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사람 진광화와 밀양 사람 윤세주가 중국 대륙 깊숙이 태항산 골짜기에 묻혔다. 해 질 무렵이었다. 정숙은 간밤에 비 뿌리고 진한 핏빛으로 젖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몸이 땅에 묻히면 영혼은 노을에 묻히는가. 이곳에서 세주의 고향은 너무 멀구나, 그의 노모는 이 시각에 무얼 하고 있을까. 밭에서 호미질하다가 잠시허리를 펴고 서쪽으로 지는 해를 보고 있으려나.
철이 들었을 때 조선은 식민지였고 그것은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문제이고 모순이며 바꾸거나 선택할 수 있다고 했을때 공산주의는 얼마나 위대해 보였던가. 하지만 해방운동 하네 계급운동 하네 하면서도 무의식에는 천황은 전지전능이고 일본은 천하무적이고 식민지는 조선의 운명이라는 열패감이 깔려 있었던모양이다. 일본 항복이라는 뉴스의 충격을 소화하는 데 한나절은 너무 짧았다.
대낮처럼 환하게 횃불을 밝힌 혁명군정학교 운동장에서 독립동맹의 김두봉 주석은 단상에 올라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마침내 우리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가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원수를 우리 손으로 무찌르지 못해서 온몸과 온정신으로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이 슬프다고 말했을 때 장내는 숙연해졌다. 정숙 역시 비슷한 감상이었다. 해방감 한편으로 허탈함이 밀려왔다. 그녀 자신도 지난 10년 동안 중국에 나와 악전고투했고 수백 수천만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총칼 아니면 곳간에서 녹슨 쇠스랑이라도 들고 나와 죽기 살기로 싸웠는데도 끄떡 않던 일본이 미제 핵폭탄 두 방에 끝장났다는 게 허탈했다. 왜놈들의 항복은 그들에게 가장 징하게 당한 조선인들, 아니면 중국인들 손으로 받아냈어야 했다.
의용군 총사령 무정이 "우리 의용군도 있고 임정의 광복군도 있는데 왜 남의 나라 군대가 들어온단 말이야!" 하고 고함쳤다. ‘김두봉이 "우리도 중국 땅에서 일본 놈들하고 싸웠고 연합국의일원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우리 문제를 가지고 저들끼리 쑥덕공론하고 있나. 소련군이 두만강으로 밀고 내려갈 때 우리가 합작으로 진군했어야 했는데, 저승에 가서 김학무 진광화 윤세주 동지를어떻게 보나" 라면서 최창익의 눈치를 살폈다.
"이건 본말전도 아닌가. 전범국가인 일본이 분할돼야지 조선은 피해 당사국인데 의용군이나 광복군이 일본 놈들하고 싸웠는데 우리는 명색이 참전국인데 왜 이런 대접을 받는단 말인가." 미군과 소련군의 분할점령이라는 것도 어리둥절했지만 정숙은 당장의 진로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어디로 돌아가야하나, 독립은 했으되 땅이 두 동강 났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 북으로 가야 하나, 남으로 가야 하나, 어느 쪽이 내 조국인가. 내가 떠나온 곳은 서울이고 거기에 아버지와 아이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이념적 동지는 소련 아닌가.
독립동맹과 의용군이 비바람 맞으며 만주벌판을 가로질러 민족대이동의 귀국길을 밟아오는 동안 소련이 새파랗게젊은 극동군 대위 김일성을 군함에 태워 날렵하고도 신속하게 평양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미군의 점령군통치가 시작됐는데 이것은 일제 식민통치하고 같은 듯도 하고 다른 듯도 했다. 총독부 건물이 군정청이 되어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올라갔고, 아베 총독이 가고 하지 중장이 왔으며, 총독부 국장과 기관장 자리를 대령부터 중위까지 미군 장교들이 차지했다. 모든 직제가 왜정 때 그대로이고 해방 후 며칠간 도망갔던 조선인 경찰들이 다 예전 자리로 돌아왔다.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의 정부체제로 바꿔놓았더니 미군이 들어오자마자 불법화시켰다. 대신 미군정은 10월에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의 환영대회를 열어주었고 11월에는중국에서 돌아온 김구 환영대회를 열어주었다. 하늘이 몇 번이나뒤바뀌었다. 2백 개 넘는 정당이 생겨났고 수십 종의 신문이 창간 됐다. 수도의 명칭, 경성은 서울이 되었다.
