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창비시선 439
이영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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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참 잘 뽑았다. 이 시집은 '되어가는 중인 것들에 대해 '되어가는 중인" 언어로 쓴 '되어가는 중의' 시들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출발은 했으나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해하기 위해 읽고자 하니 어려웠다. 애써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읽으니 그제서야 다가왔다.

🏷 (p22. [슬럼] 중 일부)
슬럼프 안에 담겨 있으면 포근하다
삐뚤빼뚤 열린 하늘을 본다 부피를 본다 색을 본다 경계를 본다 무결을 본다 연 대로 열린 대로
보이는 걸 보고 있다 올려다보는 사람을 본다
그 사람을 구태여 하지 않는다
본다가
본다


구태여 하지 않고 보이는 걸 보듯이 이 시를 읽는다 그러다보면 시 안에서 내 모습이 보인다

🏷(p91. [암묵] 중 일부)
토론하는 사람들을 보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면 나는 어디에도 관여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충분하다고
착각하면서, 솔직해진다 솔직하다는 말이 얼마나 솔직하지 않은 말인지 생각하면서

생각하지 않아도 생각은 되고 만다
되는 것들에 굳이 관여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은 없다고 또 생각하면서
썼던 문장을 지운다 지운 문장을 다시 쓰고 고친다 고친 문장은 지워진다


가장 좋았던 시는 [청사진]이었다. 시는 시 나름의 힘이 있다. 에세이나 소설, 사진이나 영상이 전달할 수 없는 간략한 단어들의 힘.

🏷 (p104. [청사진] 중 일부
건물을 올리며 네 명이 죽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건물은 보현적 각도와 높이의 계단을 구축하고 밟으며 차근차근 벽돌을 소모한다 삽과 젓가락을 소모한다 함바집 할머니를 소모하고 간이화장실과 병실 침대를, 시간을, 짱돌을 무더기로 소모하고

본래 이곳에 알알이 박혀 있던, 변변한 생활을 소모하며
누군가 기쁘고
누군가 슬펐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건물을 올리며 세명이 더 죽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관리자의 관리자의 관리자는
일곱이면 선방이라 생각했다 7은 모나미 볼펜을 한번도 안 떼고 그릴 수 있는 형태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전혀. 그러나 시인이 이 단어를 자꾸 반복하는 의도가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어울리지 않은 단어, 아니지 어울리면 안되는 단어를 나란히 놓았기에 더 진하게 인상에 남는다. 거부감이 들면 그제서야 아 잠깐만, 하고 멈춰서 생각을 한다. 큰 일을 하기 위해 감수하는 희생은 누군가에게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왜 큰 일을 이루려는 자가 따로 있고 희생되는 자가 따로 있는가 그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희생을 단순한 숫자로만 바라보는 관리자의 관리자의 관리자. 모나미 볼펜으로 종이에 7을 써보며 '펜을 하나도 떼지 않고 그릴 수 있다는' 놀라운(?) 발견을 하고 스스로에게 감탄했을 관리자의 관리자를 떠올린다

머리로 이해되기 전에 피부에서부터 전달되어 가슴이 움직이게 하는 힘. 분명 시인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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