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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309동1201호(김민섭)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읽고 섣불리 글을 쓸 수 없었다. 내겐 너무나도 익숙한 대학에서 오랫동안 외면하던 이야기였다.
내가 다니는 대학 광장에는 시간강사 처우개선을 말하는 플래카드와 그 밑에 텐트 하나가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텐트는 걷힌 적이 없었다. 나는 그 안에 사람이 있긴 있는지, 그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아직 알지 못한다. 몇 년동안이나 의문을 해결하지 않고 지나칠 수 있었던 건 시간 강사라는 이슈가 나와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시간강사계에 이슈가 생긴듯했다. 무슨 법안 같은 게 도입된다고 하는 것 같았다. 교수님은, 아니 강사님은 지나가듯 강의실 내의 인권을 말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 내용을 지웠다. 시간강사는 나와 관련 있는 사람이지만, 이 모든 것은 대학이 할 일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대학원생 이슈는 그래도 더 피부에 와 닿았다. 대학원생 선배나 친구들은 대학원의 부조리를 개그 소재로 썼다. 그리고 나중에 졸업하고 터뜨리겠다고, 그래도 우리 교수님은 좋은 편이라고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내 친구는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가끔은 새벽까지 일하곤 했다. 최저시급을 받지 않는 노동자가 조금 이상했지만, 대학원생을 노동자로 치지 않는 게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니 그리 이상하지도 않았다. 가끔 뉴스에는 교수가 본인 편하겠다고 대학원생에게 스캔 팔 만장을 시켰다는 기사가 뜨곤 했다.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함에 분노했다. 하지만 나는 일상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시간강사의 처우를 흘리듯 언급했던 수업에서 나는 행복에 관한 레포트를 제출했다. 타인이 불행한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당신 옆의 사람들에게 조금 더 관심 갖기를 권했다. 그러나 나는 타인이 불행한 행복을 비판하면서, 레포트를 제출받을 강사님의 불행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식도 없었다.
변명하자면 일개 대학생인 내가 타인의 삶을 낱낱이 알기는 어렵다. 이렇게 지방 강사의 삶을 풀어낸 글을 보면, 나는 이게 소설 같다.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기에, 단 한 번도 공감하려 애쓰지 않았다고 변명해본다. 나는 내 삶을 살아가기가 벅찼다. 타인의 고통을 떠안자고 주장할 여유는 있었지만, 막상 고통을 떠안고 상처받을 여유는 없었다.
내가 여전히 글을 쓰기 어려웠던 건, 내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들이 4대 보험을 보장받지 못하는 동안, 나는 치열하게 내게 맡겨진 삶을 살아갈 테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정의를 찾고 있지만, 그 방향이 대학원생과 시간강사 처우개선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고 있다. 일시적인 공감이 그들에게 무슨 힘이 될지 무력해졌다.
소설 <쇼코의 미소> 작품 해설에서 이런 말을 읽었다. '지적인 것이 아닌, 정서적 공감이 지금 이 시대에 유효한 계몽 양식일 것이다.' 나는 이 문장에 깊이 공감했다. 그러나 현실로 다시 돌아오면 나의 공감은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이 무슨 쓸모가 있으랴.
다만 내가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앞으로 더 힘든 사람 편에 설 수 있겠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내가 사장이라도, 교수라도, 선배라도 그랬겠다’라고 생각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널렸다. 행동하지 못하는 나는, 어딘가에 있을 그들의 고통을 인지하고 있다고 부끄러운 위로를 건넨다. 그래도 나는 다른 순간 다른 장소에서,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 편을 들겠다고 다짐한다. 이 정도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답을 찾은 것 같아 글을 시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