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쪽 혁명운동한다고 국경을 넘은 사람이나 농토 찾아 국경을 넘은 사람이나 조국을 잃고 헤매기는 마찬가지였다. 주름진 얼굴과 거친 손에서 그녀는 유랑민들이 겪었을 수난을 막연히 집작해볼 뿐이었다. 넝마처럼 낡은 옷은 물구경 한 지 오래인 듯 황토빛이었다. 우물이 있지만 우선순위 첫째가 식수, 다음은 농업용수라 목욕이나 빨래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극동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여기까지 오는 데 한 달이 걸렸다 한다. 가축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를 타고 왔는데 먹는 것도 부실하고 약도 없고 해서 병들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아이와 노인이 많이 죽었고 시체는 철로변에 묻었다. 세수도 목욕도 할 수 없어 여자들이 달리는 열차에서 차창 밖으로 머리칼을 털면 비듬과 이가 눈보라처럼 날렸다 한다. 화물열차는 역도 아닌 곳에 서서 허허벌판에 사람들을 부려놓았다. 그들은 가져온 농기구로 움집을 파고 풀을 베어 얼기설기 지붕을 엮었다. 식량이라고는 정부가지급한 가족당 밀가루 백 킬로그램이 전부였다. 열차에서 병들어죽고 겨울 나는 동안 굶어 죽고 얼어 죽고 해서 지금은 처음 떠날때의 절반이 되었다. 누구나 가족의 절반을 잃은 셈이다. 이주민들은 가을부터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야생의 초원에서 잡목과 풀을 뿌리째 뽑아낸 다음 돌을 골라냈다. 봄이 오자 밭이랑에 콩과 옥수수를 심었다. 겨울 나고 얼었다 풀린 고운 흙을 짓이겨벽돌을 만들어 살림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 얼추 꼴을 갖춰가고 있었다. 이들은 극악한 시간을 보내고 이제 한숨 돌리는 중이었다.

1930년대 내내 스탈린은 전시체제 구축에 몰두했다. 한편에선 공업과 철강 생산과 무기 개발의 5개년계획 시리즈, 다른 한편에선 숙청과 유형과 처형의 공포정치, 그리고 소수민족들을 뒤섞어버리는 거칠고도 과격한 동화정책이었다.
 1937년은 소련 내 조선인들에게 최악의 불운한 해였다. 극동지방 조선인 대략 18만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했고 이주 직전에 당간부와 지식인, 전문가 상당수가 즉결재판 받고 처형됐는데그 수가 2500이었다. 김단야처럼 이들도 대개 일본 밀정 혐의였다. 스탈린정부로서는 강제이주정책이 일거양득이었으니 어느 쪽 에 봉사하는지 의심스러운 국경지대 소수민족들을 청소하고 중앙아시아 황무지도 개척하자는 것이었다.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카자흐스탄이 소련에 편입된 것이 1936년이었으니 이 광활한 땅을소비에트체제 안에 흡수하는 일도 시급했다.

 유럽의 동쪽과 서쪽에서 코뮤니즘과 나치즘의 이름 아래 두 개의 팽창주의 파시즘이 학살을 밥 먹듯 하던 1930~40년대는 20세 기에서 가장 참담한 시기였다. 아니, 인류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기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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