모택동의 신민주주의가 토지개혁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연안파의 공식 입장이었고 연안파가 이번에 결성한 당의 명칭도 ‘신민당‘ 아니던가. 하지만 김일성의 인민위원회와 소련군정은 소련인 고문 두 명을데리고 토지개혁법을 주무르면서 신민당 의견을 묵살했다. 그녀가 문제점 보완 어쩌고 해도 의욕들이 생기지 않는 게 당연했다.
토지개혁이 계획대로 돼간다면, 빈농, 노동자계급을주력으로 하는 공산당이 약진할 것이고, 부농과 지식인 그룹까지포괄하는 신민당은 약화될 것이며, 우파 민족주의 세력과 기독교인들이 주도하고 지주 자본가들이 뒷돈을 대는 조선민주당은 기반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그것이 북조선공산당과 소련군정이노리는 바였다. 토지개혁의 복마전에서 당파들이 각기 잇속을 따지며 주판알을 퉁기고 있었다. 이제 이곳에 혁명가는 사라지고 정치가들만 득실거리는 것이다.
사회를 혁명적으로 개조하는 일에 강력한 리더십이 필수이며 리더십의 절반은 선전활동으로 지탱된다. 국가 단위의 지도력이란 개인의 자질과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더구나 김일성은 최고지도자가 되기에 너무 젊었고, 여러 모로 불리하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선전사업이 필요했다.
연안과 동지들은 김일성을 자꾸모택동과 비교하려 드는데 모의 권위는 투쟁경력과 팸플릿에서나왔고 끊임없이 팸플릿을 써서 이론과 원칙으로 당을 지도하고투쟁을 이끌었다. 레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혁명지도자가 조선에선 박헌영이다. 그는 공산주의 진영에서 단연 최고의 이론가다. 반면 김일성은 마르크스 서적을 한 권이라도 차분히 읽었을까 싶다. 정숙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겹쳐놓아 보았다. 늘 정확하게 원리원칙을 이야기하고 할 말만 하는 박헌영이 예민한 지식인 혁명가의 전형이라면 무관 특유의 무데뽀 스타일에다 허풍기도 있고 실없는 소리도 하면서 사람 어르고 뺨 치는 김일성은 타고난 정치인이다. 두 사람 모두 배짱과 강단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지인 재목으로는 누구일까, 어쨌건 소련은 김일성을 낙점했다.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오. 우리가 살아온 시대는 개인의 이성과 판단을 넘어서 있소. 용서한다면 시대를 용서해야겠지. 단야는 마땅히 해야 할 선택을 한 것이오."
그렇다고 해도 정숙은 헌영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나라면 앞뒤 안 재고 저지를 것이다. 중앙아시아 외딴 곳에서 여자가 구원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면 나는 물불 안 가리고 손을 내밀 것이다. 냉정한 인간! 여자를 품을 줄 모르는 남자가 세상을품을 수 있을까. 헌영을 존경하지만 좋아할 수 없는 건 그래서지. 그녀는 현실의 벽 앞에 고개 숙이고 돌아서는 이 남자가 한없이작아 보였다. "비겁해!"
예전에 명자는 공산주의자였지만 해방 후엔 여운형 선생이 옳다고 믿어 그가 하는 대로 건국준비위원회, 민주주의민족전선,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을 쫓아다녔다. 명자에겐 그가 당이고 테제였는데 하늘이 그를 데려가버렸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어디로 흘러가게 될 지 아득했다.
분할점령이 영구 분단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분단을 피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들이 주어졌지만 불발의 역사에 그치고 만 것은 남북을 통틀어 그것을 현실화시킬 능력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없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다만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면 그건 여운형이었을 것이다. 맹목적으로 자신을 정의로, 타인을 불의로 설정하는 지점에서역사의 비극이 싹튼다.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점령한 것은 분단의 시작일 뿐이었다. 분단을 완성한 것은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이었다. 극악한 식민지 상태에서 갓 벗어난 사람들에게 대화와 타협의 매너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관대함과 현명함의 미덕은 굶주림과 인권유린이 없는 환경에서 훈련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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