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식물집사 - 늘 긴가민가한 식물 생활자들을 위한 친절한 가이드
대릴 쳉 지음, 강경이 옮김 / 휴(休)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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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웃자라고, 축 처지고, 노랗게 변하는 식물 앞에서 오늘도 아리송한 나를 위한 참 좋은 실용적 식물 알기 안내서이다. 공학자 출신의 식물학자라니 더 신뢰가 간다.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반려식물을 위한 일기는 눈에 익은 식물들을 위한 내용이 꼼꼼하게 들어가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책 전체에는 식물들의 삶을 깊이 알아갈 때 식물집사로서 느끼는 벅참과 뿌듯함이 기록되어 있다. 차분하게 읽으면서 식물연쇄살식마로서 그동안 쌓인 죄책감이 많이 덜어지기도 했다. 토론토에 거주한다는 저자는 아마도 나만큼 죄책감에 쌓여 있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과거 식물연쇄살식마들의 마음을 이렇게 잘 알 리가 없다.

나 역시 식물이란 옆에 붙어 서서 5분마다 물을 주지 않으면 쓰러져 죽어버리는 예민한 엄살쟁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식물은 아름다워야 하고 잎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하고 잎이 노랗게 변하면 죽어가고 있다고 넘겨짚었다. 이렇게 아끼고 사랑하는데 죽어버리다니 억울함을 느꼈고, 화원에선 그리 예뻤으면서 집에 와선 이상하게 변해버리는 식물에게 배신감까지 들었다. 반려식물을 최고로 만족시키기 위해 내 돌봄노동을 어떻게 최적화해야 하는지 몰랐고, 식물의 성장환경을 이해하고 자연의 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도 몰랐다.

강아지처럼 식물도 집에 오면 적응기를 거치고, 식물에게는 '주관적 생명'이란 것도 있었다. 물주기의 중요성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었고, 빛이 얼마나 중요한 요인인지 생각하지 못했다. 내게 식물은 수동적으로 한 곳에서 얌전히 아름답다는 칭찬이나 받다 어느 순간 생명줄을 놓아버리는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식물 또한 삶과 죽음을 겪고 있었고 반응하고 호응해왔는데 말이다. 그리고 식물은 그 식물에게 제공된 환경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익혀야 한다. 적절한 빛과 물을 공급하고 뿌리가 행복하도록 흙을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식물이 빛 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바꾸는 식물의 생명과 순환을 알아야 한다.

빛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조도계까지 이용해 관리되고 있는 저자의 식물들. "이 공간은 얼마나 밝지?"가 아니라 "이곳에서 내 식물들은 어떤 빛을 볼 수 있을까?"로 바꿔 물어야 한다. 식물의 잎 높이로 눈을 낮추고 식물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식물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누군가 "적은 빛에서도 잘 자란다"라고 말할 때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식물을 장식용으로만 사용하는 것을 합리화하려는 의도일 뿐이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음지에서 지내는 식물을 보며 "50풋캔들의 빛으로 우아하게 굶주리는 중"이라고 말하곤 한다. 식물이 비교적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을 수 있다.61쪽

풋캔들은 촛불 하나가 1피트 떨어진 곳에 있는 1제곱미터 면적을 비추는 밝기. 조도계는 풋캔들로 밝기를 알려 주고 200~800풋캔들이면 오든 열대 관엽식물이 만족스럽게 성장한다고 한다. 빛만 해도 직사광, 여과된 빛, 산란된 빛, 반사된 빛, 하늘 빛에 인공조명까지, 반려할 대상을 위한 기초 공부는 기본이다.

