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가장 쉬운 들뢰즈 입문서

어제 한 서점에 갔다가 원래 사려고 했던 손디의 <문학해석학이란 무엇인가>(아카넷)와 함께 들뢰즈 입문서 한권을 손에 들고 왔다. 클레어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가 그것이다. 콜브룩의 원저는 "Routledge critical thinkers"의 한권으로 나온 것으로, 가장 얇고, 가장 쉽고, 가장 편안한 입문서이다.

책은 미국의 여성시인 '에밀리 디킨슨'을 두번이나 '디킨스'로 오기하는 등 약간의 교정 부실을 드러내지만, 번역의 가독성은 좋은 편이다. 역자는 폴 페이튼의 <들뢰즈와 정치이론>도 곧 역간할 모양인데,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지젝에 비해서 여러모로 운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번역과 관련하여 아쉬운 점이 없지 않은데(사실은 짜증나는 점이다), 그건 역자가 'power'(불어의 puissance)를 계속 '역능'으로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겐 '권능'이란 단어보다도 더 역겨운 이 '역능'이란 말은 국어사전에도 등재돼 있지 않은 일어이다. 순전히 스피노자에서 (영어로) power와 force를 구별하기 위해 얻어다 쓴 이 말이 잠시의 궁여지책은 될수 있을지언정 관용어로 굳어질 만한 것인지는 의심스럽다(사실은 짜증스럽다). 스피노자에 관한, 번역된 이차문헌들을 내가 잘 읽지 않는 이유는 과장없이 순전히 이 '역능'이 말이 꼴사나와서이다.

이 신간의 경우에도 '역능'이란 단어를 그냥 '힘'으로 읽어도 독해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스피노자 전문가는 '역량'으로 옮길 것을 제안하지만). 역자(들)의 무사안일한 무신경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역능'으로 옮기는 것이 '파워'로 옮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번역에 대해서 타박을 했지만, 한가지 배운 것도 있다. 그건 들뢰즈에게서 impersonal을 '비인칭적'이라고 옮긴 것. 나는 지난번에 흔히 '비인격적'이라고 옮겨지는 이 용어를 '비인칭적'이란 말과 견주어 보다가 (자신이 없어서)'익명적'이라고 옮기고 말았는데, '비인칭적'이란 말이 더 적합하다는 걸 신간을 읽으며 깨달았다(물론 역자가 그렇게 옮기고 있다).

번역에서 까다로운 건 jouissance나 power의 경우도 그렇지만, 해당 용어에 대응하는 우리말이 여럿 있을 경우이다. impersonal의 경우도 그러한데, 이것은 세분야에 걸쳐 있다. '비인격적'(윤리학), '익명적'(사회학), '비인칭적'(언어학). 그런데, inhuman을 떠올리게 하는 '비인격적'이란 말은 여기서 가장 먼저 제외될 만하다(바디우의 <존재의 함성>의 역자도 '비인격적'이라고 옮기는데, '사례'로 옮겨지는 게 더 자연스러운 case를 전부 '경우'라고 옮길 걸로 봐서 역자의 우리말 감각엔 문제가 좀 있다). '익명적'과 '비인칭적' 중에서 내가 '비인칭적'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것이 '사유'와 종종 결합되어 쓰이기 때문이다. 즉 (인칭적 사유에 대하여) '비인칭적 사유'. 실제로, 들뢰즈는 언어학과 수학, 자연과학의 용어들을 즐겨 참조한다. 그런 맥락에서라도 impersonal의 역어로는 '비인칭적'이 가장 적합해 보인다.

