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터전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직업이다. 단지 먹고살 방편만이 아니라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 언어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중략) 일하는 나를 소개하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이력서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영어 이력서를 잘 쓰는 법’은 아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의 이력을 돌아보아야 영어로 자기소개를 다시 할 수 있게 되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다. (중략) 한국에서는 한 사람에게 하도 여러 직무를 떠맡기다 보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전부 떠올리지도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직무를 설명해보라 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너무 잡다해서" 술술 말하기 힘들다고 한다. 여기서 "잡다한 일을 한다"의 "잡다"를 버려야 한다. 다재다능한 나에게 일종의 경멸을 심는 말이다. 이 경우 "나는 여러 성격의 많은 일을 한다I do a lot of different things"라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이력서 쓸 준비는 시작된다. (중략)
응시 분야는 ‘경영 지원’인데 상품 출시 이벤트 ‘뒤치다꺼리’도 하고, 미팅 ‘수발’도 들며, 웹페이지 ‘구색’도 맞추어놓는다. 언어가 내 직무를 하찮게 만든다. 이걸 모두 제대로 된 동사로 바꾸어 자기 이름을 찾아주어야 한다. 이벤트 뒤치다꺼리가 구체적으로 뭐냐고 물어보니 이벤트 당첨된 사람에게 연락하여 당첨 내역을 알려주고 추후 경품이 잘 전달되었는지 확인하는 등의 일을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 "고객과의 소통communicate with customers"부터 "고객 보상 프로그램의 감시와 관리monitor & manage customer rewards system"까지 담당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당장 이 모든 일들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서 하거나 급여를 더 받을 수는 없다 해도 내가 이 일들을 모두 ‘하고 있는’ 사람이며 ‘여기에 기술과 지식과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누군가 똑바로 서라고 하면 나는 일단 머릿속이 마구 엉키는 것 같았다. 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리고 서라거나 손은 주먹을 쥐지 않아도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매번 설명해주면 좋을 텐데 나에게 똑바로 서라는 주문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차라리 자세를 고칠 때마다 더욱 고조되는 긴장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중략) 똑바로 서라는 지시는 나에게 혼란과 좌절을 가져다주는, 일종의 정신적 구금을 알리는 구호에 불과했다. 내 몸의 통제권이 나에게 없음을 확인시키는 한마디였다.
3차원을 즉물적으로 이해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언어를 보조 수단으로 둔 이후로 내가 세상을 보는 방법은 조금 달라졌다. (중략) 영어는 공간을 자꾸 말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위면 위고 아래면 아래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냐는 간명한 한국어와 달리 영어는 자꾸 위를 on이랬다가 over랬다가 above랬다가 헷갈리게 굴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up이 위라고 했다. 이차원의 위와 삼차원의 위를 구분하려고 들었다.
구멍 난 파스타라고 하면 대강 알아들을 수 있어야 했다. 아니 파스타에 구멍이 났으면 당연히 기다랗고 얇은 원통형의 파스타 면의 속이 비었다는 거겠지, 누가 파스타 옆면에 구멍 뚫었다고 생각하겠어? (중략) 안 된다고 했다. 그 안을 달려가고 있는 구멍이 있는 파스타pasta with a hole running through them라고 말할 거라고, 그렇게 말하면 제일 정확하다고 그랬다. (중략) 그러면 나도 세상을 좀 더 삼차원으로 봐야겠구나. "밀가루 반죽에 구멍을 뽕 내세요"라고 말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지만 "손가락을 찔러 넣어 통과시키세요"라고 말해야겠구나. 와, 미치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 미칠 것 같은 시기가 지나고 나니 권투 도장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선명함이 찾아왔다. (중략) 시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없는 우리가 가끔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를 엿보는 일이 귀신과 외계인을 목격하는 거라면, 다른 세계관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초월적인 영역일 것이다.
영어처럼 ‘미래 시제가 엄격하게 구분되는’ 언어와 ‘문법상 현재와 미래에 차이가 없는’ 언어 구사자 사이에 현격한 저축율의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중략) futured language, 즉 미래 시제를 가진 언어(영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등)의 구사자들은 저축율이 낮고, futureless language, 미래 시제를 가지지 않은 언어(북경어, 일본어, 핀란드어 등)의 구사자들은 저축율이 높았다. 한국어를 구사하는 남한의 저축 순위는? 연구 당시 76개 국가 중 저축율이 2위였다. 첸은 여기에 대해 "미래 시제를 현재와 엄격히 구분해 쓸 경우 현재와 미래가 멀리 떨어진 것으로 보는 반면, 현재 시제가 미래 시제를 대체하는 언어는 미래가 아주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에 의하면 미래 시제가 확실히 존재하는 언어권 사람들은 언어가 지배하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미래를 현재와 동떨어진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중략) 사람들이 하는 선택의 차이가 정말 문법, 즉 언어 구조의 차이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영어를 사용할 때 시제를 신중하게 고르는 것이 ‘시간을 분절해서 인식하는 수퍼파워’를 발휘하는 과정이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중략) 한국어에 위계와 분위기를 읽는 수퍼파워가 있다면, 영어에는 시간의 흐름을 항상 인지하면서 거기 점을 찍고 선을 그어 구획을 만들 수 있는 수퍼파워가 있다. (중략) "Spring has come!"을 (초월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옮길 방법이 없는 것, 혹은 "Have you been crying?"을 추가적인 정보 없이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이 예다. (중략) 그래서 한국어 사용자가 시제를 많이 가진 영어로 건너갔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현재에 머무르는 힘’이라고 본다. 실체 없는 불안에 자주 시달리거나 현재의 문제가 미래의 문제로 쉽게 비약하려고 할 때 나는 영어로 전환한다. "It will be OK. Things are going to be alright." "I’ll figure it out. I always have." 시간을 여럿으로 나누는 언어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내게 축복이었다. (중략) 나는 현재와 미래를 흐릿하게 떠도는 생각들을 붙잡아 제자리를 찾아줄 수 있었다. 현재에 확고하게 머물도록 결정할 수 있었다.
