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 - 꽃 같은 말만 하라는 세상에 던지는 뱀 같은 말
조이스 박 지음 / 스마트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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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에 나오는 고길동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면 어른이 된 거라고 했던가. 아니, 이젠 고길동을 아는 것만으로도 어른인거라고 했지.

책을 너무 좋아해서 푹 빠져있던 어린 나는, 엄마가 60권짜리 명작동화 전집을 구해주시면 방에 틀어박혀 그걸 다 읽어내는 동안 나오질 않았다고 했다. 친구 집에 놀러가서도 책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친구들이 재미없어서 떠나면 친구가 가버렸다고 우는 대책 없는 아이였다고 했다. 그런 내가 이십대 후반부터 책을 피해 다녔다. 자기계발 서적들이나 실용서적은 읽어도, 문학은 피해서 다녔다. 남들보다 피부껍질이 두세 겹은 모자라는 것처럼, 신경가닥이 다른 이들의 열 배는 많은 게 아닌가 싶은 나는, 언젠가부터 책을 읽는 게 너무 아팠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가 배우고 꿈꾸던 세상과 현실의 괴리는 너무 큰 것만 같았고, 내게 꿈을 꾸게 했던 동화를 포함한 문학작품들이 아팠다. 어쩌다 책 한 권을 붙들고 읽고 나면 일주일에서 한 달을 앓았다. 그래서 책을 피해 다니곤 했다.

유독 길고 지친 하루를 보내고 늦은 귀가 후 책상에 놓인 봉투를 뜯어 책을 꺼냈다. 프롤로그를 읽다가 가슴이 서걱대서 아, 좀 더 맑은 정신으로 낮에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책을 밀어두고 잠을 청했다. 표지에 그려진 빨간 망토의 뒷모습이 꿈 가에 어른거렸다. 한낮의 햇살이 가득한 창가에 앉아 책을 펼쳤더니, 동화 속 주인공들이 톡톡톡 쏟아져 내렸다. 어린 시절의 나, 더 자란 시절의 나, 더더 많이 자란 시절의 나, 여러 시절의 내가 동화 속 주인공들에 투사되어 책 밖으로 비집고 나왔다.

Joyce Park의 『빨간 모자가 하고 싶은 말』 은 스물 한 편의 동화와, 중간 중간 번외로 등장하는 또 다른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함께 풀어낸다. 저자의 해석 속에서 주인공들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주인공들은 우리들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들이 맡고 있는 역할이다. ‘나를 죽이지는 않으나 죽을 만큼 힘들게 하는 계모’는 우리가 자라온 가부장 사회에서 어릴 때부터 내면에 주입시켜 길러 온 ‘여성의 올바른 모습’ 등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옭아매는 밧줄이다. ‘숲속에서 아프고 병든 채 나를 부르고 기다리는 할머니’는 ‘정말로 원하는 것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어린 여성의 모습’인 빨간 망토인 내가 숨겨놓은, 우리가 사실 알고 있었던 내면의 원초적인 지혜이다. ‘징그러워 던져버리고 마는 개구리’는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공포이자, 맞서서 이겨내야 하는 대상이다. 이렇게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동화 속에 숨겨진 여러 장치를 저자는 새롭고 불온한, 날것의 시선으로 해체한다.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던 내가 결혼과 출산, 육아를 겪으면서 ‘여성으로서 치환된 나’만 남겨진 것 같아 서러운 날들이 있다. 출산 때 느꼈던 어마어마하고 끔찍했던 진통은, 엄마로서의 내 생에 온통 새겨져서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는 것만 같다고도 생각했다. 엄마가 아닌 온전한 나로 다시 살고 싶어서 아등바등 내 것을 자꾸 쌓아 올리려들었다.

성 주변에 칭칭 감아 오른 가시덤불은, 공주가 사랑을 할 준비가 되었을 때 사그라지고 길을 내어주기 시작한다. 동화 속에서는 두 사람의 사랑으로 표현되지만, 결국 ‘사랑하기에 두 사람은 둘을 넘어서 이 세상에서 함께 해야 할 몫이 있다’라는 저자의 말은 결코 두 사람만의 사랑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받아서 완성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완성되는 사랑은 우리를 한 발짝 더 나아가게 한다.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공포에 분열되고 가부장 사회에 해체되고 있는 것만 같던 여성의 삶은, ‘백조왕자’ 속의 공주가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쐐기풀을 뜯어 옷감을 짜는 고통을 거친다. 스스로의 말들을 잘 벼려가며, 내면의 조각난 경계를 허물어 내고 나면, 그동안 자기 내부의 결핍을 지켜보고 통찰해 온 노련한 사냥꾼이 된다. 쉽게 죽일 수 있는 총을 쓰지 않고 칼로 그 결핍의 배를 갈라 통합된 새로운 자아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여러 가지 형태로 책 밖에 톡톡 쏟아져 나왔던 여러 조각의 내가, 동화 속 주인공들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 책 속으로 돌아간다. 내 뱃속에서 덜그락 대는 것만 같던 돌덩이들이 사실은 묵직한 추가 되어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큰 위로를 받는다. 동화 속 주인공들 곁의 고길동들이 사실 내 안에 함께 해 왔다는 걸 알고서 이렇게 조금 더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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