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그립 ( 휴대용 독서기 ) - green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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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항상 책쥔 손에 부담이 많이 가는데 이지그립은 그 점이 확실히 경감됩니다.

출퇴근시에는 확실히 도움됩니다.

다만 항상 책에 끼워둬야지 지하철 안에서 이걸 책에 끼우기는 상당히 힘들어보이네요.

손잡이 탭부분이나 플라스틱 지지대는 확실히 튼튼하지만 가장 중요한 책을 잡아주는 끈(!) 이게 좀 허술해 보이기는 합니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스치면 끊어질 것 같아보이고 만약 끊어지면 제가 보기엔 이거 무용지물 됩니다. 적어도 끈을 이중으로 해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끈을 잡아주는 조임나사도 불편합니다. 완전히 뽑아서 끈을 감은다음 끼워넣도록 되어 있는데 끈이 강도가 상당하여 잘 감기지 않습니다. 조임나사를 끼운 상태에서 돌려서 끈을 감을 수 있도록 개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몇 가지 불편한 점은 있지만...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많이 활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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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덫
장하준 지음 / 부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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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 요약

이 책은 IMF 이후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경제‘개혁’에 대해 날카로운 매스를 들이대는 책이다. 1997년 12월 미증유의 550억 달러 대기차관협정을 맺은 한국과 IMF, 그 이후 한국에서는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성장성과는 부정되었고 이전의 체제와는 분명히 다른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가 해결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1960년대부터 무려 30년 이상 연평균 성장률을 10% 가까이 지탱해온 구체제는 마치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앙시엥 레짐과 같이 걸림돌 내지는 ‘타파해야 할 어떤 것’ 취급을 받게 되었으며 과거의 성과는 ‘정경유착, 부패, 국가의 과도한 개입’만을 낳은 것으로 한순간에 매도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급격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강한 의문을 품는다. 과연 우리의 과거는 부정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연평균 10%의 성장은 결국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의 산물에 불과했는가? 그 산물이었더라도 이는 세계경제사에서 다시 보기 힘든 성과는 아니었는가? 한국의 재벌체제가 비록 과도한 경제력 집중으로 경제위기의 뇌관구실을 했다지만 이를 쉽게 해체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를 야기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어려운 문제들이 한국에서는 IMF 이후 불과 1,2년 남짓만에 결정되었다. 경제위기와 이로 인한 정치지도력의 실종은 30년 넘게 한국에서 공고한 지배력을 갖고 있던 개발국가의 신화를 손쉽게 끝장내었다. 국가의 지도와 개입은 ‘경제 발목잡기’라는 비판을 넘어 ‘헌법’에 보장된 ‘사유재산권의 침해’라고까지 주장하는 사태마저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과연 한국이 외환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경제개혁’의 실체라고 보아야 하는지는 너무나도 의문스럽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깨달았다면 더 이상의 전진기어는 사고만을 초래할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저자는 이러한 문제에 천착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현안을 중심으로 한국사회가 빠져들고 있는 ‘개혁’이라는 이름의 덫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상세 요약


미국식 개혁만이 대안인가?


 외환위기 이후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수퍼파워는 의심의 여지없이 미국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외환위기 이후 극복과정에서 미국의 위상은 더욱 높아져만 갔다. 정치적으로는 미국의 영향력이 강했지만 경제환경이나 정치, 행정적 환경에서는 일본이나 독일과 유사했던 것이 불과 5년이 되지 않아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미국식 금융자본화, 주주우선 자본주의, 이른바 창의적 기업가 정신 등등 우리가 우상으로 모시는 것은 미국적인 것들로 넘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이제 미국은 표준으로 작동하며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충분한가? 모든 이론이 그러하듯 이는 검증을 거친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1980년대 미국은 신자유주의 기치를 높이들고 금융과 사회보장제도, 고용안정분야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1930년대 대공황시대에 제정된 독점금지법과 글래스-스티걸 법(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엄격한 분리)으로 대표되는 경제집중 방지정책은 점차 허물어지면서 기업간 인수합병이 촉진되었고 자본의 금융화가 더욱 강화되었다. 1960년대 린든 존슨 대통령 시절 기반을 닦아놓은 각종 사회보장제도(대표적으로 미혼모 보조금지급)는 ‘자립노력에 따르는 지원’이라는 목적 하에 축소 편성되었다. 노동분야에서는 정리해고제의 도입, 노동조합운동의 영역제한, 비정규직의 확산 등이 강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과 미국의 이면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후진성이 자리잡고 있다.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마약이나 총기 문제를 차지하더라도 미국은 일반 노동자와 최고경영진의 임금격차가 세계 최대이며 선진국가 가운데 4대 보험의 사회화를 이루지 못한 유일한 국가이다. 빈곤층이 공식통계로도 전인구의 10%에 육박하고 있으며 문맹률 또한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높다.

