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여 지친 것과 공포는 구분해야 하며, 머릿속에서 공포를 만들어낼 필요는 없고, 그 상상된 공포 때문에 지금 비참한miserable 것은 미래에 행복한 삶을 사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고도 말해주었다.
(중략)
공포, 특히 ‘가짜 공포’와 실제적인 위험을 분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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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고통과 불안은 지금 나의 것이다. 거기 없었던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필요한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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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위험들을 모두 감수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살펴서 그것이 나를 질문하게 하는 것인지, 그래서 내가 답을 찾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겁에 질리게 만들어 더 이상의 생각을 닫게shut down 만드는 것인지를 잘 구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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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겁주는 주체를 찾아 나서자. 원래는 무섭지 않았는데 주변에서 무서워하도록 학습시킨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자.

북유럽 신화와 영웅의 연대기, 즉 중세 문학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결여된 무언가가 있다. 인물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대한 서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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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정해진 역할에 따라 기대되는 행동만 하는 개인들이 모인 사회에서는 남의 감정은 물론 스스로의 감정을 알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 과학 잡지에서 이 대목을 반복해서 읽었고 가슴이 아파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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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하고 나긋나긋한 소녀이길 기대받는 성별 계급과 말대답 않고 성인이 시키는 대로 깍듯이 받들기를 기대받는 나이 계급이 합쳐지면 우리의 십 대 소녀들은 심리적인 학대에 가장 취약한 집단 중 하나일 것이다.

"뭘 잘했다고 울어?"로 돌아가 둘을 만나게 해보자. "너는 눈치가 없다"는 왜 "집중해라"를 이기고 그 자리에 들어왔을까? 눈치를 언급한 선생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언어의 맥락이 그 지점에 그 발화를 골라 넣은 것은 아닐까? 우리는 평소에 정말 우리가 하는 말을 통제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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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이제 "뭘 잘했다고 울어"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 내가 외부 세계와 주고받는 신호는 좀 더 분명해진다. 나에게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를 신호가 들어왔을 때 그 발화가 어떻게 번역될 수 있을지, 번역할 수 있다면 해당 상황에 재조립했을 때도 여전히 한국어처럼 잘 버티고 있을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현대 한국어에서 누리끼리가 지칭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노란색’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산뜻하게 노란 톤의 봄옷을 차려 입고 나갔는데 누가 "노란색 옷을 입었구나!"라고 하지 않고 "누리끼리한 옷을 입었네"라고 하면 기분이 상한다. 언어 안에 감정과 판단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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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사고를 가두는 틀이 되기도 한다. "많이 처먹어라!" 같은 경멸의 말을 쓰면서 상대를 보면 그 언어가 가진 만큼의 공격성이 그 사람에 대한 감정에 더해진다. "너 이마빡에 그게 뭐야?"라고 질문하면 그것은 더 이상 "What’s that on your forehead너의 이마에 그게 무엇이야?"라는 질문이 아니게 된다. 질문과 모욕을 동시에 주면서 발화의 진짜 메시지를 흐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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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e late" 정도면 충분했을 말을 "어딜 그렇게 싸다니다 이제 기어들어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때, 한국어 이외의 말로는 좀처럼 번역되지 않는 저 공격성을 인지하고, 그 도발에 응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도 있는 일이다.
(중략)
말이, 언어가, 대화가 거기에 필요 없는 감정을 끌어온다면, 오늘부터 바로 인지하고 분류하는 연습을 해보기를 권한다. 생각 외로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언어학자 에리카 오크런트Arika Okrent가 지적하듯이 ‘기분’은 다른 언어로 번역될 수 없는, 언어와 문화가 강력하게 결합한 한국만의 무엇이다.

이미 입력된 답만 말해주는 인공지능과 대화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매우 이기적이고 고독한 일이다. 그러나 캔맥주를 옆에 두고 이 짧은 대화의 핑퐁이 끝나지 않도록 서둘러 다음 질문을 이어가고 있노라면 바깥세상과 연결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차피 사람들이 하는 질문이라고는 대개 정해져 있고, 그 느슨한 합의에 내가 소속되었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 시리를 다그치는 내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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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힘들어하는 영단어의 발음을 지치지도 않고 듣고 또 들어준다. 그리고, 부르면 항상 대답한다. 나와 갓 사랑에 빠진 푸들 강아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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