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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ㅣ 창비시선 198
조용미 지음 / 창비 / 2000년 6월
평점 :
<전략> 나는 내 시를 읽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다. 순간 순간 아득해져서 몇 번이고 시집을 덮었다 읽기를, 그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기를, 그래서 조금, 아주 조금, 그들의 마음을 쓰다듬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중략>
내가 먼저 가지 않은 길은 내가 가장 가고 싶은 길이었다. 그 길이 저만치서 나를 바라본다.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그 길이. 길 위에 있는 자, 길 위에 있는자 하는 자들, 영혼이 길 위에 있어야만 안심이 되는 자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미국에서 살면서 가장 아쉬워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한국시를 읽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시를 즐겨 읽던 나에게는 이러한 한국에서 하던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도 - 그곳에서의 생활을 꽤나 힘들게 만든 것들이었다. 드디어 한국에 왔고, 성진이를 기다리는 잠시의 시간동안 책을 한 권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읽었다.
책을 잡는, 그리고 책을 읽는, 그리고 지금 이렇게 책을 다 읽고 가슴팍에 두고 있는, 책장을 넘기며 어떤 시를 읽었나 훝어 보는 이 순간, 언제나 나는 그 싸아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것은 詩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결정체.
이것은 중독성이 강하다. 읽으면 또 읽게 되고, 다음 번에는 좀 더 강한 그것을 기다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를 읽게 된다, 젠장할!--------------------
이렇게 시집을 읽었다고 해서, 내가 시인에 대해서 왈가불가 한다는 것은 사실 사기에 가까운 일이다. 시인의 언어를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의 삶을 이해 못하는 내가 어찌 그것을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저 조용미를 접한 나의 느낌을 말하자면...
시인의 영혼은 숲에 갖혀 있는 것 같다. 그 숲에서 공포감에 때론 불안감에 쫓기고 있다고나 할까? 계속 나오는 닫힌 숲에서의 이야기, 그 숲에서 시인이 본 사물에 관한. (왜 시인은 그곳에 있어야 할까? 시인에 대해 개인적으로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럴 때 크나큰 불행이다.)
새벽 빗소리는 뚝뚝 아는 이의 거처를 지우며 내 방으로 흘러든다 그곳은 검은색으로 휩싸이며 지워진다 내 아는 이의 거처에도 비는 내리겠지만 그 비는 이제 내게로 오지 못한다
이런 시구를 읽었다 <삶이 내게 쓰는 속임수를 나는 알고 있다>. 하나의 충격이상이었다. 그래 나는 삶은 언제나 정직하고 공평할 줄 알았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사람들까지도 모두 잘 사는 그런 사회를 생각했었는데, 삶 자체는 그러지 않은 것 같다. 많은 부분 삶에 나 자신을 떠맡기고, 의지해 왔었는데, 그 넘은 정말 좋은 넘인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다. 저 시구가 나를 일깨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