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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만든 집 14채
김성장 지음 / 창비교육 / 2018년 9월
평점 :
작가는 시인의 생가나 문학관을 '시로 만든 집'이라고 명했다. 이 중에 몇 군데는 방문을 해본 곳이기도 하다. 물론 내가 문학관을 읽어 내는 수준이야 건성건성 시를 읽으며 돌아다니고, 시인의 생애를 대충 읽은 것으로 다 보았다고 하는 딱 그쯤이다. 그날의 날씨나 분위기 오히려 그런 것들을 더 많이 새겨둔다. 이렇게 나의 문학관 기행은 그저 일상적인 여행의 일부일 뿐이다. 그곳에 있는 시인의 시를 깊이 들여다보기 보다는 주변의 풍경과 건축물의 모양 같은 것에 더 시선을 둔다. 같이 간 사람들의 행동과 내 모순이 섞인 마음이 혼합되어 시인에 대해서는 그냥 이름만 기억하는 정도로 스쳐갔다. 이런 문학관 기행문을 읽는 것으로 시와 시인을 이해하게 되었다.
처음 나오는 곳이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편은 어쩐지 시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는 것 같다. 책의 첫 머리라서 그런지 차분하긴 한데 왠지 썰렁한 느낌이 든다. 문학관의 어둡고 쓸쓸한 분위기와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의 안타까운 생애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 같다. 괜히 나까지 쓸쓸해지려고 한다. 이미 윤동주는 소녀 시절에 그의 시집을 읽으며 괜히 좋아했고, <동주> 라는 영화도 보았다. 익히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호기심이 덜했다. 나 혼자 친한 것 같은데 상대방은 멀리서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김수영은 교과서에서 시를 배운 적이 없다. 시인에 대해서 이름이라도 알게 된 것은 방송대 다닐 때였을 것이다. 문학관 기행이라기보다는 시인의 생애와 시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더 많다. 그의 생애는 고달프고 그의 시는 낯설다. 잘 알려진 「풀」이나 '작은 일에만 분개한다'고 한 시를 읽어보기는 했지만 아는 시는 겨우 그 두 편에 그치니 모른다고 하는 편이 맞다. 낯선 김수영 시인의 문학과 생애를 이렇게 가볍게 손 안에 들고 읽을 수 있다니. 이 책의 작가를 '문학관을 읽어주는 시인' 쯤으로 명명하면 어떨까?
고등학교 처음 들어가서 배운 시가 이육사의 「광야」이다. 시험을 보기 위해 시를 외우고 본명을 외우고 낱낱이 해부한 시 낱말의 의미를 외웠다. 문학관은 닫혔고 그의 무덤 앞에서 문학관 기행의 글이 이어진다. 고향에 있는 무덤과 시인의 생애는 공간적으로 다르다. 글은 시인의 고단한 생애를 돌아보는 것으로 흘러간다. 문학관은 없고 그의 생애와 무덤만 있다. 이육사의 생애와 시가 분리된다. 독립운동을 한 그를 두고 시와 총을 동시에 품었다고 했는데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순간에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어느 책에서 그의 시가 문학성이 부족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나는 시의 문학성을 잘 모른다. 문학성이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차이를 읽어 낼 수 없으니 그저 「청포도」 같은 말랑말랑한 시를 쓴 시인이 무장 독립운동을 한 행동가였다는 것에 놀랄 따름이다.