이미 언급한대로, 책은 술술 읽힌다. 들뢰즈의 현란한 용어들에 지레 겁을 집어먹었던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손에 집어들 만하다. 하루만 투자한다면, 어디에 가서라도 들뢰즈에 대해서 한두 마디 할 만한 용기가 생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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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aporia > 가장 신뢰할 만한 스피노자 관련 국역본
헤겔 또는 스피노자 프리즘 총서 11
피에르 마슈레 지음, 진태원 옮김 / 이제이북스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으려고 할 때, 그런데 주위에 그 책에 관해 물어볼 만한 사람이 없을 때, 아무래도 서평 등을 참고하게 된다. 여기에다 그 책값이 상당하고, 특히 (철학/인문학 관련) 번역서라면, 돈도 별로 없거니와 직간접적으로 오역의 폐해를 경험한 나 같은 경우 리뷰를 보지 않고서는 책 살 엄두를 아예 내지 못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스피노자에 대해 거의 모르지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독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용기를 내 글을 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스피노자 관련 연구서 중 ‘소장’해서 두고두고 읽을 만한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다. 이는 우선 저자인 피에르 마슈레의 이론적 역량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제자라는 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 마슈레 역시 ‘~를 읽자’라는 노선에 아주 충실하다. 앞의 서평자도 말했듯 이는 들뢰즈나 네그리의 스피노자 연구와 비교되는 지점이다(그렇다고 해서, 특히 들뢰즈의 독해가 꼼꼼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어디까지가 스피노자의 견해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견해인지를 다소 불분명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네그리는 더 심하고 말이다. 네그리를 읽고서 스피노자를 알았다고 하는 건 솔직히 어폐가 있다). 스피노자, 특히 ‘에티카’ 1~2부를 정밀하게 읽고자 할 때 한글로 된 문헌 중에 이 책보다 훌륭한 동반자를 찾기란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딱딱한 ‘훈고학’은 아니다. 알다시피 알튀세리앙들의 독해 노선은 ‘징후적 독해’로서, 텍스트의 모순과 공백과 균열을 특권화하면서 텍스트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을 드러낸다. 말하지 않는 무엇? 알튀세르의 표현대로 ‘이론에서의 계급투쟁’, 또는 당대의 (정치-)이데올로기들과의 대결 또는 동맹 말이다. 여기서 ‘당대’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스피노자의 당대며, 다른 편으로는 마슈레의 당대다. 후자와 관련하여 내가 주로 파악한 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과 ‘유물변증법’이라는 쟁점이다. 앞서 스피노자 연구와 관련하여 이름난 두 명의 이론가로 들뢰즈와 네그리를 든 바 있는데, 이들은(또는 국내에서 이들을 따르는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을 폐기하고 완강한 反변증법의 노선을 택한다. 이는 그들의 주장이므로 그에 대한 이견 여부와 관계없이 존중되어야 한다. 문제는 이들의 주장이 스피노자의 사고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나온다는 식의 통념이 형성된다는 점, 그러면서 스피노자 사고의 많은 부분 심지어 결정적 부분이 제거된다는 점에 있다.
이 점에서 마슈레의 이 책은 우리나라에 널리 소개되지 않았던 스피노자의 다른 면목(심지어 진면목!)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는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특히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과 스피노자의 불가분성은 이 책의 전반부를 통해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입증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물변증법의 문제는 이에 비하자면 마슈레의 해석이 좀더 많이 가미됐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철저히 훈련받은 징후적 독해의 노선 덕분에 마슈레는 자의성을 효과적으로 피하면서 독창성에 도달하는 듯 하다. 이는 그가 헤겔과 철저하게, 그렇지만 (예컨대 네그리처럼 외재적으로가 아니라) 내재적으로 대결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소개한 것은 이 책 자체에 관한 것이지, 이 책의 ‘국역본’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데리다가 쓴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아무리 훌륭한 의의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국역본을 추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리뷰를 쓰게 된 근본적 전제는 번역자의 이론적 역량에 대한 신뢰다. 이에 대해서는 백번의 설명보다는 그가 쓴 ‘불량배들’ 서평(나 역시 이 서평 때문에 그를 알게 되었다)을 직접 보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꼼꼼한 번역은 물론이거니와, A4 30장에 달하는 역자해제 및 상세한 역주는 불어본으로 환원할 수 없는 국역본의 고유한 가치다. 더욱이 읽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 언제든 역자에게 이론적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이에 대해 이론적 환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은, 다른 어떤 책의 독서에서도 경험하기 힘든 매우 강력한 지적 자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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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딸기 > 100년뒤, 내 마음까지 뒤흔든.
천안문 이산의 책 8
조너선 스펜스 지음, 정영무 옮김 / 이산 / 1999년 2월
평점 :
품절