한때 유명했던 사고실험이 있다. 둘로 갈라진 레일이 있고 한쪽 레일엔 열차 오는 소리를 못 듣고 일하는 노동자가, 다른 쪽 레일에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꼼짝할 수 없게 묶여 있다. 나에게는 저만치서 달려오는 열차의 선로를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나는 어디로 레버를 당길 것인가?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한 명을 희생시킬 것인가? 한 명의 목숨은 다섯 명의 것보다 덜 소중한가?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서 우물쭈물한다면 그로 인해 결국 희생된 목숨에 나는 어떤 책임이 있는가? (중략) 이 실험에서는 피실험자들이 모국어로 질문받았을 때는 좀 더 감정적인 선택을 하고, 외국어로 질문받았을 때는 실용적인 선택을 하는 비율이 매우 높아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중략) 모국어가 우리의 감각과 인지력에 좀 더 직접적으로 호소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단어들이 감정적으로 우리와 얽혀 있고, 개인적인 기억을 불러내서 주로 쓰던 언어 습관의 트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에 반해 외국어는 말 자체가 선명히 불러오는 색채나 트라우마가 현저히 적으며 때문에 사물을 한발짝 떨어져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영어가, 한국어로 이미 구성되어버린 스스로를 재발명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너무 익숙한 말에서 스스로를 구출해 나의 새로운 면을 꺼내 쓰는 것은 때로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신나고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거 어떡해? 내일은 어떡해? 남들은 이미 다 했다던데 너는 어떡해? 안 될 것 같으니까 아예 하지 말까? 에너지도 아끼고 불필요한 실망거리를 없애자. 마음속에서 커지는 불안에 나는 남의 언어로 대답하곤 한다. 왜 안 돼? 해보고 생각하자. 길이 있겠지. 자고 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지금은 잘 먹고, 잘 자고, 아침이 되면 그건 또 새로운 날일 거야. 나는 영어로 중얼거리며, 스스로의 궁둥이를 때려 나쁜 생각을 몰아내며 양치질을 한다. 일단 한 번에 하나씩, 한 번에 하나씩이라고 끝없이 되뇌면서.
한국어는 고맥락인 해당 문화high-context culture를 아주 잘 반영하는 언어이다. 고맥락 문화란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메시지 전달보다, 암시적이며 때로는 숨겨져 있는 신호로 소통하는 문화를 말한다. (중략) 이렇게 문화와 언어는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고맥락 사회의 경우 ‘내가 대충 말해도 알아서 알아들어 주거나 심지어 말하지 않아도 메시지가 전달되길 바라는’ 경향이 강하다. 화자나 청자가 알아듣지 못해도 언어는 사정 봐주지 않는다.
한국어로는 "그게 무슨 말입니까?"라는 간단한 질문조차 시비조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중략) 내가 구어로 한국어 질문을 잘 하려면 "방금 하신 말씀이 이해가 잘 안 되어서 그런데 죄송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정도로 쓸데없는 메시지를 많이 추가한다. (중략) 이렇듯 내가 한국어 질문을 할 때면 어떻게 하면 질문 받는 사람이 ‘kibun’ 상하지 않게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질문할 타이밍을 놓치거나 아예 질문의 핵심이 비껴 가버리는 일이 잦았다. 한국어 질문이란 어째서 이렇게 하는 사람에게도, 받는 사람에게도 힘들까. 단순히 고맥락 사회여서 그렇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질문은 원래 긴장을 동반하는 발화이다. 묻는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더 집중한다. 미국 영어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에너지 소비를 한국어와 비교했을 때 영어는 매우 미미하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로 생활하면서도 속으로는 영어로 질문하곤 한다. "So what is the definition of it? What is she trying to say? WHAT DOES IT MEAN?그래서 저 개념의 정의는 무엇일까? 저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저건 어떤 의미일까?" (중략) 그러나 내 안에 질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매우 다르다. (중략) 그래서 나는, 한국어가 질문하는 길을 발견할 때까지 영어를 질문의 언어로 갖기를 권한다. 답은 스스로 해야 할지라도.
뉴욕에 처음 도착했던 일을 글로 써서 블로그에 글을 올린 이후로 많은 사람들의 메시지를 받았다. 대부분이 타지에서 외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었고, 내 경험과 외로움에 공감과 위로를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영어를 배우고 싶지만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생각이 많고 질문도 많은 그런 사람들에게 바이링구얼리즘에 대해 꼭 말해주어야 했다. 언어를 넘나들며 사는 것은 신나는 경험이라고. 우리의 서사가 다른 언어로 달라질 때 어떻게 재조립되는지, 어떻게 스스로를 재발명하게 되는지 꼭 말해주어야 했다. 나와 닮은 그 사람들을 꼭 찾아야 했다.
너무나도 추워서 귀가 윙윙 울리던 그 뉴욕의 겨울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낯선 땅에서 꽁꽁 얼어붙은 공원을 찾아내 개를 산책시키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다 괜찮을 테니 아무 염려 말라고 말해줄 것이다. 사람들에게 말을 걸라고, 도움을 요청하라고, 네 이야기를 하라고 말해줄 것이다. 질문하고 그 답을 살피고 한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모양을 잘 살피라고. 말들이 남긴 길을 따라가라고,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곧 알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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