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전쟁터가 그럴 것이다. 죽고 사는 게 한순간의 일이다. 이처럼 생사의 갈림길을 거듭 지나오다 보면 당장 내게 닥쳐오는 운명조차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덤덤해진다. 목숨이 가벼운데 무엇이 문제겠는가. 경성에서 어깨를 짓눌렀던 번민들은 어느 하늘로날아가버렸는지 흔적도 없다. 격렬하고 절박한 하루하루의 현실이 전차 부대처럼 과거의 기억들을 깔아뭉개고 지나갔다. 어느 아침 정숙은 경성에 두고 온 막내아들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 당황하기도 했다. 삼청동 골짜기의 볕 잘 드는 2층 양옥 태양광선치료소에서 하얀 가운 입고 기계를 만지던 일이 어느 한낮의 백일몽인듯 아련했다. 경성을 떠난 지 2년도 채 못 되었지만 20년은 지난듯했다. 그녀는 모호한 침묵이 흐르는 식민지 수도를 빠져나와 콩볶듯 요란한 전화戰火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것이다. 그녀가 바라던바였다. 적敵과 아我가 분명한 전선에서 총 들고 싸우겠다고 중국에 온 것이다. 적의 전투기가 폭격을 퍼붓는 하늘 아래서 그녀는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의 문턱에 섰지만 식민지의 뿌연 하늘을 함께 덮고서 적들과 이상한 동침을 하는 것보다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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