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 달 동안 방치해 놓았던 우치다 타치루의 책이 나를 유쾌함과 즐거움으로 춤추게 한다.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는 시원한 책!

저는 선생님들이 용기와 힘을 얻는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아무리생각해봐도,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는 교실에서 아이들을 앞에 두고 있는 교사들 말고는 없습니다. "선생은 더 이상 안 돼, 그들이 교육을 개혁한다고?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어!" 하고 말하는 사람이 만약 진심으로 교육을 개혁하고 싶다면, 무능한 교사들을 밀어제치고 "비켜! 내가 대신 가르칠 테니까. 내가 하는 걸 보라구"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아닌 한 설득력 있는 대안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육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교실에서 아이들 앞에 서는 교사들외에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실제로 교단에 서 있는 선생님들이 용기와 힘을 갖고 창의적인 생각을 할 의욕이 솟아나고, 생각한 대로 잘 되지않아도 낙담하지 않을, 그런 힘을 주는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정치인과 언론, 교육 관료들은 제발 부탁이니 교육은 현장에 맡기고 그냥 내버려두시라!" 이것이 이 책에서 강조하는 제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냥 내버려두는 것만으로 교육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을 만큼 낙천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둠으로써 최소한 교육이 더 나빠지는 것은 막을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있습니다.
<교육을 바꿔야 할 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들> • 교육제도는 타성이 강한 제도여서 쉽게 바꿀 수 없다. • 교육에 관한 논의는 (제가 제기한 논의도 포함해서) 과도하게 단정적이고 독선적으로 되기 십상이다. •교육제도는 일시정지시킨 상태에서 근본적인 보수를 할 수 없다•제도의 하자는 지금 눈앞에 있는 ‘하자 있는 제도‘를 통해서 바로잡을수밖에 없다. • 교육개혁은 교사들이 담당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비판과 검열, 통제를 받으면서 성취도가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지지받거나 용기를 얻고 자유로워짐으로써 그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다.
<교육은 바지니스가 아니다> ‘학교재정을 흑자로 만들기 위해서 어떤 교육을 하면 될까?‘ 생각하는 것과 우리들이 하고 싶은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재무 상태를 어떻게 개선시켜야 할까?‘ 생각하는 것은, 얼핏 비슷해 보여도 그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즉, 학교제도는 투여한 것과 다른 형태로 그 결과가 ‘언젠가‘ 돌아오는 그런 제도입니다. 오리지 비즈니스 마인드만 있는 사람은 이런 호흡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을겁니다. 교육에도 시장 원리, 경쟁 원리를 도입하자‘ ‘경영을 게을리하는 학교는 시장에서 도태되어 퇴출당해야 한다. 그것이 공정한 것이다‘ 같은 생각들은 매우 명확하고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교육과 비즈니스가 다루고 있는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비즈니스는 무無시간 모델입니다만 교육은 그렇지 않습니다.
<배움은 쇼핑이 아니다> 배움은 이륙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나는 이런 인간이다. 이런 것은할 수 있고 저런 것은 할 수 없다‘ 식으로 규정했던 틀을이탈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뛰어넘은 시좌에서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요. 즉, 자기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때까지 몰랐던 언어를 습득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유비쿼터스 대학 구상은 상품 거래의 원칙으로 배움을 포착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유비쿼터스 교육론자는 카탈로그를 보고 클릭 몇 번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에서 흥미로운 과목을 누구의 개입이나 의논 없이 백 퍼센트 자기관리하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자유‘야말로 인간을 구하는 것이라 믿고 있는 것같습니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라서, 영원히 자기모습 그대로 있고 싶어서 너무 좋아하는 자신‘을 외형적으로 좀더 가꾸어주는 것, 자신의 잣대로 그 가치를 잴 수 있는 것 - 지식, 기술, 자격, 신분, 연봉, 사회적 위신 등을 희구하고 있다는 것이 유비쿼터스대학 구상의 기초에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입니다. 물론 그런 인간에 대한 이해를 나는 굳이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사람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유감입니다만 그런사람은 결국 ‘배움과는 인연이 없다는 것은 말해두고 싶습니다.
대학 교수가 연구나 교육을위해서도 아니고 대학 운영을 위해서도 아닌, 단지 학위 공장과 질 보증을 세트로 수입한 행정이 저지른 과오를 뒤치다꺼리 하느라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 것입니다. 저는 일본 전역에 있는 대학 교수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립대학 교수 중에는 대학 설립 기준의 완화, 교양과정의 개편, 학부 재편, 법인화와 관련해서 지난 수십 년 동안 문부성에 제출할 보고서만 계속 써왔기 때문에 그동안 전공연구를 거의 할 수 없었다는 사람이 몇천, 몇만 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끝이 보이지 않는 작업에 동원되는 사람은 어느 대학이든 젊고 일 처리가 빠르며 요령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귀찮은 일은 결국 그런 사람에게 배당됩니다. 그들이그런 보고서를 쓰지 않고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을 때 얼마만큼의 업적을 내놓을 수 있었겠는가를 상상하면, 저는 그 헛된 노력에 깊은 허탈감을 느낍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가활동으로 일본의 고등교육이 잃어버린, 그리고 지금도 잃어버리고 있는 지적 자산이 얼마만큼인지 문부성은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겁니다. 문부성은 늘 평가 비용을 ‘0‘으로 산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장을 조금만 살피면 평가 비용이 얼토당토않게 많이 든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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