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원짜리 분노
김희정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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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꽤 산문을 많이 써서 모아둬, 책 두세 권 분량의 묶음글은 된다. 그러다보니 어디 서점에라도 가면 쏟아져나온 산문집을 들춰보며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어제들을 재본다. 아마도 그 저자라는 이들이나 나에게는 그 '어제'가 결코 만만한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내 글을 묶어 책으로 내지 않는 것이나, 이러저러한 산문집을 넘겨다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은, 사실 그 '어제'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공유'하고 '소통'하느냐에 대한 '소용'때문이다. 결국, 기억은 곱씹으며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야 할 것, 나아져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등을 열거하기 시작한다. 한데, 서랍 속 일기장과 다른 '산문의 묶음'은 어떤 특별한 다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십 원짜리 분노'라는 제목 자체가 나는 답답하다. '분노'는 결코 싸지 않는 감정이다. '씨팔'이 '십 원짜리'로 대신하자마자 세계는 그저 답답한 관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겨우 자신의 소싯적 추억과 감정의 배설로 동화될 수 없는 자기 골방에 갇혀버리게 된다. 이 책을 마지막 장까지 읽고나서 나는 과연 읽기 전과 얼마나 다른 '변화'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단 말인가.

 

대중이 꼭 초등학교 선생님이나 된 것처럼 별표를 매기려니 영이나 불편하기 그지없다. 끄적끄적 댄 어제에서 작가와 만나지 못한 이들은 결코 이 책을 읽어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화려한 추천사의 글이 마치 '십 원짜리'가 굉장히 대단한 뭐라도 되는 것마냥 부풀리는 것 같아 또 어색하기 이를 데 없으며. 자연스럽지 않은데, 자연스럽게 봐져야 하는 어제는 작가만 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아마도 그 키워드는 한정되어 있고 그 세계에서 그렇게 감정은 고스란히 갇혀있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시대정신을 대변하지도 못하고 시인정신을 언제 가지고나 있었는지 흐릿하기만 하다. 시대가 부르지 않아도 시인들은 먼저 반응하는 촉수가 있어야 하는데, 언제부턴가 무언가에 잘려 나갔는지 소외나 가난,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데도 무관심해지고 있다. 이런 모습으로 생활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머리카락을 길러 묶고 다니고 있는 내 모습을 거울 앞에서 발견하면 처량함을 넘어 애처로워 보인다. 그 동안 보여주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살지 않았는지 하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 좋은 작품을 쓰고 시대를 대변하는 시인정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 시인들에게 한 일이 없이 내가 무임승차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p.96.]

 

 

시대정신을 대변하지도 못하고 시인정신을 언제 가지고나 있었는지 흐릿하기만 하다. 시대가 부르지 않아도 시인들은 먼저 반응하는 촉수가 있어야 하는데, 언제부턴가 무언가에 잘려 나갔는지 소외나 가난,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데도 무관심해지고 있다. 이런 모습으로 생활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머리카락을 길러 묶고 다니고 있는 내 모습을 거울 앞에서 발견하면 처량함을 넘어 애처로워 보인다. 그 동안 보여주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살지 않았는지 하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 좋은 작품을 쓰고 시대를 대변하는 시인정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 시인들에게 한 일이 없이 내가 무임승차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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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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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좋아하는'의 시인. 고요하고 정제된 아름다움의 세계의 후속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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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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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온한 일상의 폐부를 찢고 섬뜩한 현실을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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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체 - 자본과 국가 너머의 세상 제국 3부작 3
안토니오 네그리 외 지음, 정남영 외 옮김 / 사월의책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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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없다는 요새 생각. 제국의 전지구적 협치구조와 자본주의적 명령의 기구를 탐색한다는 점,
새로운 민주주의 가능성과 필요로 하는 제도적 과정에 대한 성찰하고 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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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zzangubug > 율리시스를 읽기 위하여
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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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가 제임스 조이스를 죽였는가?

나요, 하고 해설자가 답했다.

졸업장을 받아내려고

내가 제임스 조이스를 죽였지요.

 

무슨 흉기를 사용하여

힘센 율리시스를 살해했는가?

