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 1등급 고미정이 망하면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우신영 지음 / 우리학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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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글은 우리학교(@woorischool)의 리뷰어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투명한 감옥, 집착의 고원(高原)

대치동은 대한민국 서울의 한 좌표를 지칭하지만 정작 우리가 목도하는 실체는 인간의 욕망과 공포가 결착되어 빚어진 거대한 ‘증류기’에 가깝습니다. 유년의 천진함과 청춘의 생동을 정제하여 미래라는 신기루를 향해 오직 등급이라는 결정체만을 남기려는 오묘한 연금술의 현장. 우신영의 필치는 이 견고한 콘크리트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영혼들을 관찰자가 아닌 함께 숨을 참는 동행자의 시선으로 고밀도의 압박 속에 갇힌 개별 단면들을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포착해냅니다. 지도 상에서는 그저 강남의 한 구역으로 명시되는 만큼 화려한 불빛으로 치장되어 있으나 실상은 타인의 기대를 동력 삼아 밤마다 자아를 소각하는 ‘침묵의 화로’입니다.

하얗게 바스러진 마음의 잔상

아이들은 반항이라는 치기 어리고 패기 넘치는 날갯짓조차 잊은 채 ‘박제된 새’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다섯 살 무렵부터 시작된 가혹한 질주는 그들을 성숙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단지 일찍 노화하게 했을 뿐입다. 무언가 타오른 뒤 남겨진 잔해는 더 이상 뜨겁지 않듯이 ‘재(灰)’라는 시린 비유가 이야기를 사무치게 관통합니다. 열정의 부재나 단순한 나태가 아닌 과잉된 연소 끝에 도달한 무감각의 상태를 대변하는 주인공 고미정의 시니컬한 독백은 사실 무너져 내리는 내면을 지탱하려는 처절한 지팡이입니다. 편의점의 고열량·고카페인 음료로 혈관을 채우고 가출의 종착지로 스터디 카페를 택하는 촌극은, 오늘날 청소년들이 겪는 번아웃이 ‘정서적 기아 상태(고갈)’임을 물리적 실재로 드러냅니다.

맹목적 투쟁의 쳇바퀴가 삼켜버린 요람

작가는 아이들의 고통만을 단편적으로 조망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의 시선을 확장하여 이 기이한 생태계를 지탱하는 주변인들의 속사정까지 가감 없이 들춰냅니다. 학원가 뒷골목 전당포에 명품 가방과 함께 자신의 불안을 저당 잡힌 부모들, 학생들의 누렇게 뜬 안색에서 시대의 병증을 읽어내는 강사의 시선은 이 애사의 입체성을 완성합니다. 대치동은 아무개의 악의로 굴러가는 기계가 아니라, 모두가 두려움이라는 유령에 쫓겨 상대를 갉아먹으며 갈무리된 웅장한 유토피아적 연옥입니다. 전원이 각자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서로를 연료로 소모하는 서글픈 순환의 고리를 방불케 합니다. 그 처참한 뫼비우스의 띠에 편승된 새싹들의 행복은 언제나 ‘보다 발전된 내일’이라는 가상의 환각을 위해 무참히 유예됩니다. 저자는 냉소적인 시선 끝에 다정한 연민의 필터를 씌워, 그들이 흘리는 땀방울 속에 섞인 비릿한 눈물까지 정직하게 기록합니다.

느슨한 행진을 포용하는 토닥임

해당 서사가 건네는 위로는 값싼 낙관이 아닙니다. 도리어 대중들이 삶의 지독한 쓴맛을 정면으로 응시하도록 유도합니다. ‘탈출’이라는 극단적 해방구가 아닌, ‘보폭 수정’이라는 현실적 구원을 제안한다는 부분에서 우리는 소설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기심에 의해 빈틈 없이 설계된 트랙을 벗어나는 행위가 곧 소멸로 치부되는 세계에서, 역설적으로 어긋남의 미학이 논파됩니다. 정해진 동일한 결승점을 향해 전력 질주하지 않아도, 군중의 속도에 질식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나직한 읊조림. 시스템을 파괴하라는 선동이 아니라, 냉혹하게 짓누르는 삶의 무게에 속수무책으로 파묻히지 않도록 기어이 자신만의 작은 오아시스를 구축하라는 또는 도피처를 찾으라는 다정한 권유입니다. 덜 자랐거나 혹은 지나치게 웃자라 버린 존재들이 개개인만의 고유한 그늘에서 숨을 고를 수 있도록 문장마다 쉼표를 찍어 그들의 공간을 마련해줍니다.

끝내 ‘성공’이라는 마침표를 찍지 않는 대신 조바심의 파고를 넘어서는 부표 하나를 띄워 보내는 본 작품은 순위 매기기에 함몰되어 자신의 얼굴을 잃어버린 ‘미정’들과 마주하는 쓸쓸하고도 깊은 눈맞춤입니다.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는 깨닫게 됩니다. 1등급이라는 숫자가 보장하는 안온함보다, 비록 휘청거릴지언정 자신만의 페이스로 내딛는 지면의 감각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잿더미 속에서도 기어이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절망의 끝에서 다시 시작될 누군가의 유일무이한 계절을 예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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