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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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공간은 우리가 사는 일상의 풍경과 별다를 바 없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 어딘가 있을 법한 사람 같은 화자를 포함한 인물들.

그렇기에 본격적인 서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소설 속으로 빠르게 몰입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수많은 타인과 보내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제 욕구를 억압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혹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비치기 위해, 사회가 정해놓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틀에 맞춰 살기 위해.

소설 속 화자 영아는 그렇게 점점 고유성을 잃어간다.

그렇지만 영아는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 나아가 바뀌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오랜 친구 은주로부터 흔히들 말하는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현실로부터, 사랑하지도 않은 연인 수원에게 절대적인 애정을 연기하고 있는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늘 문제아 타이틀을 달고 영아를 포함한 여러 교사들 및 원생들을 괴롭히는 은우로부터, 이 모든 걸 감내하고 있는 자신으로부터 말이다.

이 책은 해방의 욕구를 억압하고, 선한 사람으로 비치고자 하는 강박을 가진 한 사람의 내면을 적나라하고 세밀하게 보여준다.

영아의 내면 상태에서 비롯된 다양한 표현과 비유들이 가미된 문장들은 이 책을 더욱 신비롭고 오묘한 매력을 자아내게 만든다.

제목에서도 등장할 만큼 이 책의 중요한 소재를 맡고 있는 "오렌지" 빛이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영아의 고유성을 극대화해 빛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


소설 군데군데 모순적인 인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모습들은 마치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의 단면을 텍스트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의 범위는 큰 범위는 물론, 아주 작은 개인과 개인의 범위도 포함된다.

먼저 집단에 소속될 수밖에 없는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게 암묵적으로 존재한다.

이를테면 학부모 항의를 막기 위해 은우의 문제 행동을 담당 교사 영아가 모두 감당해야 하는 것들.

저도 모르게 거부감이 표면으로 드러날 만큼 싫어하는 은우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은우의 어머니가 소개해 준 실험 덕에 영아는 스스로 해방하는 법을 알게 된다.

이러한 구도가 매우 흥미로웠다. 다른 인물 관계도도 아니고 하필 '은우' 어머니를 통해서 영아가 해방의 해결책을 얻어 간다는 것이 완성본에선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을지 기대된다.

센터에서 스칼렛을 만나고 나서 영아는 처음으로 해방의 쾌락을 경험한다.

우리 사회에서 속된 말로 "캣맘"이라고 불리는 진상 아파트 주민에게 당해왔던 것을 갚아주고, 수동적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은주에게 묵혀왔던 말을 모두 쏟아붓고, 사랑하지 않는 연인 수원에게 진심을 모두 고백한다.

이런 영아의 모습에서 가제본 뒤표지에 실린 문장을 떠올리게 만든다.

"빵칼은 오렌지를 썰 수 없지만 쑤실 수는 있다."

해방된 영아의 자유분방한 모습에는 작가가 우리 사회에게 전하고 싶은 목소리가 깊게 박혀 있다.

불만과 불평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 순응하는 게 정말 '평범'이 맞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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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해방의 자유를 맛본 영아의 모습이 마냥 통쾌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타인의 불행을 모아둔 비극적 사고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거나 점차 '정상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도 하면서 본인도 인지할 만큼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마침내 그리 갈망하던 해방의 자유를 얻었는데 (비록 약물의 힘을 빌려서지만) 영아는 왜 만족하지 못할까.

이에 대한 힌트는 다소 독특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소설은 보여준다.


강렬한 사건과 장면들, 영아를 즁심으로 생동한 인물들의 묘사까지 마치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청예 작가의 문체에 완전히 매혹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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