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단체나 회사가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면 결과가 이렇다고 한다. 전략 전문가는 제대로 된 전략의 부재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며 입을 떼고, 정보기술 전문가는 IT 시스템의 후진성부터 바꿔야 한다고 진단한다. 인사 전문가는 인사를 개혁해야 미래가 있다고 주장하고, 회계 전문가는 회계 부문이 엉망인 회사가 잘될 리 없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사람은 매사에 자기가 익숙한 관점으로만 접근한다. 이를 ‘망치의 법칙‘ 또는 ‘매슬로의 황금 망치‘라고 부른다. 컨설팅에서는 각자의 전문성에 입각해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한 사람을 상대할 때는 그렇지가 않다.
내가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심하게 겪었을 때도 그랬다. 돈이 행불행을 가른다고 믿는 사람은 당시 바듯한 내 형편이 원인일 거라고 말했고, 평소 건강을 신조로 삼던 지인은 운동을 권하면서 햇볕을 쬐면 상태가 좋아질 거라고 덧붙였다. 당시엔 밖에 나갈 의지도 의욕도 없어서 아무 소용 없는 조언이었다. 관계로 모든 문제를 푸는 친구는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단정했다. 믿었던 이들에게 당한 배신이 우울증을 촉발한 건 사실이지만 근본 원인은 아니었다. 믿음이 독실한 분은 "하나님이 나중에 크게 쓰시려고 시련을 준다"고 했다. 순간 그의 멱살을 잡고는 누가 크게 쓰임받고 싶다고 했냐고, 당신이나 실컷 쓰임받으라고, 쓰임 같은 거 안 받아도 되니 애초에 이런 고통은 없어야 하는 거라며 악을 썼다(라고 쓰고 속으로만 그랬다).
다들 도움이 되길 바라며 한 말이겠지만 먼저 내 말을 들어줬으면 했다. 아니, 입을 열 기력도 없는 내 곁에 말없이 있어 줬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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