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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대한민국, 유시민을 말하다 - 함께사는 세상을 꿈꾸는 이 사람
박찬석 외 지음 / 미디어줌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그냥 막연한 느낌이었다. 노무현에게서 보았던 바보스런 고집이 느껴지는... 노통 사후의 정신적 공황과 정치적 허무함에 대한 탈출구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에 대해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연구자료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
전반적으로 책 자체의 질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 사실적인 해석이다. 그를 믿고 지지하는 전문가들(주로 예술계통 교수)과 일반인들(인터넷 활동가)의 인물비평과 인물연대기, 유시민 어록을 정리한 정도의 기술수준인데, 가장 반가왔던 것은 명문으로 알려진 '항소이유서'("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매듭말로 유명) 전문의 첨부였다.
서슬퍼렀던 시절에, 권력의 시녀였던 재판정 앞에서(당시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 그것도 삶의 무게가 얼마나 고단한지를 깨닫기도 전인 이십대 청년이 이토록 절절하게 가슴을 후벼파는 통한의 글을 쓸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은 단지 순진한 지식인의 정권 비판만이 아니었다. 양심을 신념으로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용기있는 한 청년이 가슴으로 조국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독일 유학을 마친 그는 학술진흥재단에서 잠시 기획을 했고, 이후 방송 토론활동을 거쳐 정치인, 정무직 공무원의 길을 걸었다.
그에 대한 비판은 "옳은 말도 싸가지 없이 한다"는 말로 잘 표현된다. 그런데 이 문장을 잘 분석해보면 일단, 그가 "올곧은 말을 한다"는 것은 기본전제로 인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기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문제는 "싸가지가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려는 태도와 접근방식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놀라운 것은 이런 비판자들이 여당 내에도 상당히 포진하고 있고, 심지어 민주화의 투사들이라는 386세대들조차 상당부분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국회 등원과정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캐주얼 자켓과 면바지 패션이 왜 쇼맨십으로 공격받았는지를 반추해보자.
나는 오히려 그의 튀는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뭐랄까... 그냥 상식과 정도가 통하는 그런 정상적인 사람(?) 같았다. 우리는 통상 자신이 소속된 조직에 대한 충성행위를 통해 영위를 보호받는 위치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행동도 조직의 요구라는 이유로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곤 한다.
같이 배우기 위해 모인 또래의 학생들도 '선배'가 만든 문화와 관습에 대해서 -설령 그것이 악습이라 할지라도- 별 다른 저항없이 받아들이고, 보통의 회사원들도 직장 '상사'에게 생계형 아부를 남발하곤 한다. 하지만 이렇게 소소하고 평범한 우리네 일상은 그 영향력과 파급범위에 있어서 공공의 장으로 확장되기 어렵다.
우리가 흔히 공인이라고 말하는(실은 정확한 공인의 정의에 부합되지 않는다) 연예인, 그 중에서 개그맨의 예를 들어보자. 개그맨의 실력은 개그의 빵빵터짐(관객호응도를 뜻하는 은어)에 있고, 그 평가 역시 방청객의 냉정한 판단에 의해 이행된다. 만약 개그실력이 없고, 그에 따라 빵빵터짐도 부족한 선배 개그맨이 개그실력이 농후한 후배 개그맨을 질시하여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 겸손한 복종과 알아서 기는 눈치를 요구한다면?
또 다른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공중파 방송에서 연예인들이 자신들의 동료를 향해 "OO선배님", "OOO선생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왜 적절하지 못한가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물론, 아나운서들은 "OOO씨"라고 호칭한다). 연예인과 정치인. 이 둘의 관계와 성격은 어떠할까?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공중파에 자주 노출되는 이 둘은 대중의 사랑과 지지가 곧 존재이유가 되는 사람들이고, 사생활에 대한 구속력이 강하다는 의미에서 공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연예인과 정치인의 공적 영역에 대한 영향력 내지 파급력은 실로 엄청나다 할 수 있다.
여기서 드는 생각 하나, 정치인은 대중(유권자라 해도 좋고 국민이라 해도 좋다)을 의식해야 하는가? 재선/삼선의 선배의원을 먼저 의식해야 하는가? 만약 소속정당과 선배의원들에게 낙인찍힌 한 정치인이 정작 유권자들에게 뜨거운 지지를 받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바로 이 점이 유시민을 주목하게 만든 이유다. 문두에 '그냥 막연한 느낌'이라고 했지만 그는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유권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앞으로 정치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단번에 파악하는 동물적인 정치감각, 정상적인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바른 정의라는 인식의 영민함.
잠시 그의 이력을 지켜보면 개혁국민정당의 포기(아직도 아쉬운 부분이다) 이후 열린우리당의 용맹한 당원으로 활약했고, 무엇보다 가장 주목받았던 것은 보건복지부 장관직의 수행이 아니라(솔직히 말하면, 이대팔 가르마가 어울리지 않는 그의 위치를 잘 말해주었다) 노통 임기말의 정국 대처방법이었다.
모두가 노통을 조롱하고 공격할 때 묵묵하게 곁을 지킨 인간적 의리, 때때로 그를 위해 충실하게 변론했던 정치적 신의, 잘못된 것을 당당하게 시인하되 억울한 공격에는 냉철하게 반응했던, -주류가 보기엔- 바보같은 대응태도가 오히려 인상깊었다고 하면 억지춘향격일까?
하긴, 열린우리당 공천으로 출마하면서도 무엇이 그리 부끄러웠는지 선거포스터 밑자락에 조그맣게 당의 심볼을 새겨넣은 사람들, "그래, 노통이 잘못한게 있다. 잘못된 것은 지금 심판받겠다. 대신 제대로 할테니 다음에는 밀어달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한 사람들, 끝까지 인내하지 않고 당을 떠나버렸던 사람들은 왜 이토록 민심이 돌아서지 않는지를 이해하지 못할테다.
정치도 생물같은 것이라 미묘한 역학관계가 어떻게 작용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 빠른 동학 속에서 과연 유시민이 어떻게 살아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뚜렷하게 분별되는 미립자로 존재하고 있고, 그 어떤 원자의 소용돌이(정치적 화학작용)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