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로 사람을 찌르거나 사람으로 도구를 찌른다. 이게 벌을 각오하고 죄를 짊어지는 살인이야.
당신은 사람으로 사람을 찌르려고 했잖아"

나름의 신념을 지니고 열꽃을 피웠던 이들도, 어디서든 납작 엎드려 주변을 살피는 작은 짐승 같던 이들도, 유독 충성심에 불타 맹목적이던 이들도, 결국 나중엔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만고만한 점토 인형처럼 변했다. 모두 처음엔 각자 마음속에 자기만의 촛불을 켜놓고 있었지만 더는 그렇지 않았다.

쉬지 않고 도망치며 살고 있는 건 오히려 윤서리 자신이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과거로만 도망쳤기에 미래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아직 어떤 친구도 죽지 않은 경선산성을 보고 싶어서 이곳에 왔다. 단지 그뿐이었다.
이제껏 시도했던 모든 노력이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것 같았다. 이 굉장한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게, 고작 한때 반짝했던 추억을 들춰보는 것이라 생각하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런 건 사진첩의 역할이다. 인간이 온 힘을 다해 이뤄야 하는 목적이 아니다.

그녀는 판결문을 읽듯 중얼거렸다. "나는 시간을 돌릴 때마다 새로운 정여준을 죽게 했구나."

살아야 하는 건 언제나 그가 자신보다도 사랑했던 이들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깊은 나락에서 돌아오든 얼마나 특이한 초능력을 가지게 되든, 그 능력은 아마 누군가를 찌르고 뭉개고 부수기 위한 게 아니라 그저 머리카락을 잘라주고 붙여주며 킬킬거리기 위해 생겨났을 것이다.

"우린 싱크홀에 떨어져서도 포기하지 않았잖아요. 그러니 싱크홀이 생기기도 전에 포기해버리면 미래의 우리가 분명 화낼 거예요. 난 복원자예요. 먼저 폭발해 다가오는 게 없으면 돌려보낼 수 없어요. 그러니 이번 희망도 부서질 때까지 기다려줘야 해요. 적어도 그 전엔 되돌리지 않을 거예요."

"무사해서 다행이다!"

"지금까지 싸웠던 시간보다 더 오래 대화를 나눌 것이다! 내가 용서받고 돌아올 때까지 죽지 말고 여기 있어라!"

정여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주상을 보았다. 그리고 먼 바깥에 환영처럼 스쳐 지나가는 윤서리의 모습을 보고,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겠어요?"
정여준은 미소 지었다.
최주상이 그를 완전히 처음 보는 낯선 이로 느낄 만큼 찬란한 미소였다.
"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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