내가 사용한 흉기는

하버드 졸업 논문이었지요.

 

-패트릭 캐버너-

 

 

 

 

『캐버너의 시로 글을 시작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소싯적 범우사 비평판 세계문학에 열광했었다. 도스토에프스키, 카프카, 스탕달, 헤밍웨이 등을 어린 맘에 줄기차게 읽어대면서 궁극에는 조이스에 이르게 되었었다. 그러나 당시 본인에게 조이스의 <율리시스>챕터1’을 넘기도 힘든 혼돈과 무질서의 온상이었고 넘을 수 없던 거대한 산이었다.

그랬던 것을……  10년이 흘러 다시 손에 넣게 되었다.

 

 

책장을 넘기는 본인의 눈은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지만 본인의 두뇌와 문자화된 신호는 역시나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자꾸 이러면 오기가 생기는 법……

조이스 학회의 강독을 들어볼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밤이다.

그러나 그전에 우선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최대한 조이스와 율리시스의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다.

 

손품 발품을 팔아 구한 논문으로 이제 대학 내내 줄기차게 해왔고 지금도 재미 삼아 간간히 수행하는

텍스트의 해체 및 재구성을 해보려 마음먹었다.

 

조이스와 율리시스의 시대』

누군가 어떠한 작품도 시대와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법이다.”라 그랬던가?

 

이 말을 한번 교조적으로 믿어보고 그가 살아온 시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조이스의 아일랜드는 1921년이 되어서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예이츠를 비롯한 그레고리 부인 등 이 시대 아이리시 문학의 주역들은 팽배했던 에너지(‘독립이라고 해두자)를 지적하고 그런 기운의 결실로서 문예부흥을 일으켰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조이스는 문화적 민족주의의 편협성과 감상성 그리고 비현실성을 혐오하였다. 예이츠의 영웅 전설, 전원, 상징, 편향과는 다르게 조이스는 소시민, 현세, 도시, 사실성을 강조하였다. <더블린 사람들>에서 조이스는 파넬, 예수 등 배반당하는 영웅과 자신을 동일 선상에 놓고 부정적인 의미에서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을 포함한 역사를 자의식화 하였다.

 

  

조이스의 일생을 두 분기로 나눈다면 우선은 1882년 중산층의 아들로 태어나 점점 빈곤화 되어가면서 대학을 마치게 되는 1904년까지의 더블린 시절, 1904년 노라 바나클과 함께 아일랜드를 떠나 폴라, 트리에스테, 로마, 쮜리히 그리고 1920년 이후 파리 생활에 이르는 유럽 유랑기로 나뉘어진다, 이 두 분기는 전자의 기억을 밑거름으로 후기에 아련한 재구성 및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함의를 둔다.

 

 

『율리시스, ‘변소간 문학혹은 숭고한 걸작’?

 

 

<율리시스>에 대한 출간 당시의 반응은 극렬하게 엇갈렸었다. 당시 어떤 평론가는 율리시스를 일컬어 분명하게 더러운 것에 영광을 안겨주는…… 변소간 문학을 전공한 도착적 광인의 글로써, 메스껍기 이를 때 없다.”라고 평했다 알프레드 노이즈는 지금까지 인쇄된 책들 중 가장 추악한 책으로 문학적 볼셰비즘으로 인해 추앙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반면, “아일랜드는 율리시스로서 유럽의 높은 문학에 화려하게 재등장 하게 되었다.” 조이스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의 모든 영웅들이 타국지성들의 존경심을 자아내게 만든 대표작이다.” 등의 극찬도 공존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TS 엘리엇의 평을 살펴보면….

 

조이스는 신화를 사용함으로써 당대성과 대성을 솜씨 좋게 지속적으로 병치시켜 그의 뒤를 따르는 어떤 사람들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 내었다. 그것은 이 시대 역사의 모습인 엄청난 무위와 무정부 상태의 파노라마에 형상과 의미, 그리고 질서를 부여하고 통제하는 방법이다.

