문에 웃었다. (p. 310)<br><br>그런 시간을 견뎌낸 끝에도 “내가 익히 아는 그 하늘 아래에서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멕시코의 모든 시인과 함께”라던 처연하면서도 단단한 그녀의 고백이, 덥고 습한 여름날 방 한구석에서 책을 붙잡고 있는 곰 한 마리의 마음을 건드린다. 아까는 허세 가득한 10대 시절 특유의 찌질하고 하찮은 모습에 피식 웃어가며 읽는 잔재미를 야무지게 뽑아먹고 있었건만, 지금은 마음이 찌릿거리고 뜨거워지고, 아 왜 이래 ㅠㅠ <br><br>참 희한하다. 나와는 접점도 거의 없고, 호감 가는 사람도 그닥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왜 감겨서 보고 있는 건지.<br>누군가는 마리화나 연기 자욱한 별채에서 겉멋 든 시를 읊조리고, 또 누군가는 내일의 삶조차 막막한 거친 길바닥에 선다. 당장 주머니는 텅 비어 있을지언정 차가운 다리 밑에 걸터앉아 밤하늘의 달을 보고, 싸구려 와인 한 잔에 밤새도록 낭만을 속삭이던 청춘들. 그런 모든 것이 뒤엉켜 있던 1970년대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볼라뇨도 이런 시절을 지나왔겠다는 생각에 더 실감이 났다. 어딘가에 미쳐 활활 불태우던 그 대책 없는 뜨거움과 유쾌함, 그리고 그 뒤에 남는 묘한 헛헛함까지. 그런 한 시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기분. 꽤 괜찮았다.<br><br>아니, 그러고 보니 정작 이들이 그토록 찾아다니는 여성 시인 ‘세사레아 티나헤로’는 언급도 안 했군...]]></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37/51/cover150/893291560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375102</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69354</link><pubDate>Thu, 02 Jul 2026 08: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6935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5742&TPaperId=173693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062/87/coveroff/897291574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5742&TPaperId=1736935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a><br/>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br/></td></tr></table><br/>전쟁터로 변한 도시를 떠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엄마 아빠와 떨어져 낯선 시골 할머니 집에 맡겨져야 하는 상황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는 아이가 있을까.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미 집안에 감도는 불안한 기운을 느낀 순간부터 이 모든것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랐을지도. 그래서 헐레벌떡 뛰어나와 두 팔로 맞이하며 쌍둥이 손자들을 향해 “우리 강아지들”이라며 반겨주는 게 아닌, “개자식들”이라고 부르는 할머니를 마주하면서도 겁먹거나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사람들이 너무나 현실 같지 않아서, 도저히 놀랄 수조차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정말 상처받지 않았는지, 놀라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지극히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적인 묘사만으로 쓰인 글을 읽으며 추측할 뿐이다.<br><br>작년에 이 책의 앞부분만 대충 훑었을 때, 할머니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채로 덮었던 기억이 난다. 하도 입이 험하고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어서. 그런데 다시 찬찬히 읽다 보니, 지옥 같은 날들을 살아온 할머니의 드러나지 않은 삶을 자꾸 유추하게 된다. 내가 이 할머니에게 연민을 느끼게 될 줄이야. 그래도 이름 한 번 불러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손자들에게 아픈 말만 쏟아냈을까 싶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한 번쯤 대들 법도 한데, 대들기는커녕 오히려 할머니가 고운 말 한마디 없이 자신들을 찔러대는 이유마저 이해한다는 듯 굴어댄다. 아니지, 할머니와 피붙이 손자의 관계라기보다는, 지옥 같은 세상을 먼저 살아낸 생존자와, 그 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가는 아이들의 기묘한 동행 같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안쓰러워하는 나를 향해, 아이들은 오히려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뀔 것만 같다.<br><br>“우는 건 소용없는 짓이에요. 우리는 절대로 울지 않아요.” (p. 49)<br> <br>전쟁터에 나가 행방을 알 수 없는 종군기자였던 아버지의 기질을 닮아서인지 탐구욕이 대단해, 할머니 몰래 집안 곳곳을 살펴보기도 한다. 가진 돈도 없이 찾아간 문방구에서 주인에게 기어이 노트와 연필을 얻어내는가 하면, 집에서 챙겨온 사전과 할머니의 다락방에 있는 성경책으로 공부하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둘만의 작문 시간에는 규칙이 존재하는데,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너무나 모호하다는 이유로 배제한 채 오직 ‘사실에 충실한 묘사’만으로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념과 근성이 대단하지만, 때때로 어린아이답지 않은 냉혹함과 잔인한 결을 비출 때면, 마치 생존이라는 목적만 남은 것처럼 보여 그 모습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뭔가 이건 아닌데,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기껏해야 초등학생 정도밖에 안 된 아이들인데, 정말 기가 막히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쩌면 이미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무조건 버텨야 한다는 마음으로 할머니 집 문턱을 넘은 것이 아닐지.<br><br>그런데 1부가 끝이 나도록 이 쌍둥이들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대도시에서 살았다는 사실만 있을 뿐 어디인지는 알 수 없고, 시골이라는 공간만 있을 뿐 할머니의 집이 어디인지도 지워져 있다. 그래서인지 분명 1부는 ‘우리’라는 1인칭 복수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인데도, 마치 타인의 삶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슬픔도, 두려움도, 상실의 고통도, 일단은 살아남기 위해, 엄마와 다시 만나 본래의 삶으로 돌아갈 그 이후로 미뤄둔 것뿐인지도 모른다.<br><br>전쟁통 속에서 오직 생존이 우선이었기에 평생 억척스럽게 일만 하며 사람의 온정 따윈 사치로 여기며 살아온 할머니. 그리고 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단 한 번도 온전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채 신체적 결함 때문에 마을 안에서도 짐승 취급을 당하며 밀려나, 기어이 짐승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언청이 소녀. 지워지지 않는 비극의 껍데기를 씌운 채 살아가는 이들을, 나 역시 끝내 그 껍데기를 벗겨내지 못한 채 할머니를 순수한 노인으로, 소녀를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참 지독하리만큼 슬픈일이다. <br><br>이 모든 것들을 “그냥 이런 일들이 있었다.” 하고 쓱 베어내듯 보여주는 1부를 지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인 서점 주인 빅토르가 등장하는 2부에 이르자, 자꾸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끼어드는 탓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더뎌졌다. 평화롭고 정상적인 일상에서는 오히려 숨을 쉬지 못하고,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야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고 글을 쓸 수 있다고 믿게 된 알코올중독자 빅토르. 