무엇보다 저자의 식물들이 마음껏 사랑받고 자라는 저자의 공간이 참 아름다웠다. 식물을 아끼는 사람들은 마음도 아름다울까. 내가 아는 식물러버들은 마음이 까칠하고 뾰족해 사람 상대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사람보다 말 없고 고분고분한 식물들한테 매달린다는 의심도 지울 수 없다. 무슨 이유든 식물을 환대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사정이 있겠지. 나도 그 사정이 있다. 저자의 반려식물 일기를 열심히 밑줄 긋고 읽으며 그 중 하나를 나의 반려로 만들어보려 한다. 나도 반려식물일기를 써야지. 식물연쇄살식마의 과거를 떨쳐버릴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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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램프 군과 과학실 친구들
우에타니 부부 지음, 조은숙 옮김 / 한겨레아이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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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책을 시리즈 그림책으로 내고 있는 우에타니 부부. 이번엔 <알로올램프 군과 과학실 친구들>. 과학실과 과학준비실이 나누어진 공간, 과학준비실에는 쓰지 않게 된 실험 기구들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열리지 않는 선반'이 있다. 학교의 교실에는 화이트보드 대신 전자칠판이 들어섰고 실험기구 친구들은 많이 신형으로 바뀌어 있다. 특히 알코올램프 군과 대척점에 있는 신형 과학실험기구의 대표주자 가스렌지 군은 오만하기까지 하다..

새롭고 성능이 좋은 가스렌지 군은 불붙이기 대결과 화력조절 대결에서 알코올램프 군을 물리치고 기세등등해진다. 그러다 가스렌지 군은 건방떨다 사고를 치고, 그 사고는 커지기 전에 경험이 많은 실험실 선배들의 도움 덕에 위기를 넘기고, 가스렌지 군이 겸손하게 사과하고 모두모두 화합하는 이야기.

어렸을 적 분동이 생각났다. 아무리 새로운 실험도구들이 늘어난다 해도 분동이 없다면 뭐로 양팔저울에서 질량을 재지? 도르레가 없다면 그 기능을 어떤 신형 기구가 대신할 수 있지? 용수철저울도 숫자를 디지털화해서 보여주는 것 이상 그 역할을 어떻게 신형화할 수 있지? 소리굽쇠가 없으면 소리의 전달방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신형 과학실험 도구들이 아무리 과학적으로 발전한다 해도 본래 그 기능을 배신하긴 어려울 텐데. <알코올램프 군과 과학실 친구들>처럼 오랜 기구 친구들의 경험과 원리는 지속될 수밖에


* 아쉬워서 첨언.

어린 친구들에게 오래된 과학실험기구의 역사를 알려주려는 의도도,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해가는 신구세력의 화합도 다 좋지만, 이 책의 과학실은 젠더 이퀄리티가 보장되지 않은 문제적 장소다. 일본 교사 부부가 쓴 글이고 일본의 과학실 문화는 다를 수도 있을까? 이 부부의 그림책에서 등장하는 과학실험실은 남자아이들만의 것은 아닐 텐데 캐릭터 대다수가 '~군'으로 불리고 있다. 오래된 기구들은 모두 '~씨'로 불린다. 증발접시는 영감님이고. 유일하게 깔때기 양이 등장하고 깔때기의 눈에 속눈썹을 달아 여성임을 표현했지만, 전체 이야기 속에서 한 딱 번 호명된다. 알코올램프 군이 상황을 정리하며 불 끄기 역할을 다른 기구들에게 나눠줄 때다. "깔때기 양은 혹시 모르니 소화기 군을 불러와줄 수 있을까?" 이게 다다. 기구들이 힘을 합쳐 불을 끄고 있을 때에도 깔때기 양은 소화기 옆에 서 있을 뿐이다.