이제야 이 책을 다 읽었다고 하면, 한 친구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벌써 몇년 전이던가. 나보다 열 살 어린 그 친구와 "'천안문'을 다 읽고나서 이야기해보자"는 얘기를 했었다. 친구는 약속대로 책을 읽었고, 나는 그저 책장에 꽂힌 '천안문'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조너선 스펜스의 책 중에서 나는 '현대 중국을 찾아서' 1권과 2권을 가장 먼저 읽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빠져든 스펜서의 세계. '강희제'와 '칸의 제국', 그리고 아주아주 오랜시간에 걸쳐 읽고야 만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왕여인의 죽음'. 한권 한권 내게는 주옥같고, 추억같은 책들이다. 스펜서의 책 몇권을 '찜'해서 알라딘 보관함에 넣어놓고 있고, 그의 모든 저서들을 다 읽어봐야지 하는 꿈까지 꾸고 있다. 스펜서의 책들을 줄줄이 나열하는 이유는? 첫째는 그의 책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두번째는, 그의 책들을 읽을때 내가 빠졌던 함정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스펜스의 책들을 읽으면서 스펜스의 스타일에 흠뻑 빠진 나머지, 정말 우습게도 '중국'을 잊고 있었다. 역사를 서술하는 스펜스 특유의 독창적인 방식과 박식함, 유려한 문장에 끌려, 그저 읽어내려왔달까. 그런 면에서 그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천안문'은 좀 다르게 다가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중국을 생각했다. 유구유구유구한 역사, 그만큼 화려복잡노도같았던 중국의 역사, 그 중에서도 근대와 현대로 이어지는 질풍같은 시기의 중국을. 대학시절 다이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연작을 읽은 이래 처음인 것 같다. 소용돌이같은 시기의 인간의 군상을 이렇게 생생하게 접해본 것은.

'천안문'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이름일 뿐, 책의 배경은 '중국 곳곳'이다. 청말-열강의 반(半)점령-내전-공화국-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 현대사의 궤적을 따라 자금성에서 난창으로, 창사로, 충칭과 옌안으로 흘러간다.
스펜스가 이 시기 중국 지식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내기 위해 선택한 세 사람은 사상가이자 개혁운동가였던 캉유웨이, 작가 루쉰, 또다른 작가 딩링이다. 이들은 생(生)의 한 시기에 겹쳐지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지만, 사상적 시기적으로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캉유웨이가 주로 청 말기, 왕조의 멸망을 회한어린 눈으로 바라본 개혁사상가였다면 루쉰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공산주의의 발흥을 지켜본 지식인이었다. 봉건제의 모순에 맞섰던 여성 작가 딩링은 공산당 치하에서 영욕을 잇따라 맛봐야 했던 인물이다.

저자는 이 세 명을 '축'으로 삼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지만 책에는 이들과 교차되는 수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중국의 현대 지식인 지도(地圖)라 해도 될 정도로. 생각이 다르고, 이름붙여진 주의(主義)가 다르고, 인생역정이 다르지만 모두들 시대에 부딪치거나, 혹은 부딪히거나 했던 사람들이다. 스치고 엮이는 인물들 사이로 당대의 중국 풍경이 밀도있게 그려진다. 픽션처럼 생생하되 사서(史書) 답게 정교한 스펜스 특유의 방식은 역시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혁명'이라는 이름의 봉기와 처형 장면이 당대 지식인의 글을 통해 '담담하게' 전해질 때 나는 인간이 가진 폭력성에 전율했고, 혁명가 취추바이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때 그만 눈물을 뚝뚝 떨구고 말았으며, 늙은 딩링과 작가 라오서가 홍위병들에게 모멸을 당할 때에는 우습게도 혼자 분개하고 있었다.

역사는 사람을 작게도 만들고, 크게도 만든다. 역사는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진실이면서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같기도 하다. 역사 속에 제 갈 길을 걸어간, 혹은 제 갈 길을 원하는대로 걸어가지 못한 인간들의 모습은 후대 사람의 마음까지 뒤흔들어 놓는다. '천안문'을 통해 나는 또다시 뒤흔들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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