그의 삶을 마주하면서, 그제야 내가 이 소설에서 ‘붙잡게 된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과,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이미 내면이 지옥이 되어 평화 속에서조차 구원받지 못하는 삶. 어느 것이 더 지옥일까.<br><br>내가 무엇을 쓸 수 있었겠는가? 내 생활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주변을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쓸 거리라고는 전혀 없었다. 누나는 끊임없이 내게 차를 날라다주고, 가구를 닦아주고, 내 장롱 안의 내 옷들을 정리해주었다. 누나는 내가 글을 얼마나 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 어깨 너머로 넘겨다보곤 했다. 그래서 나는 종이를 자꾸 메워나가야 했다. 나는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베껴놓았다. 가끔씩 누나는 내 어깨 너머로 그 문장들을 한두 장 읽어보고는 멋진 문장이라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나를 격려했다. <br>누나가 나의 속임수를 알아챌 염려는 없었다. 누나는 책이라고는 통 읽지 않으니까. 누나는 평생 동안 단 한권의 책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만 해왔기 때문에 책을 읽을 시간도 없었다. (p. 338)<br><br>3부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안다고 믿었던 것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나는 경험을 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더 눈길이 갔던 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보다, 상처가 한 인간을 만들어가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인간의 영혼을 안에서부터 서서히 무너뜨리는 상처는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또 어떤 방식으로 선을 그어 말해질 수 있는 것일까.]]></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5062/87/cover150/897291574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0628785</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작년만큼 읽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읽고 쓰기를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59270</link><pubDate>Sun, 28 Jun 2026 04: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5927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3717&TPaperId=1735927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836/2/coveroff/893746371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3709&TPaperId=1735927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835/99/coveroff/8937463709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3695&TPaperId=1735927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835/61/coveroff/8937463695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3341&TPaperId=1735927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37/41/coveroff/8932403341_3.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3627&TPaperId=1735927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38/35/coveroff/s932403627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59270'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작년만큼 읽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읽고 쓰기를 꾸준히 이어 나가는 중이다. 예전에는 생각도 못 하던 일이다. 키보드 위로 감정이 실리지 않은 글만 떨어트리던 손가락이었다. 나의 사적인 속내를 담아본다? 그건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졸음 참는 거다) 덜어내고 비워내는 것에 조급해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라도 일단 담아보자는 마음으로 그렇게 ‘쓰기’를 시작했다. 뚝딱거리던 손가락이 서서히 괜찮아질 때쯤이었을까. 권여선 작가의 책을 읽는데, 머릿속에서 뭔가 불이 번쩍했다. <br><br>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lt;각각의 계절&gt;, p. 241)<br><br>쏟아내든지, 그것도 아니면 주변을 좀 살펴보든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물어물 말만 흐리다가 곁에 있는 애먼 사람들만 안절부절못하게 만들면, 아니, 그대로 이 순간을 흘려보내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시간에만 맡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건 스스로가 잘 안다. 그렇게 읽고 쓰면서 스스로를 추슬러 보고 난 뒤에서야 “독서는 경이로운 애도” (&lt;작은 파티 드레스&gt;, p. 9)라는 크리스티앙 보뱅의 말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적다 보니 영 분위기가 우중충해질라 한다. 어쨌든! 역시, 책은 옳다. 쓰는 것도 그만큼. 때론, 그보다 더.<br><br>6월에 고른 책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내 보석함에 모셔놓은 알라디너 분들의 글을 훔쳐보다가 발견한 책 몇 권, 그리고 최근에 읽은 것 중 더 읽어보고 싶은 작가의 책 몇 권을 책장에 채워봤다. (감사의 마음은 땡투에 담아...) 더운 여름날 시원한 물 한 잔만큼이나 맛있는 찍먹의 순간! 물음표를 달고 짐작과 궁금증이 부풀어 오르는 딱 이 타이밍만의 재미를 즐기며, 이번에도 앞부분 느낌 정도만 남겨본다. 아님, 좀 더 길게.<br><br><br><br>이반 곤차로프 &lt;오블로모프&gt;<br><br>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기행 작가인 이반 곤차로프의 작품이다. 이제껏 읽어온 소설 속 인물들과는 사뭇 다른 특질을 지닌 주인공의 모습이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1850년대 러시아를 시대적 배경으로 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삼십 대 초반의 남성, 일리야 일리이치 오블로모프다.<br><br>딱 부러진 이념도 없는 것이, 무언가에 몰입할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자유로운 새처럼 생각이 얼굴에서 산책을 하고, 눈 안을 휘저으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반쯤 벌어진 입술에 내려앉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이마의 주름살 사이로 숨어버렸다가 이번엔 어디론가 아주 자취를 감춰버리곤 한다. (...) 단 한 순간 피곤도, 따분함도 그의 얼굴에서 온화함을 내몰지는 못한다. 그 온화함은 얼굴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p. 11) <br><br>저자는 그 온화함이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며 아름답게 포장해 주지만, 우리는 직감적으로 안다. 그 온화함은 지갑에서 나온다는 만고의 진리를... 돈 많은 백수임이 틀림없다! (아닌가?) 한참 사회활동을 할 법한 나이에 누워있는 게 일상인 데다가 따분함을 느낄 만하다가도 다시 유턴해서 곧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온화함을 내비칠 수 있다? 게다가 “모든 근심은 한숨으로 해결되고 무관심과 졸음 속에서 기력을 잃고 만다 (p. 12)”고 하니 혼자 속 끓여대면서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어 보이고! 좀 낡긴 했지만, 신축성 좋은 잠옷에 부드러운 신발까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흠, 그러면 그렇지.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하인까지 둔 지주였다. 