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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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탄처럼 새카맣지만 다디단 오레오 쿠키 같은 책이다. 까맣고 딱딱한 우리 역사의 질곡과 어둠을 말하고 있지만 유려한 문장들에 서린 시선이 하얗고 부드럽다.

묵 할머니의 ‘어서 이야기가 듣고 싶어 죽겠지?’ 하던 말. 이상하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었다. 그리고 이내 깨달음이 왔다. 그게 일종의 선전포고였구나 하고.
정말 몰입했고 밀도 있게 읽었다. 그래서 그렇게 읽을 때만 가닿을 수 있는 온전한 압도와 황홀을 만났다. 다 읽고 나니 후련한 듯 허전한 듯 묘한 상실감에 마음이 휑했다. 내가 가진 언어가 일시적으로 마비된 듯 혹은 훌훌 휘발돼버린 느낌마저 들었다. 이 이야기의 중력탓이다.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이 온전히 ‘이야기’라고 느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애가 닳았고 남은 분량이 줄어드는 게 보여서 또 애가 탔다. 또 같은 이유로 줄곧 마음에서 내쳐지지 않는 머쓱함과 싸우기도 했다. 왜냐.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강제 징용, 분단, 냉전까지. 이 책이 굵직하게 다루는 것이란 죄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전래동화라도 본다는 듯 흥미와 호기심으로 홀린 듯이 읽어가는 스스로를 멈출 수가 없었다.

고맙게도 이 책에는 ‘이새리’라는 영리한 장치가 존재한다. 이 방대하고 위대한 이야기는 그의 부고 인터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작업의 특성상 상대를 향한 존중, 이해, 침묵은 필수이다. 그 처지에 나를 의탁하면 이런 묵직한 이야기를 흥미있게 탐독하는 것은 정당하게 느껴진다.
반면 이 책이 그저 흥미로만, 즉 우리 역사에 슬쩍 물을 타고 한낱 입맛에 맞는 소재로만 썼느냐 묻는다면 그건 전혀 아니라고 답하겠다. 뭐랄까. 루소가 미희의 담담한 술회를 듣던 느낌과 가까웠다고 보는 게 맞겠다. 때로는 그저 간결한 한마디가 진실 어린 울림을 주기도 하니까.
그래서인지 흥미로운 이야기로 둔갑한 묵 할머니의 인생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동하고 마음이 열린다. 만약 내가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이 이야기를 그저 잘 벼른 허구로 느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우리’라면 절로 안다. 설령 이게 진짜가 아닐지언정 진실된 이야기라는 걸.

새삼 이야기란 얼마나 힘이 센 물건인가. 알고 싶고 더 듣고 싶은 것에 절로 몸이 기울고 귀가 열린다. 또한 이야기라는 건 본질적으로 짝이 맞아야 하는 놀음이다. 용말의 이야기가 수많은 소녀들의 밤을 이끌었던 것처럼 화자도, 맛있게 들어주는 청자도 모두 중요하다. 그게 아니면 한낱 공허 속의 외침일 수뿐이 없다.

이 책에서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으로 파고들어 치유를 주고 삶을 건네주는 장면은 계속 등장한다. 용말의 이야기가 또 다른 용말을 살게 하고 다시 묵 할머니는 새리라는 인물을 통해 사실은 독자에게 삶을 전달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흘러가고 이야기를 잇는 것으로 삶은 다른 삶을 잇는다. 이야기가 자신의 생명력으로 생채기를 치유하는 동안 우리는 공명한다.

결국 흥미로운 하얀 머리 할머니의 이야기가 내게도 ‘묵’이 되었나 보다. 그가 자아낸 먹물이 내 안에 깊이 스며들어서 이 땅을 스쳐 간 수많은 이름 없는 여자들이 아주 오래도록 떠오를 것같다.

-스포일까봐 인상적인 장면을 따로 적습니다.
1. 묵 할머니의 토식증은 우리의 뿌리가 뻗어나가는 땅에 대한 이야기 같았다. 피의 역사가 빈번했던 우리의 땅. 묵 할머니는 자신의 손으로 같은 피를 나눠 가진 이를 해치고 피가 배어든 흙을 본 순간 토식을 멈춘다. 오랜 후, 모든 걸 술회하고 짐을 벗어 던진 듯이 다시 흙을 먹으며 눈을 감는다.
2. 용말 에피소드에서 퍼져야 생명력을 갖는 것과 대조적으로 둘만이 간직해야 더 아름다워지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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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계속 -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모토로 아무튼 시리즈 7
김교석 지음 / 위고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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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러브리티가 아닌 이상 자서전을 꿈꾸기 힘든 세상에서 이런 보통의 소소한 전기가 나왔다는 자체가 한 편의 산뜻한 유머 같아서 일단 좋다. 누군가의 룰, 습관, 시시콜콜함들이 기록되고 그냥 흘려들어도 좋고 새겨들어도 좋은 기분 좋은 대화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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