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고독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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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너무 크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가 손가락들을 보며 느끼고 호빗이 용을 보며 느꼈으며 광기의 산맥에 오른 여행자가 느낀데다 오랑시의 시민들이 페스트를 겪으며 느꼈던, 그리고 내가 그들이 되는 정서적 몰입 상태에서 함께 겼었던 바로 그 영접 체험적인, 우주적이고 원대한 영혼의 유리와 하늘 위의 부유와 거대화와 혼연일체의 감정이 느껴진다. 유비가 태어나고 도원결의를 하고 제갈량을 만나고 아두가 왕이 되어 사마의에게 정복당하는 서사시보다 더욱 긴 마술적인 시간이 하나도 빠짐없이 세밀화 동물사전처럼 서술되어있는 저작에서 호랑이를 마주해 무의식의 초저주파를 듣는 것 마냥 압박감을 느낀다.

더불어서 '감히' '해부'하여 심도있게 '관찰' 하고 '카테고리화' 해서 데이터로 '정리' 한 뒤 '해석'을 가감하여 이리저리 '재편집' 과정을 통해 나의 것으로, 2차 창작물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어린아이가 브라키오 사우르스, 스테고 사우루스 등의 멋진 고대의 거대 공룡이나 가오가이거, 골드런 따위의 막강한 로봇의 커다람을 보며 느꼈던, 막연하고 모호하며 순수한 크기와 전지 전능함과 독립 변수로 존재함에 대한 부러움, 즉 아이가 어른의 어른스러움에 가지는 한없이 천진하고 생각없는 동경심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을 현재의 암흑 속에 홀로 오롯이 서 있는 내가 진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영원히 지속될 합일과 정신공유에 대한 열망을 끊임없이 느끼는 것 - 즉 계속해서 나는 고독한 존재임을 재인식 하고 있는 것 뿐이니까. 그것은 선천적이며 필연적인 공허에서 비롯되는 허무감의 모든 타감정에 대한 배타적인 파시즘이며 다른 삼정, 희노애락과 오욕칠정을 압도하고 탄압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는 무력감의 독재이다.

 

만약 우주의 팽창계수가 1보다 작은 것으로 결론나 닫힌 우주로 귀결하게 된다면 빅뱅으로 퍼지기 시작한 우리의 우주는 작게 시작하여 점점 커지다가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다시 작아지기 시작하고 무로 돌아가는 형태를 띌 것이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의 돼지꼬리에 대한 공포로 시작하여 아마란따 우르술라와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의 무관심 속에 개미의 먹이가 된 돼지꼬리로 끝난 부엔디아 집안의 프랙탈 나선형 구조의 우주도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데 수직적으로 그들의 역사가 시간의 양피지 위에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지면서 팽창한 것은 부엔디아 집안의 인물 수와 사건 수이기도 하지만 공리주의적인 고독의 기수적인 총 합이기도 하다. 군중속의 고독. 가족의 인원수가 늘어남에 따라 소외되는 일은 적어지고 만족스런 단합과 떠들썩한 분위기와 친근한 태도가 자연히 발생했어야 하지만 그 반대였다. 자손이 번식해 갈수록 선대들은 자기만의 방언을 사용하고 오렌지색 원반을 목격했으며 유령이 되어 나타난데다 점차 흐려져갔다.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음에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레베까, 아우렐리아노 대령과 멜키아데스는 인간관계의 회색빛 결핍 속에 진정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부엔디아 집안에서 정의 회복은 오히려 몰락후에 이루어진다. 바나나 회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사람간의 단절을 물리적으로 형상화시켜주는 비 속에서(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빼뜨라 꼬떼쓰의 비로 인한 일시적 이산가족 상태) 떠나버린 마꼰도에는 마꼰도에는 부엔디아 사람이 단 둘만 남는다. 아마란따 우르술라와 아우렐리아노는 거기서, 자웅동체여서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를 동시에 가지는 달팽이 한 쌍이 온 몸을 철벅거리는 끈끈이로 감싼 채 각각 삽입하고 각각 삽입당하는 것을 동시에 경험하는, 그러한 정도의 합일을 경험하며 영혼을 교감한다.

사람이 늘 수록 고독함의 총체가 늘어나고 사람이 줄어들수록 고독함도 줄어든다. 이는 곧 필연적으로 사람이라는 존재와 영혼 자체가 고독함의 한 단위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네 명이면 고독도 네개. 회사가 사람 3000명을 쏴 죽이고 바다에 버렸는지, 200량 짜리 기차가 있었는지 장기하의 노래처럼 '정말 있었는지' 알 수 없게되는 혼란과 불확실성과 상호간의 의심만이 실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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