"~군, ~양'이라는 호칭이 어린아이들이 볼 책에 실리기엔 너무 낙후된 표현인 데다 김 양, 김 군 등 이름 없이 성과 함께 불릴 때는 부정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군, 양 호칭이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겠지만 번역 과정에서 이렇게 오래된 표현을 거를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젠더불평등한 과학실에 낑겨있는 깔때기 양도 안쓰럽다. 또한 초등학교 과학시간은 여자아이들도 참여한다. 이 정도 감각이야 요즘 세상엔 당연히 요구되는 거 아닌가 싶은데, 어린이 책에 이런 말을 보태야 하다니 많이 씁쓸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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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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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 아버지와 언니와 엄마 이름의 한 자씩 조합해서 만들었다는 이름. 처음 들었을 때 천 년에 한 번 핀다는 난인가, 사람이름 같지 않았다. 그의 <노 랜드>를 읽고 그에 대해 검색해봤다. 인터뷰 기사가 꽤 되었는데, 너무 많이 읽었나, 마치 아는 사람이 된 것 같다.

SF를 잘 읽지 않았다. 별 이유 없었다. 감흥이 없어 허무맹랑하고 지루하게 읽힐 뿐이었다. 그 재미를 제대로 알게 된 건 옥타비아 버틀러를 만나고 나서였다. 여성작가들의 SF에는 뭔가 색다른 게 있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어린 시절 커서 작가가 되고 싶다 했을 때, 가족으로부터 들은 말은 '검둥이는 작가가 될 수 없어'였다. "얘야.....검둥이는 작가가 될 수 없어"란 말은 내가 마치 검둥이가 된 것처럼 읽혔다. 내가 나라는 존재여서 될 수 없었던 것들. 여자는 00가 될 수 없어. 가난한 여자는 00가 될 수 없어. 가난한 검둥이 여자는 00가 될 수 없어. 이렇게 확장되는 통제와 낙인. 전라도 사람은, 장애인은, 키가 작은 애는, 뚱뚱한 사람은, 동성애자는, 대학 안 나온 애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들은 영역마다 다양했다. 뭐든 될 수 있는 놈들이 만들어놓은 덫이었다.

흑인이자 여성이었던 옥타비아 버틀러는 거의 백인남자만 가득했던 SF작가의 세계로 들어섰다. 어느 정도 유명해지고 난 후에도 'SF가 흑인에게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어떤 종류의 문학이든 흑인에게 무슨 쓸모가 있었을까. 옥타비아 버틀러는 소설을 쓰든 시를 쓰든 희곡을 쓰든 뭐를 쓰든,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이다. 너 따위가, 흑인 주제에 유모로 취업하고 식모일을 배우고 뭔가 현실감있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지, 무슨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냐는 허접하고 영양가 없는 상투적인 질타. 이런 쓸모없는 질문은 주로 흑인에게서 왔다고 한다. 주로 사정 아는 사람들이 충고랍시고 던지는 말들이니 주로 흑인들이 했겠지.

옥타비아 버틀러는 SF가 상상력과 창조력을 자극하며 독자와 작가를 다져진 길 밖으로, 모두가 말하고 행하고 생각하는 좁고 좁은 오솔길 밖으로 끌어낸다고 말한다. 그래서 흑인 여성이 SF를 쓰는 이유를 이해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SF와 판타지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실에 대해 쓴다는 건 너무 가혹하고 상상력은 제한되어 쓸 때마다 비통했을 수밖에 없으므로. 현실을 벗어나자 그야말로 생각이 폭발하고, 그 에너지들이 뻗어간 곳에서 막연한 상상이 구체화되고, 그래서 아름답고 신비롭고 또 오묘한 이야기들이 쏟아졌을 것 같다.

