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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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시작점

- 가볍게, 취향에서부터 시작해본다. <휴먼 스테인>의 세계가 유난히 견디기 힘들다면, 취향이 다음과 같을 수도 있다.

투명한, 선악이 분명한, 우리편과 적의 경계가 분명한, 0이거나 1이거나 어느 쪽인지 분명한 디지털 신호처럼 경계선이 명확한 세계가 역시 좋다거나,
이중의 태도, 모호한 대답, 애매한 상황이란 것은 도무지 못마땅하다거나.

하나 더, 습관에서 이야기해본다. '콜먼 실크'가 처한 상황에서 부메랑처럼 날아드는 어떤 느낌에 모골이 조금 송연해졌다면, 습관을 되짚어 본다.
성공 가두를 달리는 유명인은 언제나 '뒤가 구릴 것'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는지,
그 구린내가 날 것 같은 지점, 단서를 밝히고자 하는 데서 약간의 희열이라도 느껴보았었는지,
버릇처럼 "알고보니 쟤 저렇다더라"로 '근데 난 안그렇지'를 말하고 싶은, (이야 말로 '뒤가 조금 구린') 생각의 버릇이 있는지.


- 아니, 그런데, 과연 그 명확한, 야트막한 수심의 수영장처럼 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세상이란 것, 과연 가능한 걸까? 그 야트막한 수영장의 수면도 바람에, 뛰어드는 사람에, 저렇게나 일렁이는데?
게다가 <휴먼 스테인>의 수면은 검은 기름띠가 떠있다. 이방향 저방향에서 볼 때마다 마구 색깔이 뒤바뀌며 일렁거린다. 이 속에서 정말, 투명함을 기대하는가.

취향으로 우월감을 드러내자는 것도, 습관을 캐서 잘못을 가려보자는 것이 아니다.(이런 뜻이라면 이 글이야말로 '뒤가 조금 구린' 것이다.) 저 경계모호한 기름띠가 둘러진, 일렁이는 수면 아래 보이는 것들에서, '알고 보니'의 세계가 섣불리 판단되는지, 다만 그것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운동장에 선 앞에 서서 저편의 적들에게 증오의 불꽃슛을 날려본 경험이 있는지, 경험이 있다면, 대체 그 선은 누가, 언제 그은 것이며, 선이 그어졌다고 슛을 마구 날려도 된다는 의미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되짚어보는 것이다.


경계 - 모호한, 너무나 모호한

- 혼잡한 링 위에서 스파링을 하고 있는 콜먼. 그에게 잽을 날리는 상대는 그가 원래 말하려던 spooks, 즉 유령들 같다. 콜먼의 말을 조금 변형시켜볼 수 있다. "이 적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없나요? 이 적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아니면 유령들(spooks)인가요?"

검둥이, 라는 단어의 애매한 경계에서 검둥이 사이에선 '백합처럼 흰', 백인 사이에선 수상한 빛깔의 피부색. 애매한 정체성, 경계에 선 사람은, 각기의 욕망이 부딪칠 때, 욕망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선밖으로 밀어내기도, 내 편으로 끌어당기기도 좋은 표적이 된다. 콜먼은 일 대 일의, 상대의 패턴을 읽고 상대하는 것에는 능통하다. 그러나 상대는 유령처럼 에워싼다. 그에게 날아든 편지의 말처럼, '모두가 알고 있다'라면 특히나 더욱.
그런데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이 한낱 악의넘치는 오해에 불과하다면, 콜먼은 결코 그 오해를 풀지 못한다. 아무도 '모두'와  말할 수는 없으니까. 칠흑같이 어두운 링위에서 상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섀도우복싱 만을 할 수 있을 따름이다.

-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 전까지는 함구할 것. 콜먼이 검둥이인 것을 감추는 것은 그것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 잠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묻기 전에 일부러 말하지 않고 "경계를 감출 것".
청년 시절 내내 '검둥이'라는 단어의 가장자리에 있으면서, 그 선을 흐리게 하고, 일부러 지우고, 결코 말하지 않고 모호한 대로 두며 견뎌온 그에게 다시 유령처럼 쏟아진 인종차별의 단어로서의 '검둥이spooks'라니. 이 예민한 단어를 마주하고, 콜먼과 욕망으로 엮인 사람들은 그를 선밖으로 툭, 밀어버린다.


변치 않는 아름다움, 스테인레스의 세계 ?

- 콜먼의 섀도우복싱, 그러니까 전방위에서 날아드는 숱한 공격들, 그의 뒤엔 '뭔가 구린' 그것이 있다며 들춰보는 사람들, 심지어 그의 도덕성에 분개하는 사람들에 대항하는 <편치 받아 넘기기>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조금만 솔직해보면, 삶이란 것이 얼룩이 전혀 가지 않는 반짝반짝한 스테인레스의 세계이길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꿈이 아닐지. 매력적이게도 콜먼은 얼룩을 적극적으로 만든다. 오해와 누명의 덫에 사로잡혀 미라처럼 굳어가는 것이 아니라, 젊은 애인 포니아를 욕망하며, 자식들에게 항변해가며, 애인의 전남편을 경계해가며, 여전히 욕망하는 쪽을 택한다.

- 흥미로운 지점은 삶이 얼룩덜룩해지는 것에 개의치 않는 콜먼이거나, 단 한 순간도 얼룩을 가실 일이 없었던 불운의 포니아나, 인생의 한 지점에 생겨버린 전쟁의 흔적에 빨려들어가버린 팔리나,
콜먼의 욕망을 저주하면서 동시에 콜먼을 욕망하고 있던 델핀 루이거나. 스테인레스는 단지 미망일 뿐. 파장을 일으키고 파장을 받으며 나의 얼룩과 너의 얼룩이 교집합을 이룬다. 여기서 너와 나의, 잘못이 없는 아군과 잘못이 있는 적군을 구별하는 선은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

- 콜먼이 여전히 총기가 넘치며 노인네다운 지혜를 보여주는 점은, 그 일렁이는 수면 아래서 익사해버리지 않고 늘상 무엇인가를, 선택해가는 면이다. 스테인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로. 스테인레스를 욕망하지 않은 채로.

- 지워야 할 얼룩인지, 그대로 두어도 좋을 삶의 무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솔직하게 말해, 나의 몫은 아닌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때, 의도하지 않은 채로 링 위에 세워졌을 때, 다만 흐름에 부유할 것인가, 다만 두드려 맞고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섀도우 복싱을 멈추지 않는 데에는 어떤 겸허함, 우연을 받아들이는 혜안, 노인의 맷집이 있다.
자신의 욕망을 '모두'라는 말 뒤에 숨겨버리는 델핀 루의 약삭빠름을 눈여겨 볼 것인지, 아니면 겸허히 우연을 받아들이고 우연의 무늬를 새겨갈 것인지는, 그래도 선택할 수 있는 '나의 몫'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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