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을 폭파하라
구소은 지음 / 검은모래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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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어떤 일에 심장이 뛰는가?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는 우주의 부름 혹은 생애의 사명을 느끼는가? 갖은 장애와 결핍에도 나만이 할 수 있고 나만이 해야 할 일로 인해 내 육체에 피가 돌고 장기가 활동하는 것을 느끼는가? 내 정신의 모든 지혜와 지력을 동원해 이루어야 할 것으로써 살아갈 동기를 확인하는가? 또 그러한 것이 지겹거나 회피하고픈 부담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활력이 되는가? 안타깝게도 대다수 현대인들은 그러한 벅참을 망실하고 산 지 꽤 오래되었다.


이 지점에서 제1회 4.3 문학상 수상자인 구소은은 근래 다섯 번째 소설로 선보인 『에펠탑을 폭파하라』는 우리에게 존재의 이유를 진지하게 묻고 그 부름과 사명을 되찾는 길을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2. 한국의 어떤 이웃


오래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조명한 내용이다. 아스팔트 위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휘날리는 할아버지들 이야기이다. (여기서 그분들의 정치 성향에 관해 가타부타 논할 의도는 없다.) 그 할아버지들은 그야말로 집안 뒷방에, 낙원상가 골목에, 동묘시장 노점상 근처에서 흔히 뵐 수 있는 구세대의 표상들이시기도 하다. 젊고 멋지고 어여뻐 우리 대중매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가 주목하는 부류들은 결코 아니다.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유교적 덕목이 사라진 우리 시대에, 냉정하게 말하자면 사회 주변으로 밀려난, 별 볼 일 없는 소외자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에게 마치 계시처럼 시대적 부름, 국가적 사명이 부과된다고 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당면한 정치현실 속에서 자신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나라가 망할 것과 같다는 뼈저린 현실 인식이기도 하다. 그것에 더해 동년배들의 우국충정이 연대가 되어서는 노구(老軀)를 이끌고 아스팔트 위로 떼지어 나서기도 한다. 곧 그들은 덧없는 세월을 의미 없이 견디어 내다가도 불현듯 자신들이 아니면 나라를 구해낼 국민이 없다고 느끼는 분들이다.


그런데 젊은이들도 만만치 않은 집회 현장에 하루 이틀, 그리고 몇 주, 그리고 몇 달을 참가하다 보면 자신의 변화를 몸에서부터 느낀다고 한다. 잃었던 밥맛도 돌아올 뿐만 아니라, 끈질긴 우울감과 허무감에서 해방되고, 만성 신경통과 관절염까지 낫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곧 그러한 집회를 참여하다가 잃었던 삶의 의미를 되찾는 일이 비일비재하단다.


3. 그 둘은 무엇 때문에 의기투합했을까?


구소은이 『에펠탑을 폭파하라』에서 등장시킨 주요한 인물 둘은, 전직 교수로서 현재 파리의 거리에서 노숙하는 할아버지 ‘파스칼’과, 또 파리에서 한국 부모에게 유기된 자폐증 청년 ‘장 한울’이다. 서로 공유할 것도, 교감할 것도 없는 두 낯선 이방인이 인생의 밑바닥에서 일어서며 서로 다가가는 과정을 그려내는 작가는, 이미 전작(前作)들을 통해 줄기차게 조명해온 인간애를 확인시키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풋풋한 미소를 자아내도록 이끈다. 네 번째 소설 『종이비행기』에 나온 ‘달룡’ 아저씨로부터 구소은 표의 유머감각을 처음 선보인 이래 이번 소설 『에펠탑을 폭파하라』에서는 더욱 본격적으로 작가가 숨겨온 ‘파스칼’과 ‘장 한울’을 통해 짙게 채색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녀의 소설을 애독해 온 독자라면 금세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두 묘한 인물 둘이 세계사적인 이벤트를 저지른다. 바로 수 세기 동안 온갖 풍파에 녹슬고 약해진 에펠탑을 폭파하는 일을. 그것도 노숙자와 자폐아가 말이다. 여기에 어떤 사연이 있을까? 이러한 관계와 사건의 진행에 견고한 현실성이 있을까? 그런데 소설에서는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인물이 의기투합하여 가공할 만한 사고를 일으키는 과정이 어색하지 않게 보여지고 있다. 가히 다섯 번째 소설을 출간한 ‘짬이 찬’ 작가의 놀라운 플롯과 필력 때문이다. 그 자세한 이야기라면 소설의 주된 흐름이기 때문에 여기서 밝히지 않기로 한다. 다만, 파리에서 다년간 유학했던 전력이 있는지라 작품에서 세밀하고 아름답게 묘사되는 프랑스의 풍경과 거리의 모습들은 한국에서 구 작가만이 선물할 수 있는 덤이라는 사실은 귀띔한다.


4. 존재의 부름 혹은 신의 사명?


