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을 위한 교육> 교육의 본질은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와 연결되는 것, 그것이 교육의 가장 중요한 기능입니다.
음악은 시간 의식을 함양하는 것입니다. 시간에 대한 풍부한 의식이 없는 사람은 음악을 감상할 수 없습니다. 악기 연주도 감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음악은 ‘이미 사라져버린 소리‘가 아직 들리고 ‘아직 들리지 않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 과거와 미래의 확장 속에자신을 두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양교육은 요컨대 의사소통 훈련입니다. 그것도 뭔가 잘 모르는 것과의 의사소통, 공통의 용어나 도량형이 없는 자와의 의사소통 훈련이지요. 그렇죠. 의례와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관계 맺는 기법입니다.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 경우 언어와 수치 같은 인간적 척도는 쓸 수없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별생각 없이 사용하는 인간적 용어와 인간적 척도를 사용할 수 없는 조건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의사소통을 하는 훈련이 교양교육의 진짜 목적 아닌가 싶습니다.
전공교육은 내부 사람만의 파티를 의미합니다. 전문용어로 대화가 되는 장소, 혹은 ‘통하는 걸로 되어 있는 장소입니다.
전문 지식만 공부하면, ‘능력 있는 전문가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어떤 전문가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배출될 뿐입니다. 교양교육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자각을 기초로,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모를 때 그럴수록 더욱 적절하게 행동하는 방식‘을 익히는 훈련이 바로 교양교육입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제대로 파악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연결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저는 앞에서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의 구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본 교육에 가장 결여되어 있는 것은 타자와 소통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일본의 교육문제는 어쩌면 전부 이 하나에 집약될지도 모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경쟁을 강화해도 학력은 올라가지 않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일본처럼 닫힌 상황, 한정된 구성원들 사이의 실험쥐경주에서 우열을 정하는 한, 학력은 올라가지 않습니다. 떨어질 따름입니다. 학력을 올리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있는 곳과는 다른 장소, 바깥과의 관계 맺기가 필수적입니다. 〈황야의 7인〉에서는 산적이, 〈대탈주)에서는 독일군 간수가 주인공들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진지하게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 결함을 메우지 않으면 ‘바깥‘을 상대로 한 프로젝트 산적 퇴치, 포로수용소 탈주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맡아줄 친구에겐 깊은 경의를 표시하고 가능한 한 지원하 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본래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가르쳐야 할 것은 이런 것입니다. 어떻게서로를 도울까, 어떻게 서로 지원할까, 어떻게 혼자서는 결코 달성할수 없는 큰일을 함께 달성할까, 우선 이를 위해 필요한 인간적 능력을키우는 데 교육 자원을 집중시켜야겠지요.
<갈등하게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교사>
좋은 교사를 키우기만 하면 좋은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생각 그 자체가저는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교사가 옳은 교육법으로 교육하면, 는 아이들은 점점 성숙해진다는 생각이, 인간을 너무 얕게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사는 그 시대의 지배적 가치관과 어긋나는 생각을 하는 사람 이 되는 것 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이것으로 됐어‘ ‘지금 일본은 이상적인 사회야‘ 하고생각하는 사람은 구조적으로 교단 위에 설 수 없습니다. 사춘기에 세상은 좀더 공정하고 좀더 평등하고 좀더 평화로운 곳이 되어야 한다‘는는 생각을 품었던 청년들이 교단에 서게 됩니다. 이것은 초등교육에서는이상적인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초등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이 우러러보는 교사 중에 그 시대의 사회 시스템에 만족한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집은 가난하고 부모는 이해력이 부족해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도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당시 초등학교 교사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확신이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그런 아이들을 발견하고 용기를 북돋워주고 지원하는 데 꽤 열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가 돕는 아이들이 자신의 분신으로 보였을테니까요.
아이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서 배워야 하는 것은 깔끔한, 모순 없는 사회의 매끄러운 성립이 아니라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순된 사회의 모순된 성립에 대한 넓은 포용력과 거친 통찰입니다. 그러므로 교사 자신이 모순된 존재라는 것은 교육적으로는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승리와 패배의 경쟁구조에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아이들이 성공과승리를 거두도록 자극하는 선생, 약자나 패자에게 깊이 공감하면서도 강자나 승자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잊지 않는 선생, 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동의하지도 않고 완전히 반대하는 것도 아닌, 그 안에서 분열되어가는 선생, 그래서 종종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 선생, 그런 선생이 좋은 선생입니다.
교사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교육이 기능하는 데 별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교사와 아이들의 ‘관계‘이고, 그 관계가 성립하기만 하면 아이들은 배워야 할 것을 스스로 배우 고, 성숙으로 향하는 길을 스스로 걸어갑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교단 위에 누가 서더라도 관계없다는 뜻입니다.