그런데 집 안 꼴이 말이 아니다. 사방에 쌓인 먼지는 기본이고, 거미줄에, 널브러진 접시와 먹다 흘린 빵 부스러기까지. 나름 최소한의 질서는 있는 건지, 오블로모프가 하인 자하르를 부른다. 잠시 후, 오랜 관성과 고집으로 단련된 기존쎄 같은 기운을 풍기며 세상만사가 귀찮다는 얼굴의 자하르가 등장한다.<br><br>“집구석 한번 깨끗하다. 먼지 하며, 너절한 게, 맙소사! 저기, 저 구석 좀 보란 말야. 하는 일이 뭐야, 도대체….” <br>“아니, 하는 일이 뭐냐니유….” 자하르가 억울하다는 투로 툴툴거렸다. “애쓰구 있잖유. 사는 게 뭔지! 먼지두 훔치구, 청소두 거의 매일 하는디….”<br><br>“청소해, 구석의 쓰레기도 치우고. 그럼 빈대니 하는 것들도 없어질 거야.”<br>“치워봐야 또 쌓일 텐디유 뭐.”<br><br>160여 년 전의 러시아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뭐,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 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이 소설의 저자 이반 곤차로프는 공무원 생활을 오래 했는데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한 독특한 이력까지 있다. 그 말은 오만가지의 인간을 겪어봤다는 말씀?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느라 다들 기를 쓰고 달리는 격동의 19세기 러시아 한복판에서, 왜 하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을 소설의 전면에 내세웠을까.<br><br><br><br>아모스 오즈 &lt;유다&gt;<br><br>&lt;나의 미카엘&gt;이 워낙에 유명했지만, 딱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lt;사랑과 어둠의 이야기&gt;를 읽게 됐는데, 아주 좋았다. 강력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감정은 아니지만, 어떤 경계에서 부유하는 인간의 두려움과 머뭇거림의 기억을 공유하는 동안 생각지 못한 동질감이 느껴졌고, 마음이 쓰였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건 여전히 유효하기에. 그리고 이 책을 골랐다.<br><br>부친의 사업 실패와 연인과의 결별로 마음이 고달픈 스물다섯 살의 슈무엘. 어딘가 불안정하지만,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그는 원래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라는 제목의 석사 학위 논문을 쓰던 중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한 상태다. 아모스 오즈 문학의 중요한 무대인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둔 점이나, 슈무엘이 드나드는 사회주의 서클의 논쟁과 스탈린에 대한 담론을 담은 장면을 보고 있자면, &lt;사랑과 어둠의 이야기&gt;에 흐르던 예루살렘 지식인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br><br>학업과 사랑이 동시에 흔들리며 삶의 방향을 잃은 슈무엘은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이사를 준비하던 중, “인문학을 공부하는 미혼 남학생, 역사를 잘 알고 있으며,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는 세심한 대화가 가능한 분, 저녁마다 다섯 시간 정도 학식이 깊고 지적인 일흔 살 장애인 남성에게 말동무를 해 주시면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고 소액의 월급도 지급함. (p. 26)” 이라는 광고를 읽게 된다. 그리고 어딘가 오래된 상처와 침묵이 배어 있는 고택에서, 까다롭고 논쟁을 즐기는 노인 발트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br><br><br><br>오노레 드 발자크 &lt;고리오 영감&gt;, &lt;골짜기의 백합&gt; <br><br>발자크는 늘 읽어보고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는 작가였다. &lt;사촌 퐁스&gt;를 읽고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 모른다. 이번에 고른 &lt;고리오 영감&gt;은 ‘인물 재등장 기법’이 최초로 도입된 소설이라고 한다. 안 그래도 &lt;사촌 퐁스&gt;를 읽을 때 재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소개와 함께 줄거리가 펼쳐질 때마다, 나 혼자 초면이라 우두커니 눈만 끔벅거렸는데, 이번에는 재회의 기쁨을 느껴볼 수 있겠구나. 뭐, 딱히 더 만나고 싶은 인물은 없다만... ㅋㅋ <br><br>19세기 프랑스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의 앞부분만 슬쩍 들여다보자면, 보케르 부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이 등장한다. 주변 지형을 시작으로 냄새부터 내부 벽지 무늬, 가구와 바닥 상태 하나하나 묘사가 길고 빽빽하다. 하숙집 부동산 매물 실사 보고서를 읽는 기분이다. 나의 인내심이 책 읽을 때만큼은 진득함을 유지하기에 참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뒤이어 이 퀴퀴한 3층짜리 하숙집을 채우고 있는 세입자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고향집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파리에 상경했다는데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번뜩이는 법대생 라스티냐크, 털털하고 유쾌한 척하지만, 언뜻언뜻 구린 구석과 서늘함을 풍기는 근육맨 보트랭, 그리고 이 하숙집의 공식 샌드백이자 조롱거리이면서도 바보처럼 허허거리기만 하는 의문의 노인, 고리오 영감까지. 저마다 사연 있는 얼굴을 한 사람들이 층수별로 방값에 맞춰 다닥다닥 모여 살고 있는 이곳은 돈이 전부인 파리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다.<br><br>말라붙은 심장과 텅 빈 두개골 가운데서 어느 것이 보기에 더 끔찍스러운지 누가 결정할 수 있을 것인가? (p. 12)<br><br>그리고 똑같이 19세기 프랑스를 다룬 &lt;골짜기의 백합&gt;을 골라봤다. 우선 펼쳐 든 앞부분의 공기는 &lt;고리오 영감&gt;의 음울하면서도 퀴퀴한 파리 골목과는 전혀 딴판이다. 펠릭스라는 남성이 자신의 연인 나탈리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함께 있어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자주 상념과 침묵에 잠기던 펠릭스의 모습에, 나탈리는 그의 과거가 궁금해진 모양이다. 과연 그녀에게 지난날을 고백하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탈리가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오래 묻어둔 자신의 이야기를 기꺼이 꺼내 들기로 한다. <br><br>그렇게 펠릭스는 자신의 과거를 적어 내려간다. 갓난아기 시절 시골 보모 손에 맡겨진 일부터, 좀 자라서는 형과 누이들의 지독한 괴롭힘, 부모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채 온 집안의 애정을 철저히 박탈당했던 유년기의 외로움과 불행까지. 더욱 착잡해지는 것은, 펠릭스가 악바리 같은 정신적 저항력을 키워내며 버텨 왔다는 점이다. 부모의 방임 속에서 혼자 차별받는 펠릭스의 모습 위로, 실제 발자크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lt;사촌 퐁스&gt; 속 퐁스의 지독한 결핍이 겹쳐 보여, 이게 또 하나의 맴찢 포인트! ㅠㅠ 편지에 담긴 뒷이야기들이 어떤 내용일지 아직은 모르지만, 당장은 내가 나탈리라면 펠릭스의 편지를 읽자마자 안쓰러운 마음에 일단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을 것 같다.<br><br>내 안에서만 갇혀 살아야 하는 가혹한 운명을 바꾸려 얼마나 노력했던가! 열정적인 마음이 오랫동안 품은 희망들이 하루 만에 무너진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p. 17)<br><br>이런 가시 박힌 장벽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감정의 뿌리가 너무도 깊어서, 또 어머니의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그녀에 대한 거룩한 외경심은 버릴 수가 없어서, 우리가 더 나이 들어서 그녀를 정당하게 심판하게 된 그날까지 너무나 어리석게도 그녀를 계속 사랑했다. (p. 26)<br><br><br><br>자우메 카브레, &lt;나는 고백한다&gt;<br><br>“행복과 불행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 그저 나에게 달려 있었다. 이를 깨닫는 데 무려 육십 년이나 걸리다니. 