예수 이후 실질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정초하고 확장한 인물은 단연 바울이다. 본래 그는, 유대교에서 출발하였으나 혹세무민한다고 지목된 초기 그리스도교의 맹아를 짓밟던 인물이었다. 율법사이면서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투옥하고 살해했던 잔인한 종교경찰이었다. 그런데 그의 강직한 신념을 한 번에 바꿔 충직한 그리스도의 종이 되게 만든 사건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강렬한 빛을 쏘여 환상 속에 예수의 음성을 들은 일이다. 지적으로 고매하고 실천적으로 철저했던 그가 목숨을 바쳐 투신했던 일들을 포기하고 삶의 방향을 정반대로 바꿔버리게 한 계기는 바로 이 불가해한 신비체험인 셈이다.


합리성과 실증성만이 진리의 표준이 되어버린 근현대의 시기를 한창 보내고 있는 우리는 이쯤 해서 성찰할 과제가 있다. 과연 계측 가능한 자료와 산술적 근거만이 우리가 의탁해야 할 삶의 이유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비밀스러운 꿈, 막연하지만 강렬한 상상, 까닭 모를 기대, 그리고 신의 소명 따위는 인간의 삶을 더욱 탄탄하고 풍요롭게 할 근거가 될 수 없을까? 사실 그것들의 부작용과 미망으로부터 벗어나 과학화, 산업화, 근대화를 이루어 낸 것이 작금의 인류이지만,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빈번히 수량화된 도시 문화 속에서 허무감과 공황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구소은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발칙하게 도전한다. 삶의 전환과 회복을 이루는 것은 숱한 작가들이 다루어 왔던 ‘사랑’이며 ‘연대’이지만, 다른 한편에 ‘까닭 모를’ 존재의 부름 또한 (그것이 신의 계시로 일컬어지든 우주의 사명으로 일컬어지든) 우리를 새롭게 할 원천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주제로 말이다. 그녀는 무신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 그녀는 보다 존재론적이고 종교적인 심연을 건드린다. 말하자면 존재의 불가해한 신성함과 개개인들이 지닌 환전(換錢) 불가의 고유성, 삶 체험의 초우주적 가치들을 점점 더 잃어가는 이 세대에 어떻게 하면 소외된 파스칼과 한울마저 ‘존재의 용기’를 얻고 새로워지는지 그려내면서 말이다. 일찍이 20세기 종교철학자 폴 틸리히는 그의 저서 『존재의 용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존재의 용기란 다른 말로 ‘자기 긍정’인데, 특히 “자기의 참된 본질, 자기의 내적 목표, 혹은 생명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나는 감히 제안한다. 만화책 같이 술술 넘겨지는 『에펠탑을 폭파하라』를 미소 지으며 읽지만 말고 그 안에 가로 놓인 주제인 바, 소외자들이 어떻게 마르지 않는 삶의 에너지, 존재의 용기를 얻었는지 힌트를 얻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해 보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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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비행기
구소은 지음 / 봄의영토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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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낙원, 타인의 모방, 그리고 좌절된 해방 기록

- 구소은 작, <종이비행기>(봄의 영토, 2024년)



장 폴 사르트르는 그의 <타인론>에서 기술하길, 타인이라는 존재는 나의 지옥이면서 나의 근거라고 했다. 매혹적인 어록 같다. 그런데 그 함의가 꼭 그럴까? 그렇지는 않다. 예리한 인간론을 전개하며 사르트르는 타인의 출현(혹은 타인의 존재)은 ‘나’가 주체적으로 삶의 내용을 채워가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적어두었기 때문이다. 


본래 적극적인 무신론자인 사르트르는 신이 부과한, 혹은 타자가 부여한 본질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을 두고 텅 빈 ‘무’(無, le neant)라 칭했다. 다만 그와 같은 백지상태에서 우리는 내 존재의 본질과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할 ‘자유’를, 마냥 천형(天刑)과 같이 짊어진다. ‘오늘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하며 소소하게 고민하는 자유와, ‘이 직장을 때려치울까, 말까?’ 하는 심중한 자유로부터 ‘살기 싫은 이 세상, 콱 등질까?’ 하는 절체절명의 자유까지 실제로 자유란 엄청난 모험과 파국까지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소은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제2의 주인공 연지는 정신병원에서 나온 후, 그야말로 ‘텅 비어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채우기 위해 나름대로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그녀는 혐광성(嫌光性) 곤충처럼 한국 사회의 그늘에서 그늘로 배회하다가, 늘상 부러웠던 은설 언니의 삶을 모방하고 그 삶의 일부를 훔치고 마침내 안타까운 파국을 맞는다. 헤어나올 수 없는 인생의 음습한 음지에서는 조금 더 볕이 드리워진 타인의 삶 자체가 하나의 낙원과 같이 보였던 셈이다. 다만 그 낙원은 성서에 나온 ‘선악과’처럼 마냥 바라만 보기만 해야 할, 강직한 제한이 드리워 있었다는 점을 짐짓 외면했던 것 같다. 