 

율리시스 출간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조이스 관계 간행물의 분량은 엄청나다. 금세기 어떤 소설도 율리시스만큼 비평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만큼 다양한 접근에 노출된 적이 없었다. 어쩌면 미국 아카데미즘의 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조이스에 대한 논의는 원작을 더욱 난해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까지 한다.

 

율리시스는 실제로 의식의 흐름이라는 주요한 기술법으로 ‘fact’의 편린들이 엄청난 규모로 쇄도하여 독자들을 혼란케 하지만 실제로는 시간과 공간의 잘 계산된 그물 속에 정밀 하게 자리잡고 있다. 조이스 자신도 이 fact의 의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리얼리즘 속에서 우리는 세계의 토대가 되는 사실들, 낭만주의의 허상을 일격에 무너뜨리는 급진적 리얼리티와 철저하게 맞부딪힌다…… 자연은 참으로 비낭만적인 것이다. 자연에 낭만을 불어넣는 것을 우리들 자신이다 이런 태도는 허위요 이기주의요 또한 부조리하다 율리시스 속에서 나는 사실과 마주서려고 애썼다.

 

조이스는 실증주의의 방법으로 상징적인 혹은 신화적인 측면을 도입하였다.

 

 

『현대에서의 율리시스』

 

 

조이스는 이제 움직일 수 없는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율리시스>라는 작품 하나만을 놓고 보아도 일반인에게 그는 다가가기 힘든 외경스러운 존재요, 전문가에게는 유별스런 독점과 탐닉의 대상이라는 양극단으로 조건 지워져 있다. 위대한 작품에 가치와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대체로 상아탑 연구가의 전문적인 권위임은 차치하고라도 캐버너의 시(도입부)는 특정한 의도를 넘어서는 울림을 안겨준다 연구를 위한 연구가 문학의 참다운 기쁨을 망가뜨린다는 반성은 조이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율리시스>는 모더니즘의 정점이라고 평해지지만 모더니즘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 어느 작가도 조이스 만큼 철저하게 실험정신에 의해 새로운 문학의 틀을 창조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없을 것이. 조이스는 율리시스의 18개 장마다 서로 다른 문체와 서술 기법을 시도하였고, <피네간의 경야>에서는 지나치리만큼 언어의 실험에 몰두하여 단어의 의미를 무한하게 복합적이고 상징적으로 확산시켜 가는 전위적 실험을 수행하였다.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모더니즘 문학의 두드러진 특성 중의 하나는 형식주의 일 것이다. 엘리엇이 설명한 것처럼 조이스가 사용한 신화적 수법은 임의적이기는 하지만 20세기 혼돈의 역사적 상황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조이스의 텍스트는 오히려 포스트 모더니즘의 성격을 갖고 있다.

 

 

조이스는 탈 모더니즘의 선구자로서 모더니즘의 미학적 입장을 거부한다. 무질서의 자유로움을 포용하면서 형식주의를 의식적으로 해체하며 자아를 둘러싼 혼돈의 외부와 주관적 자아를 서로 분리시키지만 조이스는 그 양자 사이에 열린 통로를 만들어낸다. 그의 텍스트는 현대사회에 고대의 엄격한 질서구조를 부여하는 하는 것이 아닌 건축물의 거푸집과 같은 역할만을 하였으며 엄격한 병행관계 보다는 변이와 이탈을 시도하였다.

 

 

모더니즘이 시도했던 임의적인 미적구조의 사고체계를 해체시키는 탈 모더니즘의 방법은 자유연상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동시에 의식의 실증주의적 구조에 대한 전통적 확신을 붕괴시켰다.

 

 

조이스의 후기작품 특히 <율리시스><피네건의 경야>는 의미의 불확정성과 사고의 무한한 생산성을 보여준다. 거의 모든 조건들이 텍스트의 유동성과 불완전성을 내재하며 텍스트에 대한 어느 한가지 주된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작품세계는 어느 한가지 구조로 결합되고 규정되고 지칭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소위 탈 중심적 우주를 드러낸다.