 이러한 미국식 표준이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가? 장점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미국식의 장점은 단점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기업간 인수합병은 정리해고를 필요로 하고 사회보장제도의 ‘개혁’은 당연히 지원대상과 규모를 축소하게 된다. 스톡옵션 제도가 일반 근로자와 최고경영자간의 임금격차 확대를 조장하게 됨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이제 미국식 기준을 적용하는 데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기업의 기술혁신이나 가치창출, 고용증대에는 관심없이 오로지 한탕에만 관심있는 노회한 기업사냥꾼들로 인해 중견기업, 선진기업 할 것없이 비틀거리고 있다. 신규투자가 결국 이들 사냥꾼들의 배만 불려줄 것이 명백하다면 무엇하러 투자를 하는가? 오히려 현찰을 움켜쥐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보장제도 마찬가지다. 절대적으로 사회보장제도가 미비한 현실을 백이면 백 모두가 동의하는 현실에서 수혜자 ‘개인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할 것을 역설한다면 이보다 더 우스운 꼴이 있겠는가?

 한번 도입된 제도는 어지간해서 이를 바꿀 수 없다. 더 이상 늦기 전에 우리 사회에 자리잡은 미국식 제도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와 사회적 합의를 다시 이뤄야 한다.


 기업개혁과 제조업

 IMF 이후로 제조업에 대한 사회 전반의 시각은 극적으로 변화하였다. 1990년대 중반까지 정부 경제정책의 1차 타겟이었던 제조업은 이제 모든 산업영역 가운데 하나만을 차지하는 정도로 지위가 하락하였다.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으로 철강, 전자, 조선 등 6개 산업에 대한 육성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가히 특혜라 할 정도의 지원을 하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정책의 폐기와 제조업에 대한 관점변화는 너무 이른 감이 없지 않고 이른바 글로벌 기준에서 봐서도 어불성설이다. 일본은 1960년대에 이미 2차 대전 이전의 경제수준을 회복하고 선진국 대열로 합류하였지만 80년대까지 산업정책을 꾸준히 이어나갔고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도 80년대까지 산업정책을 유지하였던 것을 볼 때 우리나라가 현 시점에서 산업정책을 폐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IMF 후에 정부는 산업붕괴와 경쟁력 저하를 막기 위해 바이오나 나노와 같은 신산업영역을 개척하고 이에 필요한 각종 기술개발 정책을 시행해왔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런 한편으로 산업정책의 불필요성이나 불개입을 천명한다는 것은 오히려 정책의 혼선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아울러 산업정책의 폐기와 더불어 시행되는 기업개혁과 재벌개혁 방안은 그 시야의 편협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선 IMF 이후 기업의 생사를 결정했던 이른바 부채비율을 보자. 자기자본 대비 유입부채를 비교하는 이 지표가 기업의 생사를 결정해야만 한다고 볼 근거는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1980년대 선진국이었던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같은 국가도 한국만큼이나 부채비율이 높았다. 또 이러한 부채는 대체로 은행을 통해 조달되므로 자연스럽게 은행을 통한 기업의 통제도 가능해지게 되는데 은행을 통한 기업통제는 주주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장기적 투자관점에서 기업경영을 판단할 수 있다는 장점도 갖고 있다.

