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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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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시간이었다.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나는 아주 오래전 읽었던 노인과 바다를 떠올리고 있었다.
한 노인이 먼 바다로 나가 힘들게 청새치를 잡지만, 돌아오는 길에 상어에게 청새치의 살점을 모두 뜯기고, 빈 뼈만 달고 돌아와 소년의 위로 속에 잠이 든다는...누구나 아는 간단한 줄거리와 고전치고는 짧고 쉬웠던 문장을 기억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잡았던 나는 뜻하지 않은 감동에 몇 번이나 눈시울을 붉히다 결국 책을 덮을 때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분명 같은 책인데,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달라져 나를 울게 한 것일까?
책의 모습과 번역도 달라졌지만, 역시 가장 달라진 것은 ‘나’였다.
오래 전 내가 이제 겨우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물고기 한 두 마리를 잡아 오던 ‘소년’이었다면, 지금 나는 바다에 나가 외롭게 싸워본 적이 있는, 내가 가졌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허망하게 잃어 본 적이 있는 ‘노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지내고 난 지금에서야
나는 헤밍웨이가 노인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노인은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말한다.
‘자기가 이기고 싶다는 마음만 확실히 먹으면 상대가 누구든지 이길 수 있다’고.
생각에 막혀 망설이는 이에게
‘이보게 생각일랑 집어 치우게, 이대로 항해를 계속 하게, 그러다 일이 닥치면 그 때 맞서
싸워.’라고
절망하는 이에게
‘희망을 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뿐만 아니라 난 그건 죄악이라고 믿어.’ 라고.
그리고 가지지 못한 것을 탓하는 나에게
‘지금은 없는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야. 있는 걸로 뭘 할 수 있을지 그거나 생각하도록 해.’ 라고 충고해 주었다.
천신만고 끝에 잡은 청새치가 뜯겨져 나간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이 모든 것들이 오래가지 않는 꿈인 것을 알면서도 노인은 자신에게 말한다.
“하지만 사람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사람은 박살이 나서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를 당하진 않아.” 라고...
그리고 그 모든 말 중에 나를 가장 울렸던 말은 참 특이하게도, 홀로 바다와 싸우던 노인이 입버릇처럼 내뱉던
“그 애가 있으면 좋으련만...”이었다. 바다와 싸우는 한 위대한 인간이 필요로 한 것은
크고 좋은 장비도, 큰 배도 아닌, 그저 내 곁에 있어주고 나를 믿어주는 작은 '소년'이었다.
아침에 소년을 깨울 때도 아이가 안쓰러워 차마 흔들어 깨우지 못 하고 소년의 한 쪽 발을 살며시 잡고 기다리던, 그마저도 안타까워 깨어난 아이에게 ‘미안하다’ 고 말하는 노인의 마음과,
상처입은 노인의 손과 뼈 밖에 남지 않은 고기를 싣고 오며 더 상처 입었을 노인의 마음이 아파,
커피를 가지러 가는 내내 눈물을 흘렸던 소년의 마음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소년을 따라
자꾸 자꾸 울었다.
인간을 패배하지 않게 하는 것은, 그 어떤 위대한 정신과 엄청난 물질이 아니라
바로 그 곁에 있는 인간의 작은 온기임을 헤밍웨이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는 헤밍웨이가 쿠바에서 즐겨 마셨다는 모히토를 민트잎을 직접 따 만들어 마시며,
성공과 실패, 희망과 절망, 사랑과 이별을 반복하다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패배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이 ‘아주 약하고, 보잘 것 없지만 결코 패배하지 않는 노인’을 주고 떠난 것은 아닐까.
새벽에 책을 덮으며 나는 노인과 소년, 그리고 그들을 만든 한 위대한 작가에게 건배를 보냈다.
그리고 봄 , 어릴 때 읽었다고 생각(?)했던 고전들을 다시 펼쳐 보며,
고전의 바다로 나도 노인처럼 청새치를 잡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