유치환 문학관은 나도 가본 적이 있다. 그의 시는 너무도 유명한 「깃발」에서부터 사랑을 하면 괜히 감정이입이 되어 읊조리게 되는 「행복」이라는 시도 있다. 유치환 편에 작가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글이 있다. 이 책에 대한 전체 설명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여행을 통해서 얻는 즐거움은 여러 가지이다. 그중 문학관에서 한 시인의 삶을 더듬어보고 그가 남긴 시편들 가운데 선별된 몇몇 작품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은 그야말로 문학관 기행만이 가진 특별함이다.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다. 위의 글이면 이 책에 대한 설명을 다 해준 것이라고 본다. 청마 문학관을 한 문장으로 표시했는데 "바다와 섬과 도시의 모습이 한 뼘으로 눈에 들어오는 곳은 청마문학관 뿐이다" 라고 했다. 이렇게 간결하게 문학관을 읽어 내는 눈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 것일까? 글을 읽는 맛도 있고 재미도 있다. 더구나 같은 곳을 방문했다는 공통점까지 더해져 괜한 친근함까지 생긴다. 시인에 대한 평가는 내가 할 일이 아니니 그것은 논외로 한다. 유치환 편에 오면 글은 술술 잘 읽히고 생기발랄하고 그림자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를 여행할 때 장소에 따라 생각이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한 것은 상당 부분 날씨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동엽 문학관 편에서 '역사가 흐르듯이 강이 흐른다' 는 문장이 나온다. 이편에 이르러서는 사색이 더욱 깊어진다. 단어와 단어가 절묘하게 결합하여 읽는 맛을 더해준다. 시에 대한 설명이나 시비를 읽는 작가의 눈길을 그대로 따라가며 시를 읽는다. 비단을 두른 금강가에서 시 「금강」을 읊는다. 시인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시를 읽는 분위기는 그대로 전달된다. 신동엽 문학관에는 김형수 시인이 사무국장을 하며 관리를 하고 있다니 특이한 경우다. 모든 문학관이 그랬으면 좋겠다.
강원도 인제. 「목마와 숙녀」라는 시로 널리 알려진 박인환 시인. "내리 사흘 동안 술을 퍼마시다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고 하니 요즘 같은 사회에서라면 부적응자로 낙인이 찍혔을 일이다. 박인환을 두고 작가는 "설악산 어디쯤에선가 흘러온 듯한 머나먼 고독과 겨울 산천의 음삼함과 쓸쓸함"이 있다고 표현을 했다. 실제 그의 문학관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했으니, 먹고 살만하면서 여기저기 생겨난 문학관의 정체성이 실종되었다는 뜻일까?
김삿갓 문학관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강원도 영월군은 회동면을 김삿갓면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거야말로 가난했던 시인을 상업주의에 이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랑으로 산 김삿갓을 영월에 가두어 놓았다고 보아야 할까? 그의 시시비비에 대한 시를 읽으니 슬그머니 이해가 되기도 한다. 옳고 그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살면서 보아오지 않았던가. 여기서 나를 또 한 번 감정이입하게 한 문장을 적어 본다.
방랑은 오직 걸어서만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수 있는 시대의 여행이다. 정처 없음의 사상이고, 직립과 보행의 힘이 이룩한 여행 양식이다. 자동차로는 방황을 할 수 있어도 방랑은 할 수 없다. 걷는 자만이 몸과 풍경의 섞임을 경험할 수 있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는 작가는 방랑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방랑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은 안주하고 싶어 하는 동물이니까? 작가의 생각은 이렇게 기발하고 깊이가 있다. 그 시선을 뒤따라가는 나도 글의 매력에 점점 빠져든다.
안성에는 유명한 두 분의 시인이 있다. 조병화, 박두진. 유일하게 살아 있을 때 문학관을 지었다는 조병화. 이분 책은 쉽게 읽힌다. 한참을 적어 내려가야 하는 이력이라니 바쁘게도 살았다. 세상의 명예를 다 성취한 이분은 무엇이 부족하여 시를 썼는가. 100여권의 책을 냈다고 하니 참 부지런도 하다. 자신의 문학상까지 제정했다고 한다. 사후의 일까지 모두 해 치우고 가신 분이다. 이분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가볍다.
시도 글씨도 그림도 강렬한 무엇이 없다.
죽은 뒤에 뒷사람들이 하는 일을 조병화는 모두 직접하고 죽었다.
그의 삶에는 부족과 결핍과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
부지런한 사람은 고독할 시간도 없을 듯한데 그는 부지런함과 고독의 거리를 오가며 그 많은 저서와 행사와 그림과 여행과 뒷정리까지 세상의 숱한 일에 관여했다.
안성의 두 번째 시인 박두진. 시인의 사진을 이렇게 설명한다.
까칠한 지식인의 상징적 표정 같다.
그의 사진은 서사시이다.