<노 랜드>는 그렇게 쏟아진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묶어 보여준다. 인류가 버린 쓰레기를 먹는 괴물이 나오고, 인간은 이미 멸종하고 지구도 쉽게 인류의 문명을 버렸다. 외계의 생명체와 싸우기 위해 떠나기도 하고, 복제된 가족이 등장하기도 한다. 생명을 틔울 인류의 배아를 들고 이동하기도 하고, 지구는 검은 재에 둘러싸여 지워지고 있는 이야기도 있다. 이름이 불리지 못해 떠도는 영혼도 있고, 아이를 잡아먹는 할아버지에, 하반신 없는 시체도 등장한다. 무섭고 해괴하고 괴상한 이야기들. 피가 튀고 몸이 잘리고 인류가 지구가 망하는데 정작 그 안에 사람들이 지키고자 하는 혹은 무시하고자 하는 진실이 있고, 그래도 살아가면서 얻는 믿음과 희망이 있다. 그래서 천선란은 책 뒤 작가의 말을 '이유 없이 살아가자는 말을 너무 길게 한 것 같다'는 얘기로 시작한다.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은 저자의 엄마를 떠올리게 했고, 우주를 좋아하게 된 이유에선 크게 공감했다. '불안으로 꽉 찬 나를, 나만 한 크기가 아니라 좁쌀만 한 크기로 만들고 싶어서' 그 불안으로부터 도망가는 과정에서 우주는 내게도 항상 존재하는 것 이상의 몫을 했다. 그래서 다음 작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사실 10개의 단편을 읽는 동안 꽤나 지쳤다.

행복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게 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서 읽고 나면 지치는 책이 될까 봐 두렵다. 여전히, 하지만 사랑하고 싶어 소설을 읽고,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듯 가끔은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으리라 믿으며...418쪽

특히 르포 매거진 <추적단 불꽃-우리, 다음>에 실린 '-에게'와 가장 긴 이야기였던 '이름 없는 몸'이 그랬다. '-에게'는 오랫동안 이름을 잃고 구천을 떠돌며 이름불러 줄 사람을 찾아다니지만 자기 이름을 못 찾고, 비슷하게 살해된 여성들을 위해 그들의 이름을 외우고 다니는 귀신이 나온다. 그녀의 이름은 광화문에서 시위를 벌인, 살아 있는 여성들이 되찾아준다. 저승으로 가지 못하는 귀신과 계속 살해당하는 여성, 그녀들을 위해 이름을 부르고 시위를 벌인 인간 여성들의 연대가 3장짜리 짧은 소설에 꽉 차 있다.

​'이름 없는 몸'은 복잡다단하다. 총과 칼과 망치가 등장해 쏘고 때리고 휘둘러 피튀기는 상황에서도 여성의 현실은 그다지 비현실적이지도 않다. 여성은 집을 얻을 때도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성별도 따져 위험을 줄여야 하고, 결혼이주 여성들은 여전히 사고 팔린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개망나니처럼 살면서 도랑에 빠져 얼어죽는다. 엄마는 동네 할아버지들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고된 노동을 감내하고. 온갖 것을 달여먹으며 몸보신에 집중한 노인들은 젊은 남자에게 덥석 이장 자리를 줄 만큼 관대하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도 친구도 잃은 '나'는 요구는 명확하다.

진짜로. 너무 화가 나서 숨을 크게 내뱉고 있을 때 가끔 누가 말을 걸어.

뭐라고 말을 거는데?

죽이고 싶으냐고, 죽여줄까?하고

그런 너는 뭐라고 그래?

나는,

.........

응, 이라 말해.

260쪽.

