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자가 되어라 ㅣ 한국철학전집 3
정도전 지음 / 결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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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보통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개국공신 정도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이 책은 그를 참모라고 부르지 않고 설계자라고 부른다. 제목도 그렇다.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자가 되어라. 읽기 전에는 힘 센 사람 뒤에 붙어서 권력을 챙기라는 얘기인가 했는데, 그런 책은 아니었다.


2장 제목이 이 책을 한 줄로 말해 준다. 어리석은 자는 꼭대기를 탐하고 지혜로운 자는 밑그림을 그린다. 정도전은 자기가 왕이 될 수 없다는 조건을 정확히 알았고 그 한계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나라의 이념과 관직의 원리, 백성과 국가의 관계를 정의하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왕은 그가 쓴 답 위에서 통치했다. 궁궐과 전각의 이름까지 그가 지었다는 대목에서는, 왕도 그 방에 앉을 때마다 남이 정해 준 의미 안에 앉는 셈이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회사 일에 빗댄 대목은 더 와닿았다. 회의에서 마지막에 말하는 사람은 결정권자처럼 보여도 앞에 정리된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를 뿐이고, 그 선택지를 만든 사람이 이미 답의 범위를 정했다는 것이다. 결정은 팀장이 해도 결정의 경계선은 보고서 초안을 쓴 사람이 긋는다. 안건을 정하고 양식을 만들고 회의록을 남기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지만, 사람은 바뀌어도 그들이 쓴 문장은 남는다.


정도전의 시간을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는 점도 좋았다. 거절의 비용은 바로 청구되고 이익은 한참 뒤에야 오는데, 정도전이 견딘 시차는 십 년 가까웠다. 책은 그 시간을 길고 지루하고 초라했다고 적는다. 그래도 자기가 어느 편에 설지를 자기 손으로 정했다는 한 가지는 남았다. 남이 정해 준 자리에 앉은 사람은 그 자리와 같이 흔들리지만, 자기가 고른 자리에 선 사람은 자리가 사라져도 자기는 남는다.


가장 불편하면서 재미있게 읽은 건 상사 이야기다. 주군을 도구로 쓰라는 말은 거북한데, 책은 우리가 이미 회사와 상사에게 도구로 쓰이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 관계가 한 방향으로만 흐를 때다. 상사를 두려워하거나 미워하는 건 결국 같은 자리라서 그 에너지는 전부 상대에게 헌납하는 셈이고, 책이 권하는 건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따져 보는 일이다. 상사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겹치는 곳에 일을 몰아주면 그 사람의 야망이 내 일을 밀어 주는 힘이 된다. 아부는 상대를 기분 좋게 하고, 이건 상대를 움직이게 한다는 구분이 기억에 남는다.


정도전은 빈손으로 남의 군영에 들어가 군대가 아니라 그 군대를 쓸 방향을 들고 나왔다. 이성계는 왕이 되었고 정도전은 되지 못했으니 겉으로는 완패지만, 그가 원한 건 왕좌가 아니라 자기 머릿속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고 그 일은 이루어졌다.


다만 읽다 보면 역사책이라기보다 직장 생활 지침서에 가깝다고 느껴질 때가 있고, 정도전이 늘 계산이 맞아떨어지는 사람으로만 그려지는 것도 좀 매끈하다. 그는 결국 이방원에게 지고 오랫동안 역적으로 남았다. 그래도 그가 그린 밑그림은 남았고, 나는 그 설계도가 조선의 뼈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 일의 밑그림은 지금 누가 그리고 있는지, 한 번쯤은 따져 볼 만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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