웃는 사진도 있는데 왠지 어색하다.
박두진 문학관이 없다는 것이 의아하다고 했다. 안성시에서 2018년 박두진 문학관을 개관할 예정이라고 한다. 지금쯤은 개관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짧은 글 한 편에서 시인의 성품을 읽고 시를 읽고 고향을 읽는다. 문학관이 없는 것은 시인의 성품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와 시인이 잘 맞아 떨어지는 분이라는 생각이다. 문학관이 생긴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신석정을 두고 작가는 서울을 삶의 터전으로 잡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신과 동일하다고 했다. 목가, 전원, 강호 비슷한 말이면서 조금씩은 다른 뜻이 있다고 했다. 신석정 문학관의 위치를 두고는 건물이 어수선하고, 찻길이 가까이 있어 소음 때문에 마음이 푸석해지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신석정 편에서 작가는 아주 조금 신상을 털어 놓는다. 서울에서 잠시 머물렀던 일, 뒤늦게 공부를 하게 된 사연, 다시 지방에서 살게 된 내력 등을 살짝 드러낸다.
신석정을 “우리 문학사에서 몇 안 되는 자기정신을 지킨 시인” 이라고 평가했다. 지식을 한 가지 얻었다. 민(民)은 눈(目)에 바늘을 꽂은 형상, 즉 눈 먼 듯이 복종하는 노예 신분을 뜻했다고 한다. 대체로 어감 상 '민'자가 들어가면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데 저렇게 험한 말이라니 몰랐던 부분이다. 신석정 시인을 "현실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높은 산과 흐르는 물에 뜻을 둔 채 살다간 시인" 이라고 했다. 대체로 평가는 후세 사람들이 하지만 그것도 시대에 따라 다르니 무엇을 옳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른다.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서정주의 고향, 전북 고창. 그의 시 「선운사 동구」에 대한 설명은 이야기처럼 재미있다. 골째기, 안했고, 상기도 등등. 꼭 그 단어여야 사는 시의 맛을 잘 설명했다. 고개가 끄덕여 진다. 살아있는 시인의 시비를 세운 것으로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시비는 위치와 모양이 잘못되었다고 해석했다. 폐교를 문학관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거야 말로 문학관의 좋은 예가 아닌가 싶다. 서정주를 찬양하는 글을 보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작가. 미당문학관이 찬양받아야 할 덕목은 친일시를 전시했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시빗거리를 공공연히 전시한 문학관은 오직 미당 시 문학관 뿐이다."
미당문학상에 대한 평가는 독자에게 넘겼다. 최남선과 이광수의 문학상을 제정하려다 반대에 포기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미당문학상이 없어지지 않는 것을 이렇게 해석했다. "문학에서의 위상, 교수로 있으면서 배출한 제자들, 광범위한 정치적 종교적 인맥, 그리고 그의 시를 흠모하는 숱한 대중들의 힘이 반대의 힘을 압도하고 있는 모양새일거라는 추측 정도" 이제 미당문학상이 폐지되었다고 하니 우리 사회도 많이 성숙해지는 모양이다.
남한에서 유일한 월북자의 문학관. 보은군 회인면에 있다. 오장환은 이곳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여기서 지낸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릴 때 안성으로 이주해서 안성에 있는 박두진과 한 반에 다녔다고 하니 참 신기하다. 이곳은 특히 임선빈 이라는 사람이 관리를 잘 하고 있어서, 생가를 '살아있는 집' 이라고 했다. 작가는 오장환에게 떠돌이의 이미지가 있다고 했다. 그의 시를 많이 접해보지 않는 나는 문학관을 방문했을 때 건성으로 듣고 듬성듬성 시를 읽고 휘리릭 돌아서 나왔던 기억이 있다. 날씨는 추웠고 문학관 앞뜰의 따뜻한 햇볕을 좋아했던 생각이 난다. 월북한 작가인데 북한에서는 그의 이름만 거론하는 정도라고 하니 그것이 사후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안타까운 일이다. 남한에서도 그리 알려진 시인은 아니다. 그 이유를 작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오장환 문학이 이룩한 성취가 특별한 것이기는 하지만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준 작품이 없었다는 것" 오장환에 대한 평가를 "일관되게 인간을 위한 문학을 우선시“ 했고 ”참다운 인간의 시선으로 시대와 사회를 보려했다"고 서술했는데 이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드디어 정지용 문학관이다. 정지용 문학관은 물론 내가 처음 접한 문학관이기도 하다. 정지용에 대한 생애나 시는 옥천에 사는 사람이라면 길을 가다가도 읽고, 공원에서도 본다. 또 시 한 두 편쯤은 가볍게 외우기도 한다. 옥천에는 실제로 '향수'나 '지용'이라는 단어가 함부로 쓰이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거목 시인 정지용의 생가가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니 영광이라고 해도 될까? 그러나 가까울수록 사실은 더 소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정지용에 대한 작가의 안타까움이 글에서 느껴진다. 그를 ‘가여운 시인’이라고 했다. 정지용의 가족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냈다.