죽이고 싶은 사람이 230명 정도(전두환 덕분에 1명 줄었다) 있는 나는 더럽고 추한, 비도덕적이고 악행을 일삼는, 대체로 숫컷인 생명체들을 어떻게 못하고 마음에 병이 생긴 듯했다. 늘 응, 이라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저자가 '이름 없는 몸'을 이렇게 마무리해주었을 때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 역겨운 마을에서 살아남아 버텨온 주인공은 낯선 친절과 따뜻함에, 자기가 살아온 얘기를 듣고도 여전히 나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기껏 마음을 열어준 언니에게 '언니는 나를 믿어요?'라고밖에 말하지 못한다. '어쩌면 내게 붙어 있을지 모르는 그 세계의 흔적들이 언니는 무섭지 않은 것일까.' 궁금하지만 언니는 도리어 '너는 내가 안 무섭니?'하고 묻는다. 무섭고 믿을 수 없을 거 같지만, 이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의지한다. 그래, 그럼 됐지 뭐. 마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수할지 적은 노트는 없지만 천선란의 괴기한 이야기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무섭고 암울하고 우울한 이야기 속에 기어이 썩어가는 시체의 몸으로라도 다정한 이야기를 해줄 것 같다. 이로써 옥타비아 버틀러보다 더 아끼는 작가가 생겼다. 번역 과정 없이 작가의 언어로 바로 읽을 수 있는 이 괴이하고 따뜻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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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본스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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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참기 힘든 역겨운 일들이 뭐 한두 가지겠냐마는 종교를 핑계로 한 전쟁은 독보적이다. 그야말로 종교는 핑계일 뿐이다. 어느 종교의 신이 사람을 죽여 내 종교를 확장하라고 하겠는가. 나 혼자 생각하고 추측하고 살펴보고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전쟁의 이유는 자본주의 이전엔 권력의 욕심, 자본주의 이후엔 돈으로 대변되는 권력의 욕심이다.

권력의 욕심은 자존심 싸움에 땅따먹기 욕심이 가세하기도 하고, 남자 권력자는 지보다 약한 것이 힘이 강해지는 것 같으면 견제하기 위해서도 전쟁에 나선다. 또 자신의 권력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교묘히 이용하면 사람들은 알아서 권력을 옹호하며 서로 뭉친다. 이 전략은 권력이 위기에 처할 때 특히 좋은 처방이 된다. 권력은 위기를 넘기고 쉽게 권력을 재창출한다. 국지적인 갈등을 부추기는 건 무기소모에도 도움이 되고 군산복합체 육성과 활용에도 좋다. 여기에 역시 엄청난 돈이 오고간다. 종교갈등이나 민족주의 활용, 핵무기, 빨갱이 색칠은 고전적이고, 지금은 여성 멸시, 장애인 혐오, 성소수자 혐오를 활용하기도 한다.

애나 번스의 신간이라길래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가제본을 들고 설레었다. <밀크맨>으로 강한 펀치 한 대 맞은 거 같은 아픔과 충격을 느낀 후, 이 작가의 말이 어떻게 또 나아갔는지 궁금했다. 근데 <노 본스>가 <밀크맨> 한참 이전에 나온 데뷔작이라능. <밀크맨>에 밀릴 건 없다. 더 피튀기고 더 난해하고 더 부조리하니까.

<노본스> 는 1969년 영국군이 처음 북아일랜드에 왔을 때부터 1994년 정전선언 때까지 아도인이란 지역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과거에 한 나라였던 아이랜드와 영국의 재합병시도를 둘러싼 카톨릭교와 개신교도의 충돌로 3500명 이상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부상자, 실종자를 남긴 비극. 종교는 핑계.

전쟁이 정말정말 싫은데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을 선호하는 남성 권력자의 욕심 때문에 약한 존재들, 여성, 노인, 어린 아이들, 전쟁터에 끌려간 피지배계급 남성이 큰 피해를 입는다는 데 있다. 전쟁에서 남성권력자가 피해를 입는가? 끝까지 잘 처먹고 살다가 비행기 타고 도망가 망명하거나 신분을 고쳐 천명을 다한다. 빼돌린 국가재산으로 호의호식하면서. 내 죽음을 적에게도 알리지 않고 전장에서 끝까지 임무를 다하는 전쟁책임자는 없다.

전쟁의 고통은 사회적 약자들이 짊어진다. <노본스>는 적나라하게 그 점을 보여준다. 트러블(the Troubles) 당시 일곱살이었던 어밀리아를 통해 취약한 상태에서 파괴되는 여성의 몸과 아이의 정신이 무참하게 다가온다. 작가도 어느 정도 변태적이라는 비난을 감수했다고 느낄 정도로.

