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 창비청소년문학 145
김민서 지음 / 창비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스스로를 휘발시키는 자들을 ‘호구’라 명명하며 조롱하는 계산적 합리주의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거절의 수사학을 상실한 채 손해를 감내하는 이들에게 세상은 기꺼이 ‘낙오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깁니다. 그러나 김민서 작가의 서사는 이러한 속물적 문법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세속적 승리의 자장에서 망명한 한 노인과 그 자취를 추적하는 손주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품격이 ‘획득한 성취’가 아닌 ‘정직한 소진’에서 기원함을 증명합니다. 이것은 비루한 일상에 대한 소묘를 넘어, 마멸되어 가는 영혼이 자기 자신에게 헌사하는 장엄한 실존적 비가입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행복하지 않아도 생의 농밀함을 추구하겠다는 주인공의 의지는 이 텍스트에서 가장 전율적인 관점의 전회를 보여줍니다. 현대인은 ‘긍정의 의무’ 아래 유폐되어 있으며, 안락한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우울은 교정되어야 할 오류로 치부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 강요된 희열을 거절하고, 자신의 고독과 결핍이라는 ‘수직적 심연’으로 하강하여 침잠하기를 자처합니다.

먼지 쌓인 밀실에서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미안하다는 고백은 단순한 사과를 초월합니다. 그것은 평생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페르소나에 가려져 정작 내면의 진실을 유기해 왔던 자기 소외에 대한 뼈아픈 성찰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선량함’ 혹은 ‘유능함’이라는 외피를 유지하기 위해 내면의 울음을 짓밟아 왔습니까. 저자는 이 고해의 과정을 통해 독자를 거울 앞으로 정중히 소환합니다. 타인에게는 관대했으나 정작 자신에게는 가혹했던 모든 ‘물렁한 영혼’들에게, 이제 그만 가해를 멈추고 본성 그대로의 나를 조우하라고 권유합니다.

결말을 장식하는 ‘불계패’라는 은유는 작가가 도달한 철학적 정점입니다. 집 수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돌을 거두는 행위는, 세상을 지배하는 평가 시스템으로부터의 자발적 탈주를 의미합니다. 더 이상 계산하지 않겠다는 결단은, 자신의 생애를 교환가치가 아닌 절대가치의 영역으로 전이시키겠다는 의지입니다. 인생은 타인의 규격에 맞춰 자신을 구겨 넣는 과정이 아니라, 비록 해지고 상처 입었을지라도 온전히 펼쳐 보임으로써 완성되는 것임을 소설은 역설합니다. 호구는 오히려 타자의 슬픔을 수용하는 넉넉한 기명이자, 냉소에 부러지지 않고 휘어질 줄 아는 유연한 강인함의 증거로 치환됩니다. 고단한 나그네길을 마치고 비로소 평온에 든 노인의 뒷모습처럼, 우리 역시 각자의 ‘불계패’를 선언하며 진정한 자유의 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여정이 효율적이지 못하고, 더디며, 때로는 착취당하는 듯하여 무력해질 때 이 문장들을 기억하세요. 당신이 비워준 그 자리들이 사실은 타인의 심신이 안식할 마지막 처소였음을, 그리고 행복이라는 강박 없이도 충분히 깊은 당신의 생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경이로운 수였음을 이 기록은 방증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