 또 이른바 문어발이라고 비난받은 다각화와 내부거래에 대하여도 좀더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주식투자에서도 소위 포트폴리오라는 위험분산방법이 존재하는데 기업경영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삼성은 전자, 현대는 자동차라는 식으로 전문화를 해야했다고 말한다면 이는 과거의 환경을 모두 무시하는 발언이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이후 과연 이러한 분야에서 최종재만을 생산하는 것이 그 당시 기업의 기술이나 금융수준에서(지금도 그렇다) 가능했었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 할 것인가? 내부금융에 대해서도 중소기업의 영역을 침해했다고 하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이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무엇보다 한국의 기업 특히 재벌집단이 80년대 이후 내부자거래를 강화한 것은 기업내부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것이었지 이를 통해 특정집단이 특정적인 지대를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드라이브를 건 다각화 해소와 내부거래 처벌이라는 정책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회적 효용이 창출되었는가도 불분명하다. 반도체산업과 자동차, 철도차량, 전력설비 등 각 제조업분야에서 80년대 초반의 산업합리화정책을 방불케 하는 산업집중이 이루어졌지만 하이닉스와 대우자동차의 사례에서 보듯이 일부 분야에서는 분명히 실패하였다. 다각화와 내부거래가 반드시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자체를 죄악시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정책의 선택범위를 훨씬 더 좁혀놓는 결과만을 낳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 기업들이 직면한 것은 하루하루의 성과에 일희일비하는, 변덕이 죽끓듯하는 ‘주주 자본주의’가 되었다. 하루, 1개월, 분기 성적에만 연연하는 주주를 대상으로 회임기간이 5년이 넘어가는 신규 사업영역에 대한 투자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가? 단기손실을 이유로 주식을 처분해버린다면 순식간에 발생하는 각종 금융비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러한 경향을 적절히 차단하고 신산업영역의 개척을 암묵적으로 보증해주는 정부의 산업정책이 없다면 기업은 어떻게 버텨나갈 것인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경제가 나아가야 할 길

 한국경제는 지금 위기이다. 그리고 이 위기는 과거와는 다르다. 70년대와 80년대 들이닥쳤던 위기는 기업과 정부, 근로자 3자 모두에게 위기였지만 지금은 정부와 근로자에게만 불리하다. 기업은 ‘투자’를 무기로 정부를 협박해 그와 관련없는 특혜를 얻어낼 수 있고 ‘경영지배권 보장’을 목적으로 근로자를 배제할 수도 있다. 과거에 3자 연합, 적어도 정부가 독립적인 제3자적 지위에서 갈등조절을 해나갔던 것에 비하면 지금의 환경은 기업을 제외한 양자에게는 너무나도 불리한 상황이다.

 기업과 자본 일변도로 유리한 상황은 결국 정부와 근로자를 약자로 만들게 되는데 정부와 자본은 속성상 결국 융합하게 되거나 자본이 정부를 여러 가지 지대를 동원해 포섭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근로자만이 약자로 되어 사회적 불안요소는 극대화되고 자본에 포섭된 정부는 이를 조절하지 못함으로써 자칫 80년대 말을 능가하는 사회불안이 폭발할 가능성이 점차로 커지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3자 대타협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 정부가 노동과 자본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다시 획득하고 정치과정을 통해 이에 절차적․실질적 당위성을 부여해야 한다. 노동과 자본은 각자 지지하는 정당을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정치과정에 반영할 수 있으며 정부는 결정사항을 예외없이 집행함으로써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먼 나라 얘기일 수도 있지만 북유럽의 네덜란드가 이를 통해 성공적으로 경제위기를 탈출했음을 인식해야 하며, 자본일변도의 구조조정만을 취했던 80년대 말 대처정부 하의 영국이 지금은 유럽에서 2류 나아가 3류 국가로 밀려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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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구조불황과 일본 정치경제시스템의 변화
진창수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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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일본경제의 불황기가 어느덧 끝이 보인다고 합니다. 1990년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일본이 어떻게 쓰러졌는지,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하는 것은 2005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중소기업의 혁신을 모토로 하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이 있어보이는 책이니 꼭 한번씩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장면 1

 1989년에 일본 소니사는 컬럼비아 영화사를, 미츠비시는 록펠러 센터 빌딩을 사들였다. 하버드 대학의 에즈라 보겔 교수의 저서 “Japan as No.1", 이시하라 신타로(현 동경도 지사)와 모리타 아키오(당시 소니 회장)의 공저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은 미일 양국에서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다.

