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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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정치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호, 불호와 관계없이 중요한 고전 텍스트로 인정받고 있다. 그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갖고 있는 '미덕(천병희 선생님은 '탁월함'으로 번역하셨다)'이라는 윤리적 목적론 때문이다.    

이에 반해 공리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정치를 양과 기능의 문제로 파악한다. 예컨대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제레미 벤담의 유명한 명제는 정치를 최대다수의 행복이라는 양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있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자인 로버트 노직은 고대 중국의 철학자 양주처럼 자신의 행복과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다른 사람의 불행과 빈곤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마지막으로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있어, 정치란 '공정한 (시장)경쟁'이라는 탈을 쓴 카우보이의 논리에 다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탁월함'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정치의 목적을 설명한다. 국가의 목적은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함이고, 인간의 진정한 삶이란 자신의 탁월함을 신장시키는 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모든 인간은 동등한 '탁월함'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는 크게 노예적인 삶과 주인적인 삶이 있다.  

여기서 주인적인 삶을 가진 완벽한 시민만이 국가(폴리스)를 위해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노예와 여자 뿐만 아니라, 주인적인 삶(다른 말로 '여가')을 갖지 못한 농민과 장인(노동자)들도 시민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노예적인 삶을 살고 있거나, '여가'를 가지고 있지 못해 정치와 철학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쓸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일반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주인적인 삶을 살고 있을까? 일반 시민들의 (높은 투표율을 비롯해) 정치참여를 원한다면, 그들에게 정치와 철학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쓸 수 있는 여가를 줘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탁월함'을 특정한 인간이 가지는 본성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보편적인 요소로 봐야하지 않을까?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는 개념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갖고 있는 '감각적인 것'의 차별성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또한 <무지한 스승>에서 랑시에르는 인간의 지적 평등성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내가 보기에 랑시에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귀족적 '탁월함'을 인간 모두가 갖고 잇는 보편적 탁월함으로 변형시킨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앞 문장에서 말한 '여가'의 문제다. '여가'는 단지 노동력을 재충전하기 위한 재생산의 시간(경제적 시간)이 아니다. '여가'란 시민이 자신의 정당한 정치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시간이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여가와 탁월함을 불평등의 근거로 사용하였지만, 이를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 적용시키면 평등한 지적 '탁월함'이라는 인식론과 정치적 '여가' 개념은 민주주의를 강화시키기 위해 철학적 무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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