"모두가 다 그쪽 성향이 것은 아니었다. 어디에서든 당연히 그랬다. 소요에 참가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학생들도 있었다. 종교적이거나 뭔가 영혼과 관련된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어떤 사람들을 말하는지 알 거다), 그러니까 사이에 낀 사람들, IRA 는 아니어도 이런 시기에는 늘 동참하는 특수한 동조자들도 있어서, 이런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나는 안 한다고 말하기는 정말,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선생, 배넌 선생님인가 누군가는 용감하게도 5학년 교실 창문에 매달려서 "무식쟁이들! 아일랜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도에서 아일랜드가 어딘지 찾지도 못하잖아!"라고 외쳤는데 사실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밤에 집에 갈 때 그 지역을 지나가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집이 그 지역에 있지 않으니까. 그러니 아일랜드에 대해 알건 모르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쪽도 저쪽도 무식쟁이이긴 마찬가지인 듯했다." 111쪽, 정치적인 무엇, 1977년

<노 본스>의 '정치적인 무엇' 장은 '무언가 정치적인 일이 일어났다....동네에서 누군가가 총에 맞았다'로 시작한다.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동네에서 누군가로 알려진 학생이, 여자가 총에 맞아 죽었다. 죽은 사람은 IRA라는 게 밝혀지고 학교의 수녀는 '정치적인 것에 간여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며 가장 정치적인 발언을 해버린다. 학생들은 동요하고 저항하기로 한다. 이 온갖 정치적인 무엇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지점에서, 모두 다 어떤 성향은 아니지만 학생의 죽음을 지나칠 수 없는 정치적인 입장이 있다. 또 이런 일에 늘 동참하는 특수동조자들도 있고, 이 틈에서 도저히 개입하기를 거부할 수 없는 입장도 있다. 그리고 자기는 그 지역에 속해있지 않아 별 위험할 게 없으니, 맘껏 지도에서 아일랜드를 찾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식 운운하는 진중권 같은 남자도 선생이랍시고 떠들기도 한다.

정치적인 무엇이 일어나는 과정 또한 정치적이었을 것이다. 권력의 욕망을 내면화해 총받이로 나설 필요도 없으며, 갈등을 누가 부추기는지, 이 트러블로 궁극적인 이익을 보는 놈들이 누구인지만 생각하고 전쟁은 그들만의 싸움으로 낙후시켜야 한다. 어떤 성향이나 어느 쪽에 굳이 낄 필요도 없고 무식한 놈이 떠드는 무식한 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노 본스>의 교훈을 챙겨간다. 권력자들 배나 불리고 그들의 욕망이나 채우는 그런 트러블에 끼어들지 말고, 조종되지 말고, 차분하게 나의 공동체를 지키자고.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저자의 메시지 중에 어밀리아의 영혼과 몸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읽는 것만으로도 책읽기가 힘들어질 수 있으므로 이 점은 고려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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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 영국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의 사랑과 긍지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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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의 사랑과 긍지'라는 부제 때문에 반쯤은 학술 논문 같은 책일 거라고 생각했다. 대처리즘에 노동당 얘기에 영국 사회주의 전통까지 깔고 가면서 브렉시트 이후 노동 계급이 어떻게 사는지 분석한 책인가 보군.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라는 책을 잼나게 읽은 기억이 있지만 같은 저자의 책인 줄 몰랐다. 그래서 읽다 지겨워 빨리 잠들 셈으로 잠자리에 가지고 갔는데...날밤 깠지 뭐. 좋은 책은 졸려서 눈 비비며 끝내 읽어야 잠을 잘 수 있으니.

영국 아저씨들 얘기에 푹 빠져 하루 달콤한 잠을 날려버리다니. 일단 저자의 글이 쉽고 재밌게 읽힌다. 브렉시트와 영국 의료보험 제도에 대한 노동 계급의 생각이 현지에서 오랫동안 산 외부인의 감각으로 역시 쉽고 재밌게 쓰여 있다. 거기에 사랑, 우정, 늙음, 결혼, 아이 등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차고 넘친다. 어차피 인류애를 유지하며 살기로 작정한 이상 언제까지 아저씨를 도태시킬 수는 없다. 저자 덕분에 아저씨를 더 알고 싶어졌다. 내가 아끼는 내 남자사람친구들도 이미 다 아저씨다.

