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부터 강렬한 이미지 묘사에 검은 말의 이미지를 떠올리려 애쓰지 않아도 생동한 말의 움직임이 절로 떠올랐다.
책 뒤표지에 수록된 김보경 평론가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거침없이 내달리면서도 총알처럼 정확하고 빠르게 표적을 맞혀" 본인의 이야기를 선보여주겠다는 각오가 느껴지기도 했다. (첫 출간한 책이라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신예 작가이기도 하고 이번 소설집을 통해 이서아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 작가의 문장은 독자를 확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주었다. 그만큼 소설 한 편 한 편에서 보여주는 장면들은 너무나 강렬했고, 정말 첫 번째 단편에서 등장한 검은 말의 이미지처럼 그녀의 글은 거침없다.
하지만 나에겐 조금 읽기가 힘든 부분도 있었다. 나는 낯선 이미지와 장면들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지거나 인물이 소설의 흐름과는 조금 뒤틀린 행동을 보여줄 때 혼란을 느끼는 편인데, 이런 부분이 일곱 편의 소설마다 빈번히 나와 조금 어렵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내 개인적인 취향적인 부분이지, 이 책만이 가지고 있는 독보적인 특징이자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런 방식이어야만 했다는 걸 책을 덮고 깨닫게 되었다.
그저 난해하고 어렵게 느껴졌던 게 모두 그들의 생존을 위한 고귀한 투쟁이었다.
일곱 편의 소설 속 화자는 모두 어린 소녀들이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으며,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와 만나 연대를 맺는다.
그들은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들과 맞서 나름대로 그들에게 저항한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상처 입고, 좌절하고, 절망에 빠지더라도 자신들의 목표 혹은 표적을 향해 질주한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비록 공간은 낯설더라도 실제 우리 사회 문제의식과 매우 근접해 있다. 어린 소녀들과 여성에게 향해지는 희롱과 위협, 혐오에 저항하는 인물들을 보며 쾌감을 주는 동시에 씁쓸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처절하게 저항하고, 날카롭게 자기방어를 하고 있는 인물들의 바람은 그저 위계질서가 없고,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는 평화와 안식이 있는 공간 속에서 사는 것.
책 표지에서나마 이들의 이상적인 공간이 형태화된 듯하다.
신비로운 듯하면서 따뜻한 색감의 배경 속에 펼쳐진 바다. 돌고래가 자유롭게 헤엄치는 넓은 공간. 언뜻 보면 놀이공원처럼 보이기도 하면서도 자연과 공존하는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야말로 누군가의 "낙원"을 연상케하는 이상적인 공간이다.
범죄와 혐오가 없던 해는 한 번도 없었다. 자연 훼손이 없고, 악한 인간이 모두 사라진 세계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을 띨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기도 했다.
부드럽고 평화로워 보이는 배경 한 가운 데에 책 제목이 굵은 서체로 배치해 놓은 게 흔들리지 않은 소설 속 인물들의 굳건한 마음같이 느껴져 표지에 조금 여운이 남았다.
현실성과 쾌감의 줄타기
『어린 심장 훈련』의 재미 포인트 중 하나인 '쾌감'이다.
책을 몰입해서 읽다 보면 화자에게 몰입을 하게 되는데, 천진난만한 순수한 소녀가 대상에게 순수함을 빼앗기고 당하는 서사와 상반되는 이야기 전개에 간접적인 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든다.
해당 스샷은 「초록 땅의 수혜자들」에서 화자와 수정이 예술가라고 불리는 남자에게 성적으로 위협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 두 인물이 그에게 응징을 하는 장면이다.
우스꽝스럽게도, 그로테스크하게도, 기괴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감각에서 통쾌함에 도달할 수 있는 해당 단편의 장면 중 가장 강렬했다.
어린 소녀가 한없이 크고 위협적인 존재에게 대응하는 장면은 소설 곳곳에 배치돼 있다.
각 단편마다 기호나 도형을 사용해 형태를 만들어 표현한 부분이 책 곳곳에 빈번히 보인다.
「사하라의 DMZ」 중 무례한 질문을 쏟아부으며 여성을 바라보는 삐뚤어진 시선, 기저에 혐오가 깔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전형적인 한국 아저씨들처럼 굴고 있는" (261p) 외국인 가이드 남성에게 의연한 태도로 대하는 인물의 모습을 시각화한 부분이 꽤나 신선했다.
본문 중 괄호를 열어 그들의 추악함을 드러내는 인물의 속마음을 검열 없이 그대로 넣기도 하고, 비속어 사용도 거리낌 없다.
그동안 꽤 많은 페미니즘 소설과 여성 범죄와 여성 혐오를 문제의식으로 삼는 소설을 봐왔어도 이런 파격적인 시도는 처음이다. (물론 저의 독서 부족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들의 대응 후 결말이 마냥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의 싸움과 결과까지의 과정은 허무에 저버리지 않는다.
그저 훈련 중 하나일 뿐이다. 어린 소녀들이 붙들고 살아야 하는 생이 가혹하고 부당하지만 말이다. 절대 허무와 비관으로 완결되지 않음을 단편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 스며든 수많은 폭력과 혐오들
일곱 편의 단편 속 화자는 여러 폭력 속에서 저항한다. 『어린 심장 훈련』은 동화적인 요소와 누아르 장르가 결합해 일상적으로 보기 힘든 이미지들이 등장해서 신선한 느낌을 준지만,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폭력은 결코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부모의 아동학대,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통제,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학대하는 교사, 어린 여자 직원들을 추행하는 공장장과 상사, 어떤 직업을 갖든 근무복으로 성적 대상화가 되는 여성, 국경을 넘어서도 성차별을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 등 우리 사회에서도 약자를 향하는 폭력은 예부터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범죄로 판정된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형적인 한국 아저씨들" (261p)이라는 구절을 보고 어떤 남성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약자를 향한 폭력은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 너무나 깊숙이 스며들고 말았다.
소설은 이들을 부각해 보여줌으로써 다시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에 맞서 싸우는 이들이 지금도 존재함을 독자들의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시킨다.
미학과 주제의식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은 작가의 문장력에 감탄했다.
반드시 지켜야 할 대상들
각 단편마다 지켜야 할 것이 분명히 명시돼 있다. 이유 없는 폭력에 노출돼 있는 자들끼리 뭉쳐 보호자가 돼주기도 하고, 일시적으로 우위에 서 보호를 목적으로 명령을 하는 인물도 있다. 체벌에 희생된 자연을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조금 난해할 수도 있는 소설의 흐름 속에서 타인을 향한 연민과 애정 어린 시선들이 더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더 이상 무분별한 폭력과 혐오로 인한 희생자가 없어져야 할 것을, 이것을 피해자인 자신들이 저항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일임을 일곱 편의 단편은 신선한 시도들과 방식들로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여성들은 더 이상 약자인 채로 굴복할 수 없다.
일곱 편의 단편을 다 읽고 책 소개에서 본 구절이 떠올랐다.
"퀘스트가 난무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평정하러 온 소녀들의 고군분투기" "이게 내가 사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살 때에만 나는 진실로 살아있었다."
소녀들은 능동적으로 자신과 더불어 자신과 비슷한 소녀를 보호하며 어른들, 그리고 성인 남자들과 맞서 싸운다.
낙관과 비관을 무한 반복하지만, 이것이 그들이 사는 생의 진실이다.
무자비한 폭력과 혐오, 체벌은 이야기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꾸준히 위협적인 어른들에게 저항하며 살아가는 소녀들이 있음을 소설은 독자들에게 단단히 각인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