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일본의 식민지와 전쟁범죄의 청산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대한민국에서 아직까지 살아숨쉬는 굉장히 민감한 주제이다.
책의 두꺼운 두께와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분석하여, 냉전 그리고 현재의 국제정세까지 파헤쳐, 일본의 식민지와 전쟁범죄에 대한 청산까지 이어지는 테마를 제시한 이 책을 본 순간, 역사 그리고 현대 그리고 일본에 상당히 많은 관심과 인연이 많은 나로써는 당연히 읽어볼 수 밖에 없는 책이었다.
그리고 그 구성 또한 처음 생각한 것보다 좀 더 전문적이고 다양한 시각을 안내하고 있으며, 본래 3개월 전에는 완성했어야 할 이 서평을 이제서야 작성할 수 있게 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을 선보인다.
이 책을 읽고 난 이후, 몇 가지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어 그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첫번째는, 마치 2019년 7월에 발간된 이영훈 교수 의 반일종족주의를 겨냥한 듯한 느낌을 굉장히 강하게 받았다. 정확히는 책의 어느 구절도 반일종족주의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여 비판하는 부분은 없지만, 내용적인 면에서 반일종족주의의 정반대에 위치하여 일본에 대해서 '일본은 나쁘다'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범죄 문제는 청산되지 않았고. 일본은 극우들이 좌지우지 하고 있다는 '반일'의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들만 모아둔 듯한 인상을 깊게 받았다. 그러나 이러이러해서 일본은 나쁘다라고 끝인 날 뿐, 결론적으로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는 해결책은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두 번째로는, 거의 일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미국에 대한 비판이다. 일본은 아무튼 나쁜 놈들이고 그들을 방치하고 있는(혹은 방치했던) 것은 미국이다라는 주장은 새삼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미국이 왜 그럴수 밖에 없었나 그리고 왜 지금도 미국이 그렇게 유지하는가에 대한 좀더 심오한 분석과 대안을 제시했으면 좋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미국도 나쁜놈이다, 미국이 일본을 이렇게 이끈 것에 대해 사과해야한다 정도에서 끝이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일부 저자는 북한 또는 중국과의 협력 등의 친중친북 정책까지 연계하여 주장하기도 하는데 상기한 첫번째 내용과 더불어 더욱이 특정 진영의 주장만을 취합했다는 인상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전후체제에 대해서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핵심 코어로서 지금까지 세계를 이끌어 온 것에 대해서는, 사실 어느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들은 전반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미국-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직적인 동맹관계와 (일본을 속국이라고까지 일컫는다) 그리고 미국 동맹국간의 서열적인 국가질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안에서 미국이 의도적으로 일본의 과거사 청산을 방치(또는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후체제는 단순히 샌프란시스코 체제만으로 이어져 왔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키신저 체제도 그 중요한 한 축으로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분업 체제 또한 지금의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만들어 온 중심이다. 상당수 저자들은 대안으로 제시한 내용이 동아시아의 협력강화, 운명공동체, 미국의 사죄 등을 거론하고 있지만 이미 키신저 체제에서 상당부분 겹치는 내용이 있기에 제대로 된 대안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한일 관계에서의 일본과 미국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샌프란시스코 체제 뿐만 아니라 한미일을 둘러싼 많은 복합적인 요소를 고려해야하는데, 이 책에서는 지엽적인 요소만으로만 비판을 하고 있어 설득력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이 지적하는대로 이른바 일본의 65년 체제는 일본 그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일 것이다. 대부분의 식민제국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과거의 구 식민지 국가들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그들을 이끌어 가고 있다. 구 식민지 국가들도 과거의 종주국와 원해서든 억지로든 많은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36년간 많은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긁어 부스럼만 만든 꼴로 항상 일본에 사사건건 귀찮게 구는 이웃을 만들었을 뿐이다. 왜 한국이 그러한지는 일본이 스스로 깨달아야 할 문제다. 이 책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출판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신냉전이라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가지 기대와 다른 부분이 많은 책이었지만,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그 배경에 관해서는 왠만한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풍부한 자료들이 소개되고 있고, 신냉전의 시대인 지금 한국의 새로운 역할을 어디에서 찾아야할 지 고민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