특히 인종차별을 막기 위해 자치 순찰대를 구성하고, 공공도서관을 사랑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잘 돕는 스티브에게 빠졌다. 여성혐오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착한 아저씨. 정치적 올바름 가지고 이해되지 않는 사는 이야기. 그렇다고 스티브를 무작정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동안 아예 제쳐놓고 쳐다보려 하지 않았던 나이든 남자들의 처지를 구조적으로 더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고 싶어졌다. 인류애는 소중하니까.

이주노동자 차별에 앞장서는 노동자, 자국의 이익을 위해 브렉시트를 주장하며 지역차별을 옹호하는 노동자, 우버를 욕하는 택시노동자, 자본이 퍼뜨린 가짜뉴스에 속아 잘못된 판단을 하는 노동자, 이들의 모습에서 복잡하게 교차하는 소수자성과 늙어도 지키고 싶어 하는 노동자로서의 자긍심, 과거의 일에 집착하지 않는 순진함, 노동자성의 건강함, 이 모든 것이 이 책 안에 사람 사는 이야기로 흥미롭게 얽혀있다. 이 책이 깊은 울림을 준다면 저자가 아일랜드 계 영국 남자와 결혼해 오랫동안 영국에서 살아온 일본 여자이기 때문에, 그의 소수자성이 더 날카롭게 관계와 현상을 보도록, 더 많이 생각하고 여러 입장에 서보도록 오랜 시간 노력해온 덕일 것이다.

레트로 감성의 동그란 차체와 런던 말씨로 말을 거는 운전기사로 블랙캡은 런던의 명물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지금은 블랙캡이 "사악한 내셔널리즘과 배외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되고 있다...블랙캡 운전기사들은 불합격률이 70퍼센트에 달하는 시험을 통과한 프로들이다. 런던 시내 약 2만 5000개의 거리와 약 10만 개의 명소, 건물, 시설 위치를 전부 외워야 하는 필기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몇 년 동안 고생해서 외운 이 정보를 한 번에 무력화시킨 것은 스마트폰이다. 우버 기사들은 스마트폰 하나로 더 값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블랙캡과 우버의 전쟁은 '글로벌 경제의 뒤틀림에 의한 영국인과 이민자의 대립구도로까지 나아갔다. 블랙캡 운전기사의 67.2%가 영국백인이기 때문이다(2017). 우버 면허 말소에 대한 소송이 왔다가고, 노동조건과 안전, 서비스 품질에 대한 논란이 복잡해지면서 논란은 국가 단위 규제 비판과 국제주의로까지 나아간다. 여러 지역에 들어가 그 지역에서 정한 고용과 안전 규칙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장사판을 벌여 지역 산업을 엉망으로 만들고 노동자의 임금과 고용을 저하시킬 우려와, 이주노동자 차별이나 기득권 유지에 대한 비판이 누가 진보인지 보수인지 헷갈릴 정도로 교차하고 있다. 저자는 우버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나 제공하는 사람의 논리에서 벗어나 정확히 우버 자체를 문제 제기한다.

"우버는 유연성이 제로아워계약(시간이 명시되지 않은 계약으로 24시간 대기 타야 하는 나쁜 노동계약-내 식으로 말하자면)처럼 고용된 사람에게 복리후생을 제공하지 않는다. 차량예약과 요금지불 등 모든 것을 스마트폰으로 하기 때문에 관리가 전혀 필요 없는데도 25%의 수수료를 받아가기 때문에 소요 경기를 제하면 수입이 최저임금보다 낮아진다는 운전기사도 있었다." 90쪽.