나는 버림 받았고, 고독하고, 당신을 너무나도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당신은 나의 정신적인 지주다.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표류하지 않기 위해 떠내려가는 뗏목을 억지로 붙잡는 일은 하지 않겠다. (...) 내 마지막 기회라고 할 이 원고 앞에 나는 홀로 섰다” <br><br>이 차갑고도 고독한 고백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바르셀로나(발카르카)라는 현재와 500년 전 중세 수도원, 그리고 1690년 대재앙의 과거가 경계를 허물듯 뒤섞이며 시점이 바뀌고 교차한다. 온통 까맣게 타버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숲, 그 황량한 잿더미 속에서 돈이 될 만한 나무 밑동을 기를 쓰고 찾아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중에서도 악기용 목재를 찾아내는 데 뛰어난 눈을 가진 자키암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단순한 배경이 아닐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자키암과 그의 아버지의 대화가 이어진다.<br><br>“아무리 네가 악기용 목재를 찾아내는 데 최고의 실력을 갖추었다지만, 아들아, 이 저주받은 집안의 넷째 아들아, 우리가 절대 팔지 않을 가장 훌륭한 재질의 단풍나무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너의 목숨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앞에 닥쳐올 고난으로부터 너를 지킬 수 있는 길이야.” (p. 19)<br><br>결국 숲을 떠나야만 하는 자키암의 가혹한 운명. 그리고 소설의 서두를 연, 죄의식에 짓눌린 한 노인의 서글픈 참회. 이 두 줄기의 서사가 내 머릿속에 맞물리면서 묘한 불길함과 먹먹함을 풍기더니, 어느새 시선은 잿더미가 된 숲을 빠져나와, 골동품 수집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아버지 ‘펠릭스 아르데볼’이 지배하는 바르셀로나의 무거운 저택으로 넘어온다. 그리고 이 숨 막히는 그늘 밑에서, 앞서 등장한 노인의 유년 시절이었을 소년 ‘아드리아’가 모습을 드러낸다. 위안이 필요한, 펠릭스의 고독한 아들의 모습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인간으로 키워내기 위해 분주한 사람처럼 보이고, 어머니는 그 곁에서 묘하게 차갑다.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어린 아드리아가 아버지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게 너무나 익숙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첫머리에서 만난 그 고백이 괜히 더 아프게 읽힌다. 아직 어설픈 짐작으로 베일을 걷어내듯 읽고 있지만, 소설 속 역사적 사건, 인물들의 대화, 그리고 그 안에 감도는 공기들이 뭔가 거대한 한 지점을 향해 차곡차곡 쌓여 가는 듯한 느낌에 기대감이 끌어올려지면서 묘하게 흥분되고, 얼른 다음 장을 넘기고 싶게 만드는 맛이 있다. 다만, 오는 길이 잘 닦인 아스팔트 길 같지만은 않았다는 것.<br><br><br><br>저번 5월에 구매한 책 리스트(사촌퐁스, 마왕, 딩씨 마을의 꿈, 아메리카의 비극 등)가 ‘인간 욕망 파멸 세트’였다면, 6월은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이미 상처를 안고 있거나, 후회하고 있거나, 멈춰 서 있거나, 과거에 붙들려 있는 모습으로. 하긴, 맨날 도파민이나 터지는 탄탄대로 같은 인생사가 세상에 어딨나 싶다. 결국은 덜컹거리는 이야기들 속에서 내 삶의 어느 한 조각을 발견하게 되니, 또 읽고 또 끄덕이고 또 어딘가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 아닐지.<br><br>인간이 지상에서 거주하는 것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단순하고 일상적이며 진부한 삶일 뿐이다.(...) 우리에게 부여된 운명은 실패하는 것이며, 모든 예술과 학문에서, 그리고 가장 본질적으로는 삶이라는 순수한 예술 안에서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실패야말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다. (&lt;횔덜린의 광기&gt;, p. 340)<br clear="all">]]></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2/cover150/893201319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2231</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2 (무선) -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2 (무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46296</link><pubDate>Sun, 21 Jun 2026 05: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4629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37841&TPaperId=1734629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837/35/coveroff/895463784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37841&TPaperId=1734629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2 (무선)</a><br/>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br/></td></tr></table><br/>낡은 서랍 속에서 꺼낸 듯 기억의 먼지가 가득한 문장을 따라가는 것이 흥미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참 희한하게도 시선을 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 동안 묘하게 느껴지는 차분함도 나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왜 더 깊숙이 파고들어 가지 않지? 왜 더 끄집어내지 않지?’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는데, 지금의 평온을 굳이 깨고 싶지 않아 작은 소음조차 내지 않으려는 사람 특유의 어딘가 잔뜩 움츠린 듯한 느낌이었다.<br><br>학교 하나 보내는 데도 사회주의(붉은 위험)니, 종교 극단주의(검은 위험)니 하면서 온갖 거창한 사상과 이념을 갖다 대고 저울질을 해야 하는 오즈의 주변 환경부터 국가와 언어, 시온주의의 이상을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친가와, 잃어버린 고향의 기억이 한숨처럼 맴돌던 외가의 차이까지 읽기만 해도 가슴이 갑갑했다. 어린시절의 오즈는 또래 아랍인 여자아이에게 대화 한 번 거는 것조차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불신과 긴장을 의식하면서 “나는 네게 선의를 품고 있어”라고 증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짐을 지고 평범한 아이로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러니 가족과 이웃의 상처만 조심조심 들여다보는 그 좁은 시선이 어쩐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알 것 같다고는 말하지만 내가 얼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을까. 자기 그림자에 놀라 두려움부터 느껴야 한다는 걸.<br><br>동유럽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자라며 아름다운 문장과 낭만을 가득 품고 살았던 오즈의 엄마, 파니아. 하지만 나치에 의해 동포와 친구들을 잃고 고향마저 파괴되어 버린 상실감, 그리고 척박한 예루살렘의 현실이 주는 괴로움으로 그녀는 서서히 빛을 잃어가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뛰어난 지성을 지녔지만, 감정을 표현하고 헤아리는 데 서툴렀던 남편 곁에서 파니아가 홀로 겪은 우울증과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선택은, 결국 이 ‘집 안의 어둠’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알지 못했고, 말하지 못했고,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원망도 했지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는 무력감과, 엄마에게 자신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절망감으로 오즈는 오랜 시간 자신을 자책했다. 어린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방구석에서 숨을 죽이거나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를 채워가고 있다고 믿는 것뿐이었을 테니까. <br><br>아버지는 어머니 무릎에 머리를 대고, 돗자리에 대자로 누워, 풀잎을 씹고 있었다. 