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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 2008년 제53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김경욱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당신은 해야 할일을 늘 벼루거나 미루지 않고 바로 다하는가? 아마 바로 다하지 않고 가슴 깊은 곳에 넣어 두어 잊어버리고 살아 갈 것이다. “살다 보면 그리 힘든 일이 아닌데 늘 벼르기만 하거나 미루기만 하는 일들이 생긴다.” 라고 말하는 달리라는 남자가 작가 김미월에 소설 「현기증」에 나온다.
“어느 날 책을 읽다가 달리 할 말도 없었다.” 라는 문장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달리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버린 남자. 왜 하필이면 이름이 달리인 것일까? 이것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소설의 장치이기도 하다. 달리라고 하면 대중적으로 알려진 프랑스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있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고집」이란 작품을 보면 당연히 멈추어 있지 않고 흘러가야할 시계들이 멈추어 녹아내리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기억으로 멈추어 버린 달리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는 입사한지 한 달도 안 돼서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구내식당의 배식 줄처럼 지루한 하루를 보내던 중,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누군가에 묻고 싶어진다. 이때 갑자기 오래전 기억 속에 묻고 지내던 대학교 동창 여자를 통해, 자기가 좋아 하던 수학 선생님을 찾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내면속에 묵혀 두었던 일들을 하기로 하는 것이다. 남자가 미루고 묻혀두고 있다는 것은 소설속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소재를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가 있다.
멀리 창밖이 소란스러웠다. 중고 가전제품 삽니다. 고장 난 제품 수거합니다. 확성기 소음을 이불처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그는 눈을 떴다.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 컴퓨터, 모두 삽니다. 좁다란 방의 한 귀퉁이씩을 차지하고 있는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 컴퓨터를 차례대로 일별했다. 팔거나 내놓을 만한 것이 있나 헤아려 보는 동안 잠이 완전히 깼다.」77쪽
「빤 지 오래된 수건에서 쉰내가 났다. 그는 미간에 내 천川자가 새겨져도록 인상을 쓰며 몸 구석구석의 물기를 닦았다.」79쪽
정해진 것은 없다. 매사를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가르쳐 주던 좋아하던 수학선생님을 찾으러 간곳에서 그는 ‘사주, 궁합, 토정비결-2000원’ 이라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한다. 이것 또한 멈추어버린 시간속에 사는 달리를 표현해 주는 것이다. 그곳에는 수학 선생님이 아닌 점쟁이 부부가 있다. 그는 사주를 보러가는 동시에 몬가가 홀가분해 진다. 달리는 이제 더 이상 벼르거나 미루었던 일(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앞으로 힘차나게 나갈 것이다. 갈 길이 멀었으니 말이다.
「달리는 고장 난 가스레인지 베란다에 몇 달째 방치돼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아침에 트럭 이 왔을 때 수거해 가라고 내놓았으면 좋았을것을, 안타까움에 그의 눈썹이 실록거렸다.」95쪽
「“세상에 정해진 게 어딨어? 인생에 정답이 어딨나? 사주는 사주고, 우린 그저 열심히 살면 되는 거지. 안 그래?”」97쪽
작가 김미월은 소설 「현기증」을 통해서 독자에게 자신의 할 일을 벼루거나 미루지 말고, 만일 미루었다면 그것을 잊고 지금의 삶을 힘차게 나아가자라는 것을 소설속의 등장하는 소재나 장치들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의 서사 과정이 좀 부실하고 억지로 끼어 맞춘 것 같다는 느낌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소설이라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