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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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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우리도 빅브라더를 지켜볼 것이다


 

 

  

 

지난 금요일, 1주일간의 여름휴가를 마친 후 복귀 2일째되는 날. 쌓여있던 메일이며 포스트잇 등을 다시 확인하며, 내 손을 떠나갔던 일거리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업무의 긴장감이 나쁘지 않았다. 노는 것도 좋지만, 역시 무언가 일이 있다는 것은 참 다행이구나 싶었던 그날 오후. 갑자기 날아온 문자 하나가 나와 부서의 모든 산통을 깨 놓았다.

 

문자의 내용인즉슨, 다음 주 화요일부터 4일간 '동불훈련'에 참가하라는 것이다. 제목, 일시, 장소만이 아주 간결하게 적혀서 날아온 이 문자. 처음엔 잘 못 온줄 알았는데. 느낌이 좋지 않아 전화를 걸어보니 결코 이 문자는 잘 못 보낸 문자가 아니란다. '동불훈련'이란 예비군 동원 훈련 불참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30시간의 교육을 의미한다고 한다. 응? 잠깐... 이게 무슨 날벼락이지? 나는 올 해 동원 훈련에 관한 어떠한 공지도 사전에 받은 기억이 없는데, '동원 불참자'라니? 전화를 받은 병사에게 따져 물으니, 병사가 말한다. 선배님께서는 올 해 무단으로 동원 훈련에 불참하셨다고, 향방 작계도 안 받으셨고, 또 뭣도 안 받고... 분명 공지를 했는데 선배님이 응하지 않은 거라고. 이번 훈련에 정당한 사유 없이 불참하시면 그에 따른 불이익이 있을 거라며 은근슬쩍 경고까지 한다.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 병사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나는 병사에게 그러지 말고 간부를 불러달라 요청했고, 곧 전화기에 동대장이란 아저씨가 나타났다. 다시 한 번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동대장이 내게 말했다. 사실은 나의 말이 맞단다. 올 해 한 번도 동원 훈련이나, 기타 예비군 관련 훈련에 대한 공지를 준 적이 없단다. 단, 군 시절 땅굴탐지병이었던 나의 특수한 주특기번호 때문에, 어느 기수에 동원 훈련을 보내야 할지 머뭇머뭇하다가 여름이 다 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동원 불참자란다. 와서 훈련을 받으셔야 한단다. 

 

이게 뭐지? 일처리를 이상하게 해놓고서, 그냥 까라면 까라는 군대식 문화가 전역 후까지 나의 발목을 잡을지는 몰랐다. 볼멘소리 몇 마디 전화로 건넨 게 나의 화풀이의 전부다. 이 아저씨 그저 허허 웃을 뿐이다. 그래 아주 고맙다. 덕분에 추석 포함해서 3주를 쌩으로 놀게 생겼구나. 내 탓도 아니지만 월요일에 부서장에게 가서 또 휴가 좀 내야겠다고 얘기할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곤하다. 개인이 어쩔 수 없는 나라의 뜻이란다.

 

 

 

 

 

 

과연 개인이 이길 수 있는 권력이란 것이 존재할까? 해외사정은 잘 모르니까 국내 한정으로만 이야기를 해보자.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에서부터, 스무 살이 넘어서 갔던 군대, 그리고 다시 나와서 대학교, 갑과 을의 직장, 입까딱 잘못 놀리면 순식간에 빨갱이로 돌려버리는 현실 정치 속 우리 사회, 빅 브라더인지 빅 시스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표자 한 명을 위시하고 그 뒤로 똘똘 뭉쳐있는 우리나라 정치, 경제 권력의 행보들까지. 선거철이면 서로가 서로를 심판하겠다 나서지만, 결국 바뀌는 것은 민생이 아닌 권력의 왕관일 뿐이다.

 

아무튼 진짜 많다. 개인이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권력의 집합체들은 대충 꼽아도 저만큼이나 쏟아진다. 우리는 저들이 내세우는 '공통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고 있고, 그 명목 아래 통제 받고, 매 순간 검열당하고 있다. 최근 그 권위에 도전했던 자들중 기억에 남는 '승리자'의 얼굴은 한 명도 없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들은 공부, 또 공부를 외치며 자식들이 다른 방식의 헛된 노력 대신 주류사회에 동화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읽었다. 분명 소설인데 한 장, 한 장의 무게감이 아주 묵직했다. 결코 빠르게 읽어내릴 수 없었다. 이야기 자체의 즐거움보다 등장 인물 '윈스턴 스미스'의 갑갑한 하루하루의 고뇌에서 느껴지는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전달되어 왔다. 책의 마지막, 작품 해설을 읽어보면 <1984>는 분명 1948년, 스탈린 시대의 소련식 전체주의의 미래를 비판하며 썼다는데, 2014년의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나는 왜 <1984>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을까? 여기가 분명 북한은 아닌데 말이다. 소설 <1984>에서 비치는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다 타고 남은 잿빛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

 

저 무시무시한 당의 슬로건부터 매 순간 바꿔치기 되는 통계와 뉴스, 언제나 지켜보고 계시는 텔레스크린 속 빅브라더, 사상경찰과 반역자 골드스타인의 존재까지 <1984>속 통제의 장치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정말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인간의 무리가 개인으로써의 인간을 통제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 조지 오웰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실제로 교육을 통한 사상의 주입, 공포정치, 언어 및 문화의 제한 등 이 모든 요소들은 우리 인류가 역사 속에서 자행했었고, 또한 여전히 지구 곳곳에서 자행중에 있다. <1984>속에서 결국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인간' 윈스턴 스미스와 줄리아처럼 어디선가 이름모를 '마지막 시민'들도 무너져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1984>를 읽은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미래를 정확히 예견할 수 있느냐며 조지 오웰의 상상력에 감탄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되려 생각해본다. <1984>는 조지 오웰의 상상력이 빚은 근미래가 아니라, 그가 살아가던 그 시대 자체이지 않았을까? 스탈린의 전체주의만을 비꼰 것이라 생각하고 싶겠지만, 실은 그저 그 시대의 모든 권력을 담아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지금의 2014년과 <1984>가 참 많이 닮아있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인간의 본성이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그래서 역사도 수레바퀴처럼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나빠질 디스토피아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지나간 1884년, 1948년, 1974년, 1994년도 그리고 현재 2014년과 어쩌면 미래의 2024년도 결국은 다 <1984>안에 있던 것이다. 


<1984>를 읽고 나니, 장난 같던 귀요미송도 살짝 무섭게 들린다. 1 더하기 1은 귀요미, 2 더하기 2는 귀요미, 3 더하기 3은 귀요미. 귀요미, 귀요미... 참을 수가 없다. 2 더하기 2는 5다. 오브라이언이 말했다. 권력이 까라면 까는 거다. 뿐만 아니다. 권력은 세뇌에서 그치지 않고 언제나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겠다고 으름장까지 내놓는다.


"BIG BROTHER IS WATCHING YOU!" 


하지만 우리 속담에 그런 말이 있지 않던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언제 어디서나 지켜보는 빅 브라더의 눈이 꼭 시민들을 감시하는 독재자와 권력의 눈이란 법은 없다. 텔레스크린의 수보다 더 많은 우리 브라더들의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자. 그 눈을 감지 않는 한 언젠가는 우리 시대에도 정의가 찾아올 것이라 조심스레 믿어본다. 비록 나는 다음 주 동불훈련에 참가하더라도, 줄리아와 스미스의 나른한 한때를 또다시 잃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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