 소니와 AIWA, Panasonic 카세트는 중고등학생의 영원한 로망이었다. 국산 제품은 무언가 뒤처지고 후줄근한 인상이었고 그걸 쓰려면 약간의 용기(?) 비슷한 것도 필요했다. 삼성과 금성은 일제 하청기업 처지였고, 사람들은 미제 무기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거 뜯어보면 “일제” 전자부품이 90% 넘는다며, 팍스 아메리카는 가고 팍스 자포니카의 새시대가 도래할 거라며 모두들 얘기했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장면 2

 2004년에 삼성의 시가총액은 소니를 넘어섰고 이데이 노부유키 소니 회장은 사상 최초로 외국인 CEO를 영입하면서 경영일선에서 은퇴했다. 일본경제의 최전성기에 거짓말처럼 불황은 시작되었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잃어버린 10년’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경박단소로 상징되는 일본 전자제품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소니와 아이와의 로망은 이미 오래전에 삼성 휴대폰과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에 자리를 내주었다. 일본제품? 글쎄... 디지털 카메라 정도...?


거품호황과 불황의 시작

1985년 당시 일본의 천문학적 무역흑자로 무역마찰이 심화되자 서방선진 5개국 재무장관들은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엔화와 마르크화의 평가절상’을 골자로 하는 합의(플라자 합의)에 도달했다. 엔화는 달러당 238엔에서 약 1년 반만에 120엔대까지 치솟게 되면서, 이것이 불러올 불황을(엔고불황) 우려한 일본은행은 팽창적인 통화정책, 즉 재할인율 인하와 본원통화 공급 증가로 대응하였다. 이 결과 막대한 신용팽창이 발생, 부동산과 주택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결과 1990년 전국 지가총액은 1985년의 2.3배로 증가하였고, 니케이(NIKKEI) 주가지수는 3만8천엔까지 급등하게 되었다.

 1990년에 들어서 비정상적 거품호황을 우려한 일본은행과 대장성이 은행의 신용공여 축소, 금리인상으로 대응하면서 마치 풍선에 바늘을 갖다댄 듯 갑작스러운 경제붕괴가 시작되었다. 거품붕괴는 맨 처음 부동산과 관련된 3업종(부동산투자, 주택, 제2금융권)에서 시작되면서 “토지가격 거품 붕괴→담보가치 하락→부실채권 발생 및 대출축소→제2금융권 붕괴→제1금융권과의 합병→합병은행의 불안 증대”와 같은 수순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면교사 - 정책 대응의 실패

 1992년부터 부실채권을 견디지 못한 금융기관의 도산이 실체화되었다. 1992년 伊予銀行과 東洋信金이, 1994년에는 東京協和信用組合과 安全信用組合이 각각 도산하였다. 1994년의 경우 대장성이 양대 조합의 사업을 모두 양도받는 동경공동은행을 설립하고 이에 출자까지 하는 형태로 사건을 수습했지만 어디까지나 한국의 IMF 이후 대응책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것이었다.

 1995년부터는 파산규모도 커지기 시작했다. 코스모신용조합은 2,500억엔의 부실채권으로 도산했고, 木津信用組合도 예상액보다 훨씬 큰 불량채권을 안고 쓰러졌다. 예금보험공사는 목진신용조합의 해결에만 1조 3천억엔의 자금지원을 해야만 했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훨씬 더 강력한 금융시장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본 대장성과 정치인들은 기회를 잘 이용하지 못하였다. 대장성은 부실기관을 가급적이면 제1금융권의 우량은행으로 합병시키는 방안을 선호했고, 정치인들은 아직까지 가시화되지 않은 미래의 금융불안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을 근시안적으로만 보고 반대했다. 일부 정치인들은 “잃어버린 10년”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단지 자신감의 결여가 그러한 ‘신기루’를 조장하고 있다는 허황된 발언조차 서슴지 않았다. 1992년부터 나타난 주택금융회사의 해결과정에서도 대장성은 무려 4년을 허비하고 난 뒤에야 공적자금 투입없이 7조 5천억엔의 불량채권을 포기하도록 은행업계를 설득시키는 안을 마련했지만 금융권에서 이러한 해결책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그나마도 정계내부의 공방전과 대장성의 내분으로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다. 국내 일각에서 금융개혁이 급선무라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경기부양이 오면 부실채권은 자연히 해결된다”는 식의 근시안적 논리가 난무하면서 1992년 미야자와 내각 이후 112조 6천억엔에 달하는 재정정책이 집행되었으며, 16조 9천억엔에 달하는 감세정책도 더불어 시행되었다. 이에 필요한 자금 대부분이 국채로 충당되어 재정구조가 급격히 악화되었음은 물론이다.

