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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다운 예배 - 그대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
김효남 지음 / 다함(도서출판) / 2022년 7월
평점 :
왜 태어났니?
이 노래를 모르는 분들이 있을까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민섭 작곡)이라는 곡 말입니다. 아마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가릴 것 없이 다 아는 축복송일 텐데요. 심지어 노래방에도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 곡의 가사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곧 존재하는 이유를 두고 사랑받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 생일파티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같은 반이긴 하지만 그리 친하지 않은 친구들이 저를 보더니 어제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다면서 일방적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생일축하노래를 개사한 소위 생일비하송이었죠.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너같은 OO가 왜 태어났니~”
이 가사는 당신의 숭고한 탄생 비화 혹은 존재 이유를 묻는 철학적 호기심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가사의 뉘앙스에서 직감하셨듯이 오히려 상대의 약점을 비웃는 조소와 조롱의 의미에 가깝지요. 당시 저는 매우 화가 나서 그 친구들과 꽤 심하게 다퉜던 기억이 납니다. 흥미로운 건, 성인이 되고 난 후 내 자신에게 이따금씩 물었던 질문이 ‘나는 왜 태어났을까?’입니다. 가난한 가정 환경,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시련과 상처들, 새로울 것 없이 연일 반복되는 지루하고 비루한 일상들까지. 당신은 왜 태어났나요? 삶이 힘겨운데 왜 그토록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나요? 그리고 기왕 살기로 결심했다면 잘 살아야 할텐데, 어떤 삶이 잘 사는 삶일까요? ‘태어났으니까 산다.’, ‘먹고 살기 위해 산다.’로 만족되시나요?
이 책은 온통 세속적인 염려로 가득한 우리의 고민과 시선을 ‘예배’로 집중시킵니다. 책 제목대로 ‘예배다운 예배’를 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지요. “흠 예배 빠지지 말고 주일성수나 잘하라는 말인가 보군”하며 콧방귀 뀌고 뒤돌아서려 할 때, 부제에 시선이 머뭅니다. “그대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 제목과 부제의 장르적 부조화를 느끼지만 호기심을 갖고 책을 펼칩니다. ‘시작하는 말’의 첫 문장에서 이 책을 봐야만 하는 이유를 찾게 됩니다.
“여러분은 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여러분이 꼭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9쪽)
책 제목이 ‘예배다운 예배’인 이유는 성경적 차원에서 참되고 합당한 예배다움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예배답지 않은 예배’ 즉 거짓된 예배를 바로잡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교수이자 목회자인 저자는 개혁주의 신학의 조명 아래 성경적인 해석에 근거하여 13챕터에 걸쳐 참된 예배의 본질과 소명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밑줄을 긋고 생각케 하는 문장이 여럿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중심으로 나누어 볼까 합니다.
첫째, 인간의 ‘수치심’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진정으로 예배하지 못하는 이유는 수치심 때문이며, 수치심은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뿌리(49쪽)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수치심을 깊이 연구한 미국의 기독교인 정신과 의사인 커트 톰슨는 자신의 책에서 ‘수치심에 물들지 않은 영혼은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수치심의 오랜 역사는 현대에 들어와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듯 합니다. 더 많은 자본과 경험을 획득하는 것이 행복의 첩경이라 일컫는 자본주의 시대는 비교우위의 무한경쟁 시스템을 통해 수치심의 사회를 구축했지요. 인류의 수치심은 마치 혈액 속에 흐르는 DNA와 같아서 하나님이 주신 가죽옷 외엔 가릴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벌거벗은 채로 친히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참된 예배에서 ‘자기부인’의 고백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입니다.
둘째,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흩어져 드리는 삶의 예배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60쪽) 주일예배의 예전 방식과 식순은 교회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사도신경, 기도, 찬송, 성경봉독, 설교, 헌금, 축도(혹은 주기도문) 등을 시행합니다. 그동안 저는 예배 순서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모여서 드리는 예배의 각 식순은 개교회가 따르는 전통과 형식을 넘어서 삶의 예배의 원리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60쪽) 이 식순은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생각하고, 묵상하고, 나아가 실천해야 할 일들인 것입니다.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하루 한 시간의 예배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나머지 6일의 삶을 규정합니다. 바꿔 말하면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만홀히 한다는 것은 나머지 6일의 삶 또한 만홀해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의 공통점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맺기를 중단하고, 자기 자신을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본질적으로 결국 사탄을 예배는 것(36쪽)이라고 일갈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예배냐 오프라인 예배냐 사이에서 터져나온 갑론을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예배의 장소가 아닌 예배의 대상(95쪽)이 누구냐는 것이지요.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삶의 예배를 모두 돌아보면서 우리의 예배 대상이 삼위 하나님인지 진지하게 숙고해 봐야할 것입니다.
셋째, 예배의 본질은 예배의 소명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153쪽) 저자는 8장 이후부터 여러 챕터에 걸쳐 교회를 넘어서 세상 속으로 부르신 예배자의 소명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우리는 교회의 소금과 빛이 아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가정과 직장,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의미할 것입니다. 교회 안과 밖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나요? 숱한 의사결정이 요구되는 교회 밖의 삶에서 교회 안에서의 기준과 다른 자신 혹은 타인을 보게 되나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소명을 점검해 보아야할 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값으로 산 교회는 파편화된 개인주의자들의 무리가 아닙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몸을 이루는 ‘하나의 공동체’로 부르셨지요. 몸된 우리는 머리 되신 그분과의 연합이 절대적입니다. 놀랍게도 완전하신 그분 또한 우리의 존재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세상을 다스리면서 동시에 품어야 합니다. 어둠을 몰아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빛처럼 세상을 다스림과 동시에, 모든 음식의 맛의 조화와 질의 보존을 위하여 존재감 없이 녹아드는 소금처럼 세상을 품는 이중적 정체성의 예배적 소명을 말입니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짐 당한 존재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 우리를 우연히, 이유 없이, 무책임하게 내던지지 않으셨습니다. 창세 전부터 신비 가운데 예정하신 그분의 엄위로운 뜻과 섭리 가운데, 우리를 창조하셨고 예배로 부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삼위일체라는 관계의 충만함 가운데 온전하신 것처럼, 다함없는 삼위일체의 사랑의 관계 안으로, 즉 예배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235쪽) 그렇게 개인으로서 나와, 공동체로서의 교회, 나아가 온 세상과 우주의 창조물까지 그분의 다함없는 사랑으로 채워지고 충만해집니다.
그대는 예배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중략) 그대의 삶을 통해 충만하게 되신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개혁은 소명의 개혁이며, 삶의 개혁이며, 우리의 존재의 개혁입니다. (235쪽)
예배는 단순히 종교활동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서 오는 관계의 풍성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게 된 우리는 비어 있는 이 세상을 그분의 뜻대로 충만케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 창조되었고, 이 땅에 예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진정한 행복과 만족은 참되게 예배하는 예배자의 삶 안에서 실현됩니다.
당신은 왜 태어났나요? 노래 가사처럼 분명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영원토록’ 경험하길 원한다면 그분을 참되게, 그리고 합당하게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공교롭게도 오는 토요일(26일)은 제 생일입니다. 현재 여러가지 개인적인 사유로 ‘어쩌다 가나안 성도’로 지내고 있지만, 이번 주일은 교회에 나가 죄를 고백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쉬고 싶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내가 태어나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 당신을 예배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