나도 똑같이 했다. 돗자리에 누워, 어머니의 다른 쪽 무릎을 베고, 풀잎을 씹으며, 겨울바람과 비가 깨끗이 씻어내린 봄에 취한 곤충들의 윙윙 소리와 싱그러운 향으로 가득한 따스한 공기로 내 허파를 채웠다. 그녀가 죽기 2년 전인, 그 봄 축제 때 텔아즈라 숲에 우리 셋이 있던 장면에서 시간을 멈출 수만 있다면, 글쓰기도 여기서 멈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p. 231)<br><br>우리는 그해 가을, 같은 독방을 쓰는 세 명의 사형수처럼 함께 묶여 들러붙어 있었다. 아직 우리는 각자였다. <br>천 년의 빛의 세월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아니, 빛의 세월이 아니다. 어둠의 세월이. <br>그러나 그들이 겪고 있는 것에 대해 내가 뭘 알았을까?<br>그리고 그들 둘은 어땠을까? 아버지는 어머니의 시련에 대해 뭘 알았을까? 어머니는 그의 고통에 대해 뭘 이해했을까?<br>천 년의 어둠의 세월은 모두를 떼어놓았다. 한 독방에 갇혀 있던 세 명의 죄수까지도. (p. 308)<br><br>살아가면서 얻은 상처나 불행이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주위를 에워싸면서 결국 그 사람의 결이 되어버릴 때가 있다. 오즈가 평생 어머니의 부재와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무엇이 일어났는가’라는 역사적 사실보다, 그 일이 한 사람에게 ‘어떤 흔적으로 남아 계속 작용하는가’라는 점에 더 주목하며 읽어 나갔다. 그러나 한 사람의 과거로만 뚝 떼놓고 볼 수 없었기에,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1권을 읽고 남겼던 “오즈가 비추는 곳은 바깥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좁고 밀폐된 ‘내부의 숨 막힘’이었다”라는 감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오즈의 모습을 아쉽게 바라봤음에도,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 <br><br>나는 구름 한 조각이 되고 싶었다. 달 표면에 놓인 돌덩이가 되고 싶었다. (p. 331)<br><br>이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세상 속에서 도대체 어떤 마음가짐으로 버티고 살아가야 할까? 당장에 내 가족의 아픔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채 놓치듯 떠나보냈는데 전쟁과 증오로 가득 찬 세상에서, 당장 내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내 마음대로 골라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서로 사랑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서로에게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걸까? 오즈의 외할아버지는 그 답을 거창한 곳이 아닌 집 안에서 찾는다.<br><br>“그런데 지옥이 뭐냐? 천국은 뭐고? 분명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있단다. 우리 각자의 집에 있어. 모든 방에서 너희는 지옥과 천국을 발견할 수 있을 게다. 모든 문 뒤에. 두 겹 담요 아래. 사실은 이런 거야. 작은 사악함으로 사람은 사람에게 지옥이 되지. 작은 연민, 작은 관대함으로 사람은 사람에게 천국이 되고.” (1권, p. 290) <br><br>거대한 비극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작은 연민과 관대함만큼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외할아버지는 오즈에게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 말은 멀리 있는 세계를 향한 말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먼저 드러나는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말 한마디를 헤아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침묵의 세월이 흘러갔던가.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아픔을 들여다보는 눈’을 통해 노년의 오즈는 이해와 후회의 잔인한 시간 속으로 들어섰고, 그 안에 남은 것은 붙잡을 수 없는 순간들뿐이었다. 후회, 먼지처럼 날아가 버렸다가도 이내 또 달라붙는 후회가 어디 그만의 것일까. 덜 후회하고 더 헤아리며 살고 싶어 다른 이들의 삶을 읽고 또 읽는데, 읽는 만큼 내가 마음도 읽고 사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서로에게 작은 지옥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그 생각만 겨우 붙잡아 본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837/35/cover150/895463784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8373599</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1 (무선) -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1 (무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36273</link><pubDate>Mon, 15 Jun 2026 15: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3627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37833&TPaperId=1733627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837/30/coveroff/8954637833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37833&TPaperId=1733627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1 (무선)</a><br/>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br/></td></tr></table><br/>작년 이맘때쯤 읽은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시블리의 &lt;사소한 일&gt;이 떠올랐다. 1948년, 이스라엘 점령군의 무자비함 속에 짓밟힌 베두인 소녀의 운명과 수십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과거를 마주해야 했던 팔레스타인 여성의 시선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들에게 그해는 나라를 빼앗기고 총칼 앞에 강제로 추방당해야 했던 ‘나크바(대재앙)’의 시작이었다.<br><br>그리고 지금, 나는 같은 역사의 다른 자리에 서 있었던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의 &lt;사랑과 어둠의 이야기&gt;를 펼쳤다. 유럽 곳곳의 오랜 반유대주의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떠나온 이민자와 난민들로 가득했던 예루살렘. 그해 유대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며 환호한다. 하지만 또다시 갈 곳 없는 난민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쪽은 나라를 빼앗기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 했고, 다른 한쪽은 오랜 박해의 기억 속에서 또다시 갈 곳 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했다. 이 대립 속에서 작가가 어떤 시선으로 이야기를 써냈는지보다, 결국 어느 쪽이든 비극과 고통을 겪어야 했을 무고한 시민들의 처연한 삶이 먼저 눈에 밟혀서인지 가슴이 턱 하고 막혔다.<br><br>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릿한 자전적 소설 속에서, 어린 ‘오즈’는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 자신이 자란 예루살렘의 케렘 아브라함 마을을 ‘체호프의 소유지’라고 말한다. 마을로 이주해 온 유대인 중 상당수가 러시아나 동유럽에서 도망쳐 온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몸은 중동 땅에 있지만, 여전히 유럽의 문화와 러시아 문학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향수와 미래의 불안 사이에 갇혀 있던 사람들, 시간이 멈춘 듯한 그곳의 공기, 그리고 그 안에서 서서히 빛을 잃고 시들어가던 어머니까지. 그래서일까. 오즈는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이웃 도시 ‘텔아비브’의 생기와 밝음을 갈망한다.