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지 공간을 사랑했다. 격자들로부터 세계의 모든 아름다움을 배웠다. 이 작고도 결속력 있는 공동체, 대를 이어 전승되는 신화들, 정교한 자연의 이치, 그리고 세계의 놀라운 구조에 관해서. 격자 사이를 걸을 때 나의 영혼은 충만했다. 내가 평생 알았던 모든 것과 앞으로 알게 될 모든 것이 전부 이곳에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떠나야 했다. - 김초엽, 인지 공간 - P217
"공동 지식을 배우기 시작하면, 우리는 동일시될 거야. 압도적인 지식 앞에서 우리의 사소한 차이는 무의미해지는 거지. 그러니까 저 애들이 저러는 것도, 아직 어려서 그래. 곧 끝날 일이야." 공동 지식은 우리가 어린 시절 간직했던 차이를, 서로의 다른 기억을 잊게 만든다. 이브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난 절대 안 잊을 거야. 이걸...... 전부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어." - 김초엽, 인지 공간 - P220
인지 공간 진입을 한 달 남기고 이브와 나는 매일 공원에서 만났다. 밤하늘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공동 지식의 크기와 범위에 대해 토론했다. 우리의 내기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밤하늘을 그렇게 오래 관찰한 건 처음이었는데, 별을 도저히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매일 뜨고 지는 두 개의 달 주위로 무수한 별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어느 날은 백 개, 그다음날은 천 개, 어떤 때에는 수천 개도 넘는 별들이 보였다. 이브와 내가 구획을 나누어 세기도 했지만 밤이 새도록 하늘을 보고 있으면 내기는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는 아직 인지 공간에 얼마나 많은 격자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논쟁이 늘 모호하게 끝나는 건 당연했다. 한편 나는 이브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 모든 순간이 좋았다. 격자가 얼마나 많은 별들을 담을 수 있는지, 그 사실 자체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해다. 결론이 어떻든 나는 언제나 이브를 만날 것이고, 우리는 계속 친구일 것이며, 매일 세계의 무한한 지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테니까. - 김초엽, 인지 공간 - P225
열일곱 살에 나는 인지 공간의 관리자가 되기로 했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 지식을 기록하고 연결망을 재배치하는 것이 관리자의 일이었다. 우리의 유기체 뇌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지만, 관리자들은 격자 정보망을 끊임없이 최적화하고 재배열함으로써 한계를 넘어 사고를 확장해나갈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나는 정확히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 김초엽, 인지 공간 - P233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가 이 공간을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말했다. 이브는 달랐다. 그애는 우리가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브가 구조물 바깥에서 무엇을 경험했는지 모른다. 구조물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재확인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이브가 그곳에서 보았던 것을 나도 보게되리라는 것. 나를 향하던 이브의 쓸쓸한 눈빛을 떠올릴 때면 나는이곳을 떠나야만 한다고 느낀다. 이브가 죽기 전 기록한 것들은 격자의 어느 곳에도 남지 않았다. 그것은 나에게만 남아 있다. - 김초엽, 인지 공간 - P218
불변하는 진리는 모두의 인지 속에서 동일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여전히 믿는다. 하지만 스피어가 정말로 분열일까? 스피어를 갖게 된 우리는 정말로 같은 격자를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할지 모른다. 공동 인지 공간을 거닐면서도 각자의 스피어를 통해 진리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더 많은 종류의 진실을 만들어내는 다른 방법일 수도 있다. 만약 이 인지 공간이 우리의 확장된 사고라면, 그 사고가 우리의개별적인 영혼에 깃들지 못할 이유는 어디 있을까? - 김초엽, 인지 공간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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