 

 

따라서 이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기존의 독서 방식처럼 원인과 결과의 논리적 분석을 통한 작품구조의 어느 한 의미를 투여할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요구하는 대로 의미를 산출하는 어느 하나의 지배적 구조를 독자 자신이 끊임없이 전복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텍스트를 해독하려다 실패하는 과정은 바로 이 작품들의 모든 신비를 벗겨내려다 실패하는 독자의 모습이요, 텍스트 자체가 구축한 이른바 철옹성이다.

 

 

『조이스의 정치성』

 

조이스의 텍스트들이 확고한 의미와 고정된 구조를 끊임없이 해체 시키려고 한 정치적 함의는 무엇인가?

 

일부 비평가들은 이를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탈진리적 경향으로 나타난 현실에 대한 회의, 수동 내지는 비관적 세계관의 발현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조이스에서 드러나는(율리시스 마지막 장에서 반복되는 여주인공의 독백) 그것은 작가가 얼마나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삶의 비전을 갖고 있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다른 해석으로 조이스는 실제적인 정치 활동에서는 한 발짝 물러나 있었지만 그가 행한 언어의 실험을 통한 작업은 충분히 정치적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당시의 서구사회를 지배하던 제국주의적 문화전통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거대한 프로젝트로 기존의 제국주의적 의미화의 계층을 전복시키고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의미형성 관계를 새롭게 부각 시키는 것이다.

 

조이스는 19세기 전통의 낭만주의와 리얼리즘뿐만 아니라 처음 모더니즘의 역동성을 좀먹던 형식주의적 사고까지 전복시키려고 하였다. 그것은 의미의 단일적 계층을 부정하고 의미의 다양성과 불확정성, 그리고 의미의 무한한 생산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조이스의 전위적인 실험성이 갖는 혁명적 성격은 문화적 헤게모니를 독점하려는 권위적인 문화적 제국주의를 해체시키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조이스의 텍스트는 저자 중심의 글쓰기와 읽기 방식을 해체시켜 의미생산을 저자의 의도와 독립된 텍스트 자체의 무한한 증식과정으로 의미의 재생산이 독자의 두뇌 속에서 이루어지게 한다. 이러한 작업은 그가 30년대 마르크시즘의 이론의 영향하에 있었다는 말이 상당, 논리적으로 들리게까지 한다.

 

조이스는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부정성을 과감하게 발전시켰으며 그 정신을 끝까지 과감하게 밀고 나가 모더니즘의 토대까지 해체시키는 탈 모더니즘의 선구자적 역할과 모더니즘과 탈모더니즘의 교량 역할 까지 해내었다.

 

『텍스트의 즐거움』

 

 

이 난해하기 짝이 없는 텍스트에서 어떠한 즐거움을 찾을 것인가? 롤랑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저자의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의 사실이 현상에 직접 작용하기 위해서가 아닌, 자동사적인 목적으로 이야기 되면, 다시 말해 상징을 실천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떠한 기능도 지니지 아니하면 이러한 분리가 나타난다. 목소리는 그 기원을 상실하고 저자는 그 자신의 죽음으로 들어간다. 비록 저자의 제국이 아직도 무척 강력하기는 하지만 오래 전부터 그것의 붕괴는 시도되어 왔고 또 진행 중이다.

 

 

이렇게 저자가 멀어지면 텍스트를 해독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쓸모 없는 것이 된다 텍스트에 저자를 부여하는 것은 글쓰기를 봉쇄하는 것이다. 글쓰기의 총체적 의미대상은 바로 독자이다.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은 다양하게 집결되는데 그러한 장이 되는 것이 바로 독자라는 것이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기재되는 공간이며 텍스트의 통일성은 그 기원이 아닌 목적지인 독자에 있다.

 

 

즉 율리시스 독해는 텍스트의 난해함으로 인해 이해를 위한 독자의 노력이 필수 불가결하지만 불가능 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싱거운 결론을 내리면서 글을 맺는다.

 

 

 

 

 

<참고 및 인용>

 

제임스 조이스의 생애와 작품  - 전은경 (숭실대 영문학 교수)

외국문학 연구의 현단계, 제임스 조이스 김길중 (서울대 영문학 교수)

조이스 문학의 실험성과 그 정치성 홍덕선 (성균관대 영문학 교수)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김희영 옮김 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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