<br><br>내 삶도 새로운 노래, 태양이 작열하는 날의 시원한 물 한 잔처럼 맑고 정직하고 순전한 삶이 될 것이다. (p. 16) <br><br>유월절에 처음 가본 텔아비브는 경악할 만큼 놀라운 곳이었다. 늘 집 창문 너머로 먼지 쌓인 나무나 꽉 막힌 벽만 보며 자란 꼬마에게, 거긴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한창 온몸으로 부딪치고 뛰어놀고 싶을 나이인데, 오즈는 그 자유를 오직 상상으로만 채운다. 그런데 애처롭게도, 아니 어쩌면 참 다행히도 이 덧없어 보이는 상상이 생기 없는 우울함 속에서 오즈를 숨 쉬게 하고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 지독한 결핍으로 눅눅해진 집구석에서 벗어나 바깥세상을 꿈꾸는 그 순간만큼은, 마음껏 빛나고 자유로웠을 테니까. <br><br>처음엔 역사적 수난을 앞세운 서사가 펼쳐질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오즈가 비추는 곳은 바깥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좁고 밀폐된 ‘내부의 숨 막힘’이었다. 오즈가 자란 예루살렘은 외부의 전쟁만큼이나 내부의 사상적 충돌과 갈등 역시 치열하게 부딪히던 곳이었고,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가진 역사의 상처보다 오즈를 더 짓눌렀던 건, 어른들의 거대하고 갑갑한 이념의 세계였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당장 땅과 군대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집안의 시온주의자 어른들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끝내고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지만, 신의 뜻보다 앞서 인간의 힘으로 역사를 바꾸려는 움직임을 경계했던 메아 셰아림의 정통파 유대인들과의 갈등이 컸다. 이 모든 상황을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그저 무겁기만 했지만, 그렇다고 집안 어른들이 그저 목을 죄는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대 학계의 거물이자 강한 민족주의적 신념을 지닌 큰할아버지로부터 유대인들의 고대 언어인 히브리어 단어를 배우는 시간만큼은 오즈에게 갑갑한 이념의 세계와는 다른 경이의 세계였다. 부르는 이름 없이 겉돌던 일상에 ‘셔츠’나 ‘양말’ 같은 살아있는 이름을 붙여, 진짜 현실을 선물해 주는 마법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오즈는 그 속에서 언어의 힘을 얻었다.<br><br>큰할아버지를 둘러싼 어른들은 자신들을 밀어내고 박해했던 유럽의 역사와 정치를 뼈저리게 증오하면서도 도스토옙스키와 체호프의 세계를 사랑하고, 괴테와 실러의 시를 읊조렸다. 히브리 문학의 부활부터 사회주의와 토지 균등 분배론에 이르기까지, 온갖 거창한 사상적 논쟁을 서재에서 고상하게 벌이면서도, 정작 그들이 ‘조상의 땅’이라 주장했던 곳에서 흙먼지를 마시며 농사를 짓거나, 가난한 아랍인들과 섞여 살아야 하는 현실은 경멸했던 지식인들이었다. 오즈는 이런 어른들의 위선과 모순을 빼놓지 않고 끄집어내는데, “모든 적들을 다 물리쳐야만 해. 우리가 흠씬 두들겨 패면 그들은 우리에게 평화를 구걸하게 될 거다 (p. 206)”라며 강한 힘과 민족을 앞세웠던 큰할아버지의 세계관과, “이론에 따라 삶을 구성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는 일이야! (p. 310)”라며 인간과 정의를 먼저 생각했던 외할아버지의 세계관,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라진 부모의 성향까지 모두 어린 오즈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른들의 세계였을 것이다.<br><br><br>국립도서관 사서였던 아버지 덕분에 늘 책과 가까이 지냈던 오즈에게, 인생 최고의 날은 아버지가 책장 한 칸을 비워 자신만의 책을 꽂도록 허락해 준 날이었다. 이 작은 도서관이야말로 내 편과 네 편, 허락된 행동과 금지된 행동 등으로 모든 게 명확하게 갈라져 있었던 현실과는 다른 공간이자, 수많은 다른 길을 꿈꾸고 상상할 수 있는 온전한 세계였다. 책을 펼치고, 상상하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동안, 마음속 상처와 흉터를 꼭꼭 숨기거나 억지로 씻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조각조각의 일화만으로 오즈의 삶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언제 숨통이 트였고 어떤 미래를 꿈꿨는지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왜 그가 작가가 아닌, ‘한 권의 책’ 그 자체가 되고 싶어 했는지도 말이다. <br><br>나는 사람들은 왔다가 가고 태어나고 죽지만, 책은 영원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 내 야심은 자라서 한 권의 책이 되는 것이었다. 작가가 아니라 책 말이다. 사람들은 개미처럼 죽을 수 있다. 작가들은 어떤 인물이든 쉽게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 계획적으로 파괴하려 들어도 늘 하나의 복사본이 살아남고, 레이캬비크나 바야돌리드 혹은 밴쿠버의 어딘가 인적 드문 도서관 한구석 선반에서의 삶을 계속 즐길 기회를 얻는다. (p. 46)<br><br>이 책 안에 담긴 복잡한 역사와 줄거리를 다 떠나서, 무언가 한쪽에 너무 치우치면 반드시 놓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 속 인물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줄거리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과거에 놓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나를 계속 읽어 나가게 하는지 다시 한번 멈춰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 이어졌고, 어떤 글은 그 문장 속에 그대로 파묻히고 싶기까지 했다. 이 책을 통해 얻을 거라 예상한 감정이 전혀 아니다. ‘지나친 이입이었을까’라는 소심한 염려 섞인 마음조차 이내 안도로 바뀌며, 안개 같은 무언가에 가려져 있거나 어둠 속에 묻어 둔 이야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야 꺼내놓는 오즈의 기억을 더 따라가 보려 한다. 그 좁은 책장 한 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얼마나 멀고 험난한 세월을 돌아 여기까지 왔는지, 가장 아프고 따뜻한 눈빛으로 들여다보는 노년의 오즈 곁에 아무도 모르는 존재인 나는 그저 가만히 나란히 서본다.<br><br>그대여, 묻지 말라. 이것들이 사실이오? 이게 저 작가에게 일어난 일이오? 스스로 질문하라. 자신에 관해 물으라. 그러면 그 답을 당신에게 남길 수 있을 것이니. (p. 70)]]></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837/30/cover150/8954637833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8373010</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사촌 퐁스 - [사촌 퐁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21180</link><pubDate>Sun, 07 Jun 2026 08: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2118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4755&TPaperId=1732118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4790/27/coveroff/s49213987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04755&TPaperId=1732118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촌 퐁스</a><br/>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정예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05월<br/></td></tr></table><br/>저 멀리 퐁스가 신이 나서 걸어오고 있다. 콧구멍이 벌름거리도록 만족스러운 예술품을 손에 쥔 것이다. 대중극장의 지휘자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실뱅 퐁스. 이제는 노파들이 젊은 시절 유행하던 옷으로나 기억할 법한 스펜서를 입고 다니는 노총각인 그는 입고 먹는 데 들어갈 돈까지 아껴 예술품을 사들인다. 그렇다고 굶고 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퐁스 선생에겐 다 계획이 있다. 바로 자기를 불러주는 파리 사교계와 친척 집을 돌아다니며 숟가락만 얹는 것! 눈칫밥이 대수랴, 한 움큼의 즐거움을 선사해 줄 작품도 손에 넣고 미식을 즐길 수 있다는데! 