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토의 그림 속 사람들의 얼굴에는 갖가지 표정이가득해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툭 떨어질 것 같은 감동이 전해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름진 옷자락은 몸의 움직임까지도 느껴질 정도이다. 게다가 파란 하늘이라니! 중세 화가들은 그림의 배경을 흔히 화려한 황금색으로 칠하곤 했는데, 조토는 실제 하늘을 담은 파란색을 배경으로 칠한 것이다. 중세에 와서는 그림의 역할이 글자를 대신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생각해서 그리는 그림‘으로 변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중세에 잃어버린 그 전통이 다시 부활했으며, 그 가운데 조토 디본도네를 선구자로 본 것이다. 조토의 원‘ 이라는 말은 ‘어떤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는 뜻으로 쓰인다.
르네상스 화가들이 매너리즘에 빠지기 시작한 그 당시에도 르네상스 천재들이 이루어 놓은 것들보다 더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발견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천재인스승을 모방하기보다는 기발함으로 승부를 거는 화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색깔이나 모양 등 모든 것에서 규칙과 비례를 만들어 내고, 또한 이상화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들며 우아함만을 강조하던 르네상스그림에서 벗어나 그들은 다소 기괴한 색, 또는 길쭉길쭉 늘어뜨린 희한한 선으로 인체와 세상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가 그린 라오콘을 보면 쉽게 이해할수 있다. 이 그림은 트로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카라바조는 성경에서 일어난 모든 일 또한 천국이 아닌 바로 우리가 살아 숨쉬는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위대한 인물을 초라하게 그렸다는 이유로 "어떻게 이런 걸 걸어 둘 수 있겠어!" 라며 퇴짜를 놓던 교회는 점점 카라바조의 그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 더 고통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성실하고 검소하게 생활한 예수님과 마리아, 성인들이 더 친근하게 다가왔고, 그로 인해 더욱더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카라바조의 그림이 주는 또 다른 특징은 바로 명암법에 있다. 그는 밝은 부분은 지나칠 정도로 밝게 그리고, 어두운 부분은 실제보다 더 어둡게 그렸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역시 바로크 시대의 뛰어난 화가였다. 루벤스는 카라바조만큼 빛과 어둠의 차이를 심하게표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의 동작은 르네상스 시대의 조용하고 고요함과는 달리 화려하고 장대하며 생기가 넘쳤다. 구불거리는 선 때문에 그림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세월이 흐른 뒤 몇몇 미술학자는 르네상스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카라바조나 루벤스가 추구하던 이 새로운 미술을 비아냥거리며 바로크라고 불렀다. 바로크는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이다. 구불구불한데다가정확하지 않아 어딘가 어설퍼 보인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바로크 시대 화가들의 기발함 때문에 우리는 그림 속에서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 앞에서 "아, 멋져!" "우아해." "차분해," "아름다워!" 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이제 바로크 시대의 그림 앞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금방이라도 그림 속 사람이 튀어 나와 네ㅣㅐ 어깨를 툭 칠 것 같아."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가.
로코코 미술-밝고 환하고 즐겁고 낙천적. 반발도 심함 그림의 주제가 늘 영웅이나 기독교의 신, 귀족과 영웅들의 무용담이기만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귀스타브 쿠르베는 오르낭이라는 한 시골 마을 농부의 죽음을 엄청나게 큰 화던속에 그려 넣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누구도쳐다보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때로는 손해만 보고, 때로는 강한 자들에게 힘없이 당하며 사는 사람들은 ‘보통‘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오랫동안그림 밖에서 서성거려야만 했다. 쿠르베는 그들을 그림 속 주인공으로불러들였다. 주변의 사사롭고 소소한 모든 것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거만하고 거들먹거리는 화려한 큰 힘을 이겨 내는 그런 세상, 그 멋진 세상을 우리는 쿠르베의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모네 인상, 해돋이〉 1872년, 캔버스에 유채, 68×48cm해가 막 돋는 바닷가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그리다 만 듯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하고, 거친 붓질각도 우아하거나 고상하지 못해, 당시 파리 살롱이 정한 좋은 그림의 기준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이 그림은 인상주의를 꽃피운 최고의 그림 가은데 하나로 평가받작했다.
피카소의 그림은 세잔을 많이 닮았다. 가만히 앉아서는 보이지않는 모습을 때로는 서서, 때로는 앉아서 보고 그림을 그린 세잔처럼 피카소는 아예 그리고자 하는 대상 뒤로 성큼성큼 몸을 움직여 관찰한 뒤 한 화면에 펼쳐 놓은 것이다. 따라서 괴물 같은 얼굴로 오른쪽 귀퉁이에앉아 있는 여자는 목이 꺾인 것이 아니라 뒷모습과 앞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이다. 피카소는 그림이니까 가능한 모든 일을 다 하고 싶어 했다. 그림이니까 원하는 대로, 어떤 모습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수업 시간에 그렸던 상상화가 그래서 재미있던 것이 아닐까? 사진이 아니라 상상화이므로그림 속에서는 팔이 4개 달린 내가 한 손으로는 숙제를 하고, 두 손으로는 게임을 하기 위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엄마가 깎아 준 사과를 먹는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다. 물론 머리는 컴퓨터화면을 향해 있지만, 몸은 엄마를 향할 수 있다.
칸딘스키의 추상화도 가장 본질이 되는 것만 남긴다는 점에서 몬드리안과 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그림은 ‘선과 색이 가장 본질이 되며 그 본질이 되는 ‘선과 색‘ 만으로 보는 사람과 그리는 사람의 마음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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