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렘 - 과학의 뒷골목
해리 콜린스.트레버 핀치 지음, 이충형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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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의학을 전공한 나에게 ‘과학’이라는 이름은 항상 압박의 대상이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한약분쟁이 생겼는데, 약사들이 한약을 조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의 근거도 한약의 과학화는 한의사가 아닌 약사가 해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공보의를 할 때, 어떤 의과 선생은 한의사는 무당과 다름 없고, 논문의 근거도 없는 진료 행위를 하는 살인마라고 비난했었다. 너무나 억울했지만 뭐라 대답도 못하고 분을 삭혔던 기억이 난다. 과학은 그렇게 한의사인 나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그런 압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은 대학원에서 수많은 실험에 참여할 때부터 였다. 나를 비난했던 그 의사 선생이 과학의 기초라 했던 논문의 영역에 직접 들어가보고, 수년간 밤을 새워가며 이런저런 실험들을 하게 되면서, 기초 논문이 얼마나 허약한 근거에서 작성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면역학, 신경학, 비만 등등 왠만한 실험에는 다 참가했던 것 같다) 실험자의 오류, 동물 모델의 오류, 해석의 오류 등등… 과학은 생각보다 정밀하거나 엄밀하지 않았다. 수많은 우연들 속에서 얻은 데이터를 임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았고, 재현되지 않더라도 내가 예상했던 데이타가 나오면 실험을 종결하고 논문으로 작성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세포 실험을 넘어서는 동물 실험에서 이런 경향은 두드러졌는데, 이는 현대의 과학도 여러 변수를 통제하는데 유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험실의 현실은 이상적인 이론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경우가 많았다.
두번째 해방은 과학철학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였다. 기존의 과학이 어떤 역사를 통해 발전해왔는지를 고찰하면서, 우리가 흔히 생각했던 과학의 객관성은 사실상 신화에 가깝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나에게 토마스 쿤은 일종의 해방자였던 것 같다. 패러다임 이론을 공부하면서, 내가 전공한 한의학도 과학의 한 종류이며, 게다가 열등하게 취급될 이유가 없다는 점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또 패러다임에 대한 다원적 인식과 적용이 도리어 정상 과학에 매몰된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풍부하게 현상을 이해하고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마이너로서 한의학을 전공하며 가졌던 수많은 어려움들이 도리어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준 것이다.
골렘이라는 책의 부제는 과학의 뒷골목이다. 과학의 역사 속에서 실험과 증명 과정이 생각보다 객관적이지 않았고, 오류를 무시하거나, 데이타를 선별적으로 취해 해석하는 등의 과정이 많았음을 폭로하는 내용이다. 실험이라는 것이 과학적 논쟁에 결정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함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정치적인 입장, 심리적 입장에 의해 과학적 사실을 결정되기도 한다는게다. 실험자의 오류 뿐만 아니라, 과학의 구조 자체에서도 오류가 발생하며, 때로는 순환논리에 빠지는 것이 현재의 과학의 한계임도 밝힌다. 때로는 이론을 증명하는 방법이 그 이론의 지배를 받는 구조, 실험의 과정을 통해 숙련이 개입되는 부분, 방법론에 대한 끝없는 불신으로 이어가는 상황을 설명하며, 과학 내에서도 상당 부분 권위와 여론, 믿음과 신뢰 등의 비객관적 요소들이 개입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들이 특히 강조하는 것이 인간의 오류인데, 과학의 과정 속에 인간이 저지르는 오류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어떤 활동도 결국은 오류가 들어간다는 의미에서다. 과학도 예외일 수가 없다.
필자들이 과학에 대해 요구하는 것, 혹은 과학을 대하는 대중이나, 과학을 하는 과학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하다. 과학에 과도한 의미의 신화적 권위를 부여하지 말고, 과학을 하나의 전문가적 과정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들은 과학 자체를 비판하면서, 지나친 반과학주의로 가는 것도, 과학을 찬양하면서 낙관적 과학만능주의로 가는 것도 다 지양해야 할 태도라 본다. 그래서 과학도 객관적이라기 보다는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전문 영역이라는 부분을 인정하면서 약간의 거리를 두는 태도가 생길 때, 과학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사라지고, 골렘으로서의 과학, 즉 인간이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과학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말이다. (골렘은 유대인들의 신화에 나오는 진흙인형이다. 지능이 낮아서 적절하게 통제하면 유용한 존재지만, 폭주하면 파괴적일 수 있다)

언젠가 한의학도 좀 더 현대과학의 패러다임 안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현대 과학을 통해야만 한의학이 보편적 의학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주류 패러다임 안에서 존재할 때 학문이 생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런 과정이 필요한 것은 한의학이 현대 과학과의 접점을 늘려갈수록 학문적 보편성은 확장, 발전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절대적 보편성이 아닌, 실용적 차원에서의 보편성의 획득을 의미한다. 음양 오행과 고대 역학의 용어와 개념으로는 더 이상 환자들을 설득하기가 힘든 현실이 현대과학에 대한 수용압으로 작용할 것이고, 실제로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두려워하거나 주눅들 필요는 없다고 본다. 과학은 골렘이고, 골렘은 사용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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