 약 6년간의 기간을 허송세월한 후 1997년부터는 금융공황이라 부를 만한 상황이 도래했다. 97년과 98년 2년 동안 58개의 금융기관이 도산하였으며 여기에는 북해도척식은행, 야마이치증권, 일본채권신용은행 등 쟁쟁한 금융기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1998년에 가서야 일련의 금융개혁법안을 마련하고 금융감독청을 발족시킴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지만 이는 시기상 너무나도 늦은 것이었다.

 공황상태에서 금융긴축을 통한 조기부실정리를 선호한 한국과 달리, 일본은 이처럼 경기불황 타개를 위한 재정정책을 선호한 결과 2001년 현재 국채 및 지방채 잔액은 693조원, GDP의 135%에 달하면서 유수의 국제신용평가회사들이 신용등급을 속속 낮추고 있다. 이 뿐 아니라 노령인구 급증으로 인한 사회복지비용 지출은 재정적자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데 15세 미만보다 65세 이상 인구가 많은 현상황에서 2010년 이후 재정이 건전화될 가능성은 낮으며, 그나마도 ‘92년 이후 집행된 수 차례의 이른바 “재정출동”이 모두 실패하였다는 사실은 그 정책효율성조차 낮다는 점을 암시한다.


불안한 미래


 고이즈미 내각은 이러한 재정적자 문제를 중시하여 각종 구조개혁 정책을 내세우면서 2001년 4월 취임하였다. 성청 산하에서 공공사업을 전개하는 86개의 ‘특수법인’ 개혁 및 우정사업 민영화, 6개 부문의 산업경쟁력 강화 및 환경과 IT를 포함하는 4개 신산업 창출 등 혁신적이고 강력한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단, 성과가 있는가는 아직 불확실한데, 무엇보다 겨우 3년 남짓한 기간이 문제이고 또 최근의 “보통국가화(군사대국화)” 경향이 이러한 개혁정책을 좌초시킬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마지막 장의 저자인 박영준(국방대학원)은 “일본 경제위기의 전개과정 비교”에서 현 상황의 경우 대부분의 주요인사들이 군국주의 노선은 일본의 국익에 해가 될 것이라는 합의를 이루고 있다고 가정하면서 1930년대와 같은 군국주의의 발호는 다시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으나, 독도와 교과서 문제로 한일간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현시점에서는 다소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본의 대응과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산업화 이후 일본은 한국의 ‘미래를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았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외환관리법과 재정투융자, 주거래은행(메인뱅크) 등의 정책도구들은 그 개념뿐 아니라 명칭까지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한국은 이러한 일본의 전략을 단순히 따라잡는 것(Catch-Up)만으로도 중진국 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고 일본은 한국으로의 기술 및 설비이전을 통해 분업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상호이익을 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는 이러한 발전궤적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다. ‘잃어버린 10년’은 결국 일본형 발전모델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고 ‘IMF 공황’역시 한국형 발전모델의 종말을 드러낸 것이다. 다만,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대선과정에 걸친 민주적 개혁을 완수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경제개혁에도 성공한 한국과 달리, 일본은 지금 1995년의 무라야마 총리시절의 사죄담화에서도 후퇴하는 퇴행적인 정치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결국 이러한 정치퇴행이 경제개혁의 발목을 잡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 더 이상 한국의 거울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을 따라잡아야 할지도 모를 현 시점에서, 일본경제 발전의 명암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분석해낸 이 책을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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