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비행기
구소은 지음 / 봄의영토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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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낙원, 타인의 모방, 그리고 좌절된 해방 기록

- 구소은 작, <종이비행기>(봄의 영토, 2024년)



장 폴 사르트르는 그의 <타인론>에서 기술하길, 타인이라는 존재는 나의 지옥이면서 나의 근거라고 했다. 매혹적인 어록 같다. 그런데 그 함의가 꼭 그럴까? 그렇지는 않다. 예리한 인간론을 전개하며 사르트르는 타인의 출현(혹은 타인의 존재)은 ‘나’가 주체적으로 삶의 내용을 채워가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적어두었기 때문이다. 


본래 적극적인 무신론자인 사르트르는 신이 부과한, 혹은 타자가 부여한 본질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을 두고 텅 빈 ‘무’(無, le neant)라 칭했다. 다만 그와 같은 백지상태에서 우리는 내 존재의 본질과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할 ‘자유’를, 마냥 천형(天刑)과 같이 짊어진다. ‘오늘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하며 소소하게 고민하는 자유와, ‘이 직장을 때려치울까, 말까?’ 하는 심중한 자유로부터 ‘살기 싫은 이 세상, 콱 등질까?’ 하는 절체절명의 자유까지 실제로 자유란 엄청난 모험과 파국까지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소은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제2의 주인공 연지는 정신병원에서 나온 후, 그야말로 ‘텅 비어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채우기 위해 나름대로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그녀는 혐광성(嫌光性) 곤충처럼 한국 사회의 그늘에서 그늘로 배회하다가, 늘상 부러웠던 은설 언니의 삶을 모방하고 그 삶의 일부를 훔치고 마침내 안타까운 파국을 맞는다. 헤어나올 수 없는 인생의 음습한 음지에서는 조금 더 볕이 드리워진 타인의 삶 자체가 하나의 낙원과 같이 보였던 셈이다. 다만 그 낙원은 성서에 나온 ‘선악과’처럼 마냥 바라만 보기만 해야 할, 강직한 제한이 드리워 있었다는 점을 짐짓 외면했던 것 같다. 


연지를 잔잔히 연민하고 도움의 손길을 주었던 은설은, 연지가 시나브로 자신의 삶에 침투해 들어온 일들로 적잖이 동요하고 그녀가 드리운 삶의 얼룩으로 인해 복잡한 심경에 휩싸이게 된다.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연지가 자신의 세세한 것들을 모방하다, 마침내 사랑마저 탈취해 가려 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 은설이 배은망덕한 연지에 대한 인간적 동정을 끝끝내 거두지 않았던 데에 있다. 그리고 타인에 의해 한 입 베어진 자신의 삶이 ‘정작 무엇이었던가?’ 하며 삶을 반추하고 그 이유를 구할 계기로 삼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타인에게는 도피처나 낙원처럼 보였던 자신의 실존도 심중한 번뇌 가운데 놓여있음은 피장파장, 일반이었다. 이것은 독자에게 던져진 열린 결말이 잘 보여준다. 


두 주요 인물 중 하나는 실존적 허기를 채우기 위한 모방으로, 또 하나는 베풀었던 도움만큼 양보하고 싶지는 않은 현대인의 이율배반적 관용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소설은 주인공 은설을 통해 인간애와 인간됨에 대한 마지막 기대는 끝끝내 버리고 있지 않음을 내보인다. 나는 이것이 지금껏 세상에 선뵈었던 구작가의 작품들로부터 찾아지는 일관된 주제의식이라고 본다. 


소설이 발간될 즈음 구소은 작가는 SNS에서 자신이 직접적으로 겪은 체험을 소재로 했다고 밝혔다. 제삼자가 관찰하자면 마냥 블랙 코메디와 같은 사건에 휘말려 작가가 실제로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한 적이 있던 것이다. 소설 속의 두 여인 중에 언니인 은설이 바로 작가 자신의 투사이다. 그렇다면 동생으로 삼은 연지는 실존 인물일까? 실존 인물이겠지만, 작가는 자신과 그녀를 등장인물 삼아 상상을 더해 풀어 내고자 하는 사유와 주제를 더 확충해 갔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시라. 이야기 대부분이 픽션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구소은 작가의 전작 <검은 모래>, <무국적자>, <파란방>은 전통적인 소설 기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한다면 새 작품의 구성은 사뭇 특이하다. 소설 공간 안의 주인공 은설을 따라서는 소설로 쓰고 있고, 소설 속 영화 공간 안에서는 재가공된 주인공 설하를 따라서 시나리오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기법을 통해 작가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인생과 사건에 대해 괄호를 치고 엄밀하게 바라볼 것을 촉구하는 듯하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가공하여 소설로 쓰고 그 소설 속에서 그것을 다시 시나리오로 쓰는 방식을 통하여, 우리의 실존과 사연들이 제각각 다른 공간에 둘 때마다, 다른 매체로 형상화할 때마다, 재가공될 때마다 어떠한 다면체로 보일지 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물적인 생활에 도취된 현대인들에게서 성찰의 미덕을 발견하기 어렵다. 기실 성찰이라는 것도 마냥 쉽지 않다. 단회적이고 단면적인 성찰은 십중팔구 실패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여 성찰은 몰성찰의 나를 성찰하고, 다시 성찰하는 나를 성찰하고, 또다시 그렇게 성찰하는 나를 다시 성찰하는 식으로 겹겹이 진행되어야 그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의 구작가가 소설 속의 은설로 등장하고, 그 안의 시나리오 속의 설하로 등장하고 있는 구성에 큰 영감을 받았다. 러시아의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자신의 상처와 멍이 새겨진 바이오그래피를 객체화하여 분리하고, 그것을 이중 삼중으로 사용하고 있는 용기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리고 작품 곳곳에서 삶에 대한 아포리즘을 심어가며 삶을 복기하고 있는 태도에 감동 받았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이 영화화되기를 기대하는 듯하다. 삽입된 시나리오의 꼼꼼함이 그 단서이다. 그녀의 오랜 애독자로서 꼭 그리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그리고 작가는 <종이비행기>의 본문 중에, 영화화된 켄 키시(Ken Kesey)의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를 일부러 언급함으로써 두 작품을 비교하며 읽을 것을 제안하는 듯하다. 물론 구작가 자신의 체험담을 녹인 작품이기 때문에, 그 어떤 표절이나 오마주에 관련한 섣부른 평은 비껴갈 듯하다. 그저 독자들이 흥미롭게 읽고 비교하며 널리 화제로 삼게 되는 일을 더 반길 것이다. 열린 창문에서 애처롭고 절박하게 종이비행기를 날렸던 여인들은.

이하, 소설의 인상적인 첫문장 :

운명은 우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얼마나 교묘한 위장인가.
그런가 하면 우연도 운명의 모습을 할 때가 있다.
얼마나 기발한 변장인가.
어쨌든 하나는 운명이고 하나는 우연인 게 분명하지만, 문제는
카멜레온 같은 그 둘을 구별하기가 어렵다는 거다.
까닭에 어떤 이는 우연과 운명을 뭉뚱그려 인연이라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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