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자전 -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여덟 인생
김서령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연극배우 박정자씨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앞으로 어떤 여자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이미 여자이다. 앞으로 또 어떤 여자가 되어야 하는가?"
이 책에는 여덟 명의 여자가 나온다. 그녀들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듣고 나서, 나는 사람이 역사보다 강하고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역사로 부터 무엇을 배운다는 말 자체가 우스운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역사로 부터 배워 또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우리는 이미 사람이 아닌가! 사람.. 그 사람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 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 책을 읽고난 뒤의 느낌은 오래 집을 떠난 아들이 먼먼 길을 돌아 어머니의 무릎팍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고 난 뒤 찾아오는 후련함 같은 것이었다.
책을 읽기전 제목에서 연상했던 여성성 같은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해나 느낌이 없었다. 그냥 읽어 가는 내내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 아름답구나, 하는 새삼 느끼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연민 그리고 묵직한 힘같은 것이었다. 이 책은 어려운 시절, 폭력과 야만, 불운과 불행, 비참함이 횡횡하던 시절에 인간이 가진 존엄이라는 것을 지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도하고 거대한 역사란 그저 그 밑에 옅게 깔리는 배경같은 것일 뿐이었다.
개인적으로 최옥분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나는 코끝이 싱긋했다.
"나중에 합장하실 건가요?" "예, 그러려고요.."
수줍게 대답한다. 그들은 살아서 단 한달을 함께 살았다. 한달.. 평생에 한 달, 그 짧은 인연이 영원을 만들고 있다. 세상에는 수십년을 살아도 함께 살다가 원수가 되어 헤어지는 인연도 있고 한달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인연도 있다. 영원이란 살아 있는 인간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이다. (본문 176쪽)
덧붙여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저자 김서령씨의 무겁지 않으면서도 내밀한 문체가 아닌가 싶다. 그녀는 독자의 호흡과 감정의 리듬까지도 적절히 풀었다 쥐기를 반복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정갈하고 정겨운 문체이다.
- 한올 2007.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