연지를 잔잔히 연민하고 도움의 손길을 주었던 은설은, 연지가 시나브로 자신의 삶에 침투해 들어온 일들로 적잖이 동요하고 그녀가 드리운 삶의 얼룩으로 인해 복잡한 심경에 휩싸이게 된다.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연지가 자신의 세세한 것들을 모방하다, 마침내 사랑마저 탈취해 가려 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 은설이 배은망덕한 연지에 대한 인간적 동정을 끝끝내 거두지 않았던 데에 있다. 그리고 타인에 의해 한 입 베어진 자신의 삶이 ‘정작 무엇이었던가?’ 하며 삶을 반추하고 그 이유를 구할 계기로 삼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타인에게는 도피처나 낙원처럼 보였던 자신의 실존도 심중한 번뇌 가운데 놓여있음은 피장파장, 일반이었다. 이것은 독자에게 던져진 열린 결말이 잘 보여준다. 


두 주요 인물 중 하나는 실존적 허기를 채우기 위한 모방으로, 또 하나는 베풀었던 도움만큼 양보하고 싶지는 않은 현대인의 이율배반적 관용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소설은 주인공 은설을 통해 인간애와 인간됨에 대한 마지막 기대는 끝끝내 버리고 있지 않음을 내보인다. 나는 이것이 지금껏 세상에 선뵈었던 구작가의 작품들로부터 찾아지는 일관된 주제의식이라고 본다. 


소설이 발간될 즈음 구소은 작가는 SNS에서 자신이 직접적으로 겪은 체험을 소재로 했다고 밝혔다. 제삼자가 관찰하자면 마냥 블랙 코메디와 같은 사건에 휘말려 작가가 실제로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한 적이 있던 것이다. 소설 속의 두 여인 중에 언니인 은설이 바로 작가 자신의 투사이다. 그렇다면 동생으로 삼은 연지는 실존 인물일까? 실존 인물이겠지만, 작가는 자신과 그녀를 등장인물 삼아 상상을 더해 풀어 내고자 하는 사유와 주제를 더 확충해 갔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시라. 이야기 대부분이 픽션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구소은 작가의 전작 <검은 모래>, <무국적자>, <파란방>은 전통적인 소설 기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한다면 새 작품의 구성은 사뭇 특이하다. 소설 공간 안의 주인공 은설을 따라서는 소설로 쓰고 있고, 소설 속 영화 공간 안에서는 재가공된 주인공 설하를 따라서 시나리오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기법을 통해 작가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인생과 사건에 대해 괄호를 치고 엄밀하게 바라볼 것을 촉구하는 듯하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가공하여 소설로 쓰고 그 소설 속에서 그것을 다시 시나리오로 쓰는 방식을 통하여, 우리의 실존과 사연들이 제각각 다른 공간에 둘 때마다, 다른 매체로 형상화할 때마다, 재가공될 때마다 어떠한 다면체로 보일지 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물적인 생활에 도취된 현대인들에게서 성찰의 미덕을 발견하기 어렵다. 기실 성찰이라는 것도 마냥 쉽지 않다. 단회적이고 단면적인 성찰은 십중팔구 실패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여 성찰은 몰성찰의 나를 성찰하고, 다시 성찰하는 나를 성찰하고, 또다시 그렇게 성찰하는 나를 다시 성찰하는 식으로 겹겹이 진행되어야 그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의 구작가가 소설 속의 은설로 등장하고, 그 안의 시나리오 속의 설하로 등장하고 있는 구성에 큰 영감을 받았다. 러시아의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자신의 상처와 멍이 새겨진 바이오그래피를 객체화하여 분리하고, 그것을 이중 삼중으로 사용하고 있는 용기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리고 작품 곳곳에서 삶에 대한 아포리즘을 심어가며 삶을 복기하고 있는 태도에 감동 받았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이 영화화되기를 기대하는 듯하다. 삽입된 시나리오의 꼼꼼함이 그 단서이다. 그녀의 오랜 애독자로서 꼭 그리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그리고 작가는 <종이비행기>의 본문 중에, 영화화된 켄 키시(Ken Kesey)의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를 일부러 언급함으로써 두 작품을 비교하며 읽을 것을 제안하는 듯하다. 물론 구작가 자신의 체험담을 녹인 작품이기 때문에, 그 어떤 표절이나 오마주에 관련한 섣부른 평은 비껴갈 듯하다. 그저 독자들이 흥미롭게 읽고 비교하며 널리 화제로 삼게 되는 일을 더 반길 것이다. 열린 창문에서 애처롭고 절박하게 종이비행기를 날렸던 여인들은.

이하, 소설의 인상적인 첫문장 :

운명은 우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얼마나 교묘한 위장인가.
그런가 하면 우연도 운명의 모습을 할 때가 있다.
얼마나 기발한 변장인가.
어쨌든 하나는 운명이고 하나는 우연인 게 분명하지만, 문제는
카멜레온 같은 그 둘을 구별하기가 어렵다는 거다.
까닭에 어떤 이는 우연과 운명을 뭉뚱그려 인연이라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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