아니, 그런데 발자크 너무하다. 곧 퐁스에 대한 얼평이 시작되는데 좋은 게 하나도 없다. 듣기만 해도 울적해지는 눈, 코, 입, 눈썹, 얼굴형 묘사에 이어 여성의 마음을 끌지 못한다는 말 안 해도 알 법한 상태(?)를 굳이 또 언급하며 소개에 정점을 찍는다. 그래도 삶의 즐거움을 찾고, 또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내뿜는 열정 때문인지 시작부터 기분 좋게 읽을 수 있었다. <br><br>한때 전도유망했던 퐁스가 이제는 입에 풀칠하기 위해 싼값에 음악을 넘기는, “낡아빠진 8분 음표 (p. 15)” 같은 무명의 삶으로 전락했다. 그나마 위안이 돼줄 만한 게 있다면 그의 집에 빼곡히 차 있는 예술품들이라고 해야 할까? 부모에게 상속받은 재산마저 오직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해 고스란히 바친 퐁스가 무모해 보이기도 하면서 고독한 예술가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br><br>예술품 못지않게 퐁스가 사랑한 건 음식, 한마디로 그는 식도락가였다. 왕실의 화려함이 남아 있던 제정기 시절엔 손님 대접도 후했기에 퐁스는 젊고 잘나가던 예술가로서 귀한 대접을 받으며 파리 사교계의 풍성한 식탁에 당당히 초대받았다. 퐁스 역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이 작곡한 연가를 들려주거나, 소소한 잔심부름을 해주는 것으로 서로 기분 좋게 밥값을 톡톡히 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이 시들해지자, 사람들의 인심 역시 야박해졌다. 점점 퐁스를 부르는 초대장은 뜸해졌고, 한때 품격을 위해 모셔가던 예술가를 이제는 그저 공짜 밥이나 바라는 처량한 식객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제는 맛있는 냄새를 쫓아 경쾌하게 달리던 두 다리 대신, 야윈 손으로 낡은 지팡이를 의지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 고독하고 처량한 노년의 길을 퐁스는 혼자 걷지 않는다. 중년의 길목에서 만난 영혼의 단짝, 독일인 음악가 슈뮈크가 있기 때문이다. <br><br>두 친구 중에 한 명이 다른 한 명보다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을 때만큼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것은 없다. (p. 28)<br><br>발자크는 우정을 완전한 평등의 관계로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이상보다 현실을 본 걸까. 그렇다고 퐁스와 슈뮈크의 우정이 불편하게 그려지는 건 아니다. 서로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상대에게 으스대지 않으면서도 ‘저 녀석 내가 잘 품어줘야지’와도 같은 나쁜 의도가 없는 보호 본능과 염려에서 나오는 배려가 애틋했고, 참 섬세한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충분히 공감했다. 이런 모습은 사실 우리 삶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니까. 부모 자식 간에 ‘필수적인 존재’에서도 그렇듯이, 누군가를 온전히 품어줄 만큼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내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사물이든 사람이든)이 곁에 있길 바라고,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 문장 안에도 사람을 여러 방향으로 들여다보는 시선이 담겨 있어서인지, 다시 곱씹게 되는 문장들이 많다.<br><br>어느 날, 퐁스는 체면을 생각해서 밥 한 끼 내어주는 유일한 사촌인 법원장 집으로 발길을 서두른다. 오늘은 명분이 그럴싸하다. ‘비루한 식객’쯤으로 여기는 법원장 부인에게 부채를 선물로 건네기 위해서! 겉은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예술을 누리며 자라온 뼛속부터 명문 귀족이 아니었기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부채를 한물간 고물 취급하는 부인에게 퐁스가 눈을 반짝이며 부채의 진가를 조목조목 짚어주는 장면은 마치 &lt;진품명품&gt; 파리 특집을 보는 것 같았다. ㅋㅋ 안타깝게도 이날 퐁스는 쫓겨나다시피 밖으로 내몰린다. 사람들의 냉소적인 시선을 그대로 흡수해 버리는 ‘습자지 같은 감성’의 소유자 퐁스의 두 줄기 굵은 눈물에 내 마음마저 미어졌다는... 흑흑.<br><br>치사스러워서라도 안 먹고 말면 되는데, 그에게는 식도락이라는 운명이 너무나 가혹하게 발목을 잡는다. 사람들 눈총을 받으면서도,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코를 찌르는 고급 요리의 냄새를 맡는 순간 이성이 마비되고 마는 이 지독하고도 슬픈 미식가의 본능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만,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공짜 최고급 요리에 목을 매는 그 구차함에는 속이 터진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의 판이 완전히 뒤바뀌는데, 퐁스가 평생 방구석에 모아온 예술품들이 실은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었다는 것! 모든 가치가 돈으로만 환산되던 세상에 이런 빅 이슈가 터졌으니 냄새 맡은 하이에나들의 등장 또한 당연? 게다가 재산이 ‘유산’의 의미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겠지? <br><br>줄거리 자체는 퐁스의 ‘예술품 컬렉션’ 뒤로 각각 다른 종류의 ‘탐욕 컬렉션’이 펼쳐지는 익숙한 설정인데, 인간 내면의 허영심과 위선, 어설픈 우월감, 속물근성 등을 여러 인물의 삶 속에 채워 넣어서인지 마냥 꿀떡꿀떡 읽히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결국 온갖 감정이 쌓이다가, 한낱 먼지인 인간이란 뭐고, 산다는 게 대체 뭐길래와 같은 허탈감에 마음이 바닥으로 툭 내려앉고야 말았다. <br><br>입에 자물쇠라도 채우고 싶은 분노 유발자가 꽤 많이 나오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나 역시 여러 가능성이 내 눈앞에 놓였을 때 결국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아 보이는 쪽, 더 유리한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때로는 그런 기대가 썩 떳떳하지 않은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다양한 환경에 따른 고유한 차이들이 있겠지만, 같은 결과들이 되풀이 된다. (p.150)”는 문장이 내 마음 귀퉁이 한 부분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백번 천번 양보해서 인간의 보편성으로 들여다보려다가 결국 내 안의 속물성을 발견한 꼴. <br><br>책을 덮고 나서도 마음 한구석 깊게 맴도는 건, 퐁스와 슈뮈크의 관계에서 본 결핍과 사랑(우정)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예술품을 수집하는 데 평생을 바친 퐁스, 그리고 정서적으로 온전히 발붙일 곳 없던 세상에서 오직 퐁스라는 인간의 마음 하나만을 수집하고 간직하며 그것에 자신의 온 영혼을 바친 슈뮈크. 두 사람은 결핍을 충족시키는 방법뿐 아니라 자신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을 지키는 방식 또한 달랐다. ‘계속 잘 먹고 살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잘 차려진 밥상을 포기할 수 없었던 퐁스였고, 또 그런 친구를 위해 매일 별미를 준비한 슈뮈크였다. 하지만 발자크는 세속적인 세상과 대비되는 이들의 우정만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복의 원천이 도리어 슬픔의 원인이 되는 모순적인 과정까지 담아 가슴을 훑어놓는다. “사람은 어떤 종류든 만족을 느끼며 살아야 진정으로 존재한다(p. 23)”는 전제하에. 더욱이 그 수많은 등장인물 중에서도 하필 가장 연약하고 선한 두 사람을 통해서 말이다.<br><br>처음엔 이 소설이 탐욕을 다룬 이야기 위주일 것 같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줄거리 이면에 얽힌 시선들이 워낙 복합적이라 퐁스와 슈뮈크,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감상 위주로 채워봤다. 그런데도 말이 길어졌다. 겨우 이 소설 한 권 읽어보고 다 알 순 없겠지만, 발자크가 인간도 세상도 그리 믿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평생을 거대한 ‘인간 희극’에 바친 걸 보면,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인간을.<br><br>“집구석에서 몇 명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내 야심의 전부였건만! 