마지막은 편은 김남주이다. 김남주 문학관에서 하고 싶은 말은 넘친다. 그의 짧은 생애를 몇 줄의 글로 기록하기엔 아쉬운 점이 있다. 김남주 시인은 다른 작가들의 책에서 여러 번 이름만 들었을 뿐 잘 알지 못했다. 동생네 집에 갔을 때 시집『 조국은 하나다』라는 책이 나란히 두 권 꽂혀 있는 것을 보았어도, 그 시집을 꺼내 읽어보지는 않았다. 작가의 설명을 나름대로 해석하며 시인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할 뿐이다. 작가는 김남주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김남주의 언어는 내 머리에 언어의 혁명을 일으키는 회오리였고 표현의 자유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피 튀는 언어였다.
독재의 심장에 날아드는 화살과도 같았다. 숨죽이며 그 시를 읽는 나 역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시민의 안위를 걱정해야 했다.
무려 열네 명의 작가와 문학관을 만났다. 발로 하는 여행이라기보다는 글로 하는 여행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공간에 대한 설명보다 시간과 역사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공간에 대한 설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의 글이 우선이고 역사 속에서 시인이 어떻게 반응하고 살아 왔는지를 해설하는데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독자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의 감정을 읽는다. 시인이기도 한 작가의 단어와 문장은 자주 밑줄을 치게 했다. 빠른 속도로 내달리기 좋아하는 내 눈길을 멈추어 세웠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볼 때는 마음대로 밑줄을 치지 못해 답답한 면이 있다. 좋은 책이라고 생각이 되면 두 번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책을 구입하여 마음대로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이 책을 보면 생소한 단어가 몇 번 나온다. 굳이 알기 쉬운 말을 쓰지 않는 작가의 뜻이 아쉽기는 하지만 독자의 수준을 높여준 면에서는 매우 긍정적이다. '견결하다' '새록하다' '아카이브' '아방가르드' 등은 읽는 것을 멈추고 찾아보아야 했다. 적절히 본문에 넣은 시 감상도 하고, 서로 다른 모양의 글씨체로 쓴 시를 눈으로 보기도 했다. 서예를 하고 시를 쓰는 분이라 그런지 글씨에 대한 해석이 상식의 수준을 넘는다. 언어를 가지고 노는 솜씨가 놀랍다. 단어와 문장을 마구 가지고 논다고 하면 불경스럽게 들릴까? 이 책에 실린 시인에 대해서는 따로 어떤 선별기준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반복하지만 솔직히 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평생학습원 인문학 강좌시간에 강의를 하는 교수님은 시를 읽을 때 어느 부분에서 전율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전율은커녕 뜻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시와 시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주제도 못된다. 이런 책을 보며 겉모양이나 이해하고 마는 것이다. 앞으로 계속 문학관 기행이 나온다면 내 시에 대한 앎의 세계가 조금 넓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에 대한 열망으로 들끓고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처럼 배가 부르도록 먹어야만 하는 자본의 속성 앞에 나는 무기력한 하나의 작은 인간일 뿐이다. 책을 읽으며 시인과 시는 언제까지 이 세상에 유효할까 생각해본다. 그 해답은 역시 책에서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