아이를 과보호하며 키우는 부모와 갈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는 그냥 놔두면 된다고 생각하는 선생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아이를방임하며 기본적인 돌봄조차 하지 않는 부모와 갈등하게 하려면 아이에게는 지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선생이 필요합니다. 아이를 경쟁에서 살아남게 하고 상위 계층에 오르게 하려는 부모와 갈등하게 하려면 인간의 가치는 돈과 지위로 잴 수 없다고 믿는 선 생이 좋습니다. 여러 유형의 부모가 있듯이 여러 유형의 선생이 있습니 다.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부모의 대립항이 되어야 하는 아저씨, 아주머니의 유형이 전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상적인 교사상‘이라는 담론에 기초하여 교사를 단일한 이미지로 한정 지으려고 하는 것은 완전히 난센스입니다.
<춤춰라, 계속 춤춰라>
교사 자신이 배움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배우는 방법은 지금 배우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지금 이 순간도 계속 배우고 있는 배움의 당사자가 아니라면 아이들은 배우는 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배움을 통해 배우는 자를 성숙시키는 것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지적콘텐츠가 아니라, 나에게 스승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내 외부에 나를 훨씬 초월한 지적 경위가 존재한다고 믿음으로써 사람은 자신의 지적 한계를 넘어섭니다. 배움은 바로 이 돌파를 의미합니다. 돌파는 자신이 설정한 한계를 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자신이 설정한 한계를 넘는 것입니다. 한계는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 것처럼 나의 외부에 있어서 나의 자유와 잠재적 가능성의 발현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계를 만들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이런 일은 나는 할 수 없다‘는 자기평가가 우리 자신의 한계를 결정합니다. 이런 자기평가는 겸손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기평가의 객관성을 꽤높게 설정하는 겁니다. 자신이 자신을 보는 눈은 타인이 자신을 보는눈보다 훨씬 정확하다고 전제하는 사람만이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나 고 말합니다.
자신이 있는 세계와는 다른 곳에 예지의 경위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만 하면 배움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그 다음은 스스로 배웁니다. 거듭 말합니다만 인간은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만 배웁니다. 자신이 배울 수 있는 것만 배웁니다. 또 자신이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만 배웁니다. 그러므로 교사의 일은 배움이 일어나게 하는 것, 그뿐입니다. ‘외부의지에 대한 욕망을 기동시키는 것, 그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교사 자신이 외부의지에 대한 격한 욕망에 불타올라야 합니다.
<이지메에 대한 다른 이해>
학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아이들이 더불어 사는 기술을 익히기도 전에어서 빨리 원자화 · 모래화 · 개별화 하라는압력을 행사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파도를 막는 방파제가 되는 것입니다.
몇 번이나 말씀드린 것처럼 학교는 아이들을 바깥 세계로부터 격리해서 보호하는 것을 그 본질적인 책무로 삼아야 합니다. 학교와 바깥 세계 사이의 벽, 즉 아이들을 바깥으로부터 지키는 벽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학교는 본질적으로 ‘온실‘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세상은 어차피 욕망으로 점철된 곳’임을 가르쳐주는 것이 외부와의 회로를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부모와 주위 어른, 대중매체가 선전하는 세속의 가치관과는 다른 문법으로 만들어지고, 다른 측정법으로 잴 수 있는 예지智의 경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육의 첫 번째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교육이 무너진 것은 학교와 사회를 격리해온 이 ‘벽’이 붕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교사도 부모도 교육행정도 그리고 아이들도 모두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신봉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일부는 스스로 알아서, 일부는 싫다고 고개를 흔들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학교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온도차가 거의 없어져 버렸습니다.
지금의 아이들은 ‘집단 형성하기’와 ‘개체로서 홀로 있기’라는 두 가지 요청을 동시에 받아들여서 깊은 혼란 상태에 놓인 것이 이지메라는 병적 상황의 바탕에 있지 않을까생각합니다.
어린아이들을 그냥 두면 반드시 어느샌가 가까이 와서 똑같은 도구를 상대방 신체에 갖다 대며 놀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집단 형성이 자아의 확대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개성적으로 돼라고 하는건 그 다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개성적으로 키우는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전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겁니 다. 바로 다른 사람과 하나의 공共신체를 나누어 갖는 경험입니다. 아이들은 공共신체 형성으로 자신이 ‘큰 네트워크 안의 하나의결정전 이라는 감각을 익힙니다. 개성이 출현하는 것은 그 뒤입니다. 네트간에서 어떤 행동을 하면 네트워크의 운동과 기능이 변화합니다. 자기가 던진 돌멩이 한 개가 네트워크를 움직이는 것입니다.그런 경험을 쌀 아감으로써 아이들은 집단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됩니다.
지금의 교육 현장에서는 아이들에게 집단 형성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혹은 그보다 빨리 ‘개성의 발현‘이라는 과제가 부과됩니다. 또래친구들과 먼저 집단을 형성하고 그들과 호흡을 맞추고 감각을 공유하고 하나의 공共신체를 만들어내는 데 전념해야 한 시기에 오히려 ‘집단을 만들지 마라, 멍청하게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지 마라, 개별화 해라, 자신만의 태그를 만들어 붙여라, 자신이 받아야 할보상을 타인과 나누지 마라‘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인사 규칙이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침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당황스럽습니다. 눈에 띄는 개체는 이지메 대상이 되고, 반대로 무개성적인 개체 역시 이지메 대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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