모두에게 인생은 쓴잔과 같지.” (p. 308)]]></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4790/27/cover150/s49213987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7902745</link></image></item><item><author>곰돌이</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염소의 축제 2 (무선) - [염소의 축제 2 (무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10404</link><pubDate>Mon, 01 Jun 2026 00:2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8014177/1731040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1308X&TPaperId=1731040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27/59/coveroff/895461308x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1308X&TPaperId=1731040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염소의 축제 2 (무선)</a><br/>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br/></td></tr></table><br/>35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한때 라파엘 트루히요 독재 정권의 핵심 권력자였으나 이제는 모든 것을 잃고 병든 채 누워 있는 아버지 아구스틴 카브랄을 내려다보는 우라니아. 얼어붙은 눈동자가 마주한 것은 단지 병든 노인이 아니다. 그 시선 끝에서, 35년 전 인간의 영혼까지 길들였던 권력의 기억이 되살아난다.<br><br>거대한 서커스장. 사람들의 등에 보이지 않는 줄을 꽂아 조종하는 인형술사로서의 트루히요. 그 무대 위에서 가장 비참한 줄인형들은 역설적으로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장관과 관료들, 우라니아의 아버지인 아구스틴 카브랄 같은 인물들이다. 트루히요라는 줄잡이가 줄을 조금만 팽팽하게 당겨도 공포에 질리고, 다시 느슨하게 풀어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탐욕스럽게 춤을 춘다. 줄이 끊어지는 공포보다 줄에 매달려 사는 굴욕을 견디는 것이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아니, 뻔히 알면서도 끝내 ‘염소’의 변덕스러운 손가락 끝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 세계에서 트루히요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언론과 수치심이다. 그는 사람을 무너뜨린 뒤 다시 손을 내민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욕받았다는 사실보다,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무엇보다 치가 떨리는 건, 트루히요가 쥔 줄이 인간의 가장 내밀한 영역인 ‘가족’과 ‘성(性)’에까지 꽂혀 있다는 점이다. 부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그들의 아내나 딸을 요구하고, 부하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이들을 제물로 바친다. <br><br>한편, 우라니아는 자신의 애칭인 ‘우라니타’라고 불러주는 유일한 친척인 고모를 만나게 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견뎌온 이들의 대화는 같은 언어에 닿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상대의 상처 주변만 맴돈다. <br><br>“그 일이 내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br><br>“우라니타, 적어도 네게는 전화위복이 되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넌 지금 위치에 있지 못했을 거야. 반면에 우리에게는 재앙이 되었지.” (p. 19)<br><br>트루히요가 친 그물에서 빠져나간 자와 남겨진 자의 대화는, 서로 악의가 있어서라기보다 지나온 삶이 너무 달라서 어딘가 계속 서글프게 어긋난다. 14살 때 도미니카 공화국을 떠나 미국에서 번듯한 엘리트로 성공했으나 자신의 가장 깊은 아픔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우라니아와, 반대로 정권의 찌꺼기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눈에 보이는 사회적, 경제적 고초만 이야기하는 고모. <br><br>그래, 이제는 말해야만 한다 우라니아. 오래 침묵했던 이유를, 그리고 침묵으로밖에 버틸 수 없었던 시간들을. <br><br>그러나 혹시라도 그 고백이 치유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붕괴로 이어지면 어쩌나 우려스러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숨죽여 들여다봐야 했다. 나에게 우라니아는 과거를 회상하는 인물이라기보다, 현재 속으로 걸어 들어온 과거 그 자체였다. 악몽 같은 시간을 어떻게든 지우고 잊어보려 일과 공부, 그리고 책을 붙잡고 단 한 순간도 ‘생각’에 빠질 틈을 주지 않으려 했던 우라니아의 날들. 그렇게 시간은 멈춘 듯이 흘렀다. <br><br>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다. 우라니아는 컵을 들지만, 텅 비어 있다. (p. 364)<br><br>이처럼 철저히 외면해 온 우라니아의 과거는, 35년 전 독재자의 숨통을 끊으려 했던 이들의 역사와 맞물리는 순간 더 이상 개인의 비극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1권에서 암살단이 독재자를 향한 거사를 앞두고 차 안에서 과거를 되짚는 사이 정권의 악행들이 조각처럼 흘러나왔다면, 2권은 트루히요의 내부 집무실과 핵심 관료들의 시선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야말로 ‘트루히요의 긴 팔’이 조종하는 추악한 실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br>아직 정권이 무너지지 않아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타들어 가는 공포 속에서, 암살자들의 이름이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한 명씩 호명되는 장면을 읽는 동안, 이들에게 씌워진 대역죄인이자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은 내 안에서 거꾸로 읽히고 있었다. 만만한 제물에 책임을 씌우고 본보기로 처벌하면서, 그 안에서 국민에게 어떤 교훈을 남기려는 독재자들의 모습은 어딜 가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br><br>제아무리 날조와 수치심으로 인간을 지배하던 트루히요라 할지라도, 국민의 영혼을 쥐고 있는 교회와의 불화와 미국의 냉혹한 외면 앞에서는 무력했다. ‘신과 트루히요’라는 기만적인 축제가 끝나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서커스장의 천막도 걷힌다. 다 드러난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다. 이제 무대 뒤조차도 권력이 작동하는 또 하나의 무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독재라는 건 거대한 폭력인 동시에, 각자 살아남기 위해 택했던 비겁함이 얽혀서 지탱해 온 시간이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끔찍했던 것은 사람이 망가지는 순간보다, 망가진 자기 모습을 끝내 견디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비린내 나는 피와 달콤한 향수가 뒤섞인 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을 지켜보는 것은 지옥을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인간이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보다 역할 속에서 살아가도록 길들여진 세계를, 달리 말할 방법이 없다. <br><br>어떤 시간은 끝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한 사람의 전부가 되지는 못한다. 우라니아는 지옥 같은 세계가 씌운 역할로부터 멀어지고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채 잊으려고 애썼던 세월이 너무나 길었다. 상처는 우라니아가 지나온 시간의 일부일 수는 있어도, 우라니아의 이름일 수는 없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27/59/cover150/895461308x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275955</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