결국 플랫폼 자본주의의 승리인 것이다. 이 와중에 블랙캡 노동자는 자기들끼리도 갈등한다. 은퇴할 시기쯤에 월세로 먹고 살 수 있는 블랙캡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는, 시대가 달라지지 않았어? 노동자에 대한 대우가 중요하다고 나라를 닫아버리면 세계적으로 뒤처진다고/ 너희가 말하는 나라를 열하는 결국 국내 노동자를 궁핍하게 만드는 거야 / 궁핍하지 않은 노동자도 있잖아 / 궁핍한 녀석과 그렇지 않은 녀석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질걸/ 온 세상을 평등하게 하는 건 불가능하잖아. 나라를 닫자는 건 퇴보하고 글로벌하게 나아가지 않으면 안 돼/ 글로벌리즘은 안 된다고...라면서 싸운다. 그동안 우버는 우버 이용자에게 스마트폰 한 번 충전할 만한 전기료 한 번 보태주지 않고도 알짜 수수료를 챙기며 플랫폼 자본주의에서 승승장구한다.

대화는 우버 서비스를 제공하는 운전자도 필요 없어지게 될 무인자동차 시대가 오면 가 일자리를 잃을 거라는 체념을 공유하고, 블랙캡 노동자조차도 취해서 집에 가는 길에 우버를 이용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서 허탈하게 끝난다. 이런 상황을 정리하고 독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도 관점이며 당파성이다. 이 역시 저자가 이주민이고 백인과 결혼해 백인의 나라에 사는 여성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다양한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소수자성은 세계에 대한 관점을 널리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모서리에서 보니까 중심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외 베트남 여성의 간병노동을 이용한 잘 생긴 남자 대니와 그의 동생 제마의 인종주의, 노숙자를 집에 재우고 다 털리고도 노동자의 합리성으로 살아가는 션, no man no cry의 주인공 레이의 이야기는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영국의 의료보험 제도와 브렉시트를 둘러싼 사람들의 정치적 판단 상황을 알게 되는 것도 큰 덤이고.

사실 아저씨들 얘기, 별 관심 없었다. 매너 없고 분위기 파악 못하고 술주정하는 아재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오죽하면 개저씨라고도 불리기도 할지 이해도 된다.

한국 50대 남자에게 집중했던 적이 있긴 했다. 코로나 팬데믹 시국에 종종 뉴스거리가 되어서 문제 일으킬 때마다 나이와 성별을 확인하곤 했는데 압도적으로 50대 남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로 마스크를 써달라는 편의점 알바나 버스 운전사에게 물건을 던지고 주먹을 휘두르고 욕을 했다. 마스크를 써달라는 요구가 왜 그리 불쾌했을까. 버스나 편의점에서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요청을 해야 하고 누구나 그 당연함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찌질함과 있지도 않은 권위를 위협받았다고 느낀 화남이 섞인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그뿐, 그저 피해야 한다는 생각만 강해졌다.

매력있고 지적이고 사랑스러운 아저씨들도 있겠지. 딱히 젊고 잘생긴 남자에게 관심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상적 무관심을 유지할 뿐이었는데. 영국 아저씨들 얘기를 듣고 보니 더더욱 한국의 아저씨들에게도 내가 모르는 뭔가 있을 거 같다. 방송이나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추잡한 모습들, 혹은 어린 여자와 연애를 꿈꾸고 자기가 매우 유쾌한 사람인 줄 알고 아무 때나 라떼를 섞어 농담을 하거나 성희롱에 가까운 폭언을 농담인 줄 아는 그런 모습 말고.

"야단맞고, 멍청한 일을 하고, 호되게 당하고, 엉덩이를 내놓으면서 아저씨들의 인생은 앞으로도 이어진다.
당신들을 축복해야지, 베이비.
아직도 칭찬할 만한 삶을 사는 것 같지는 않은 그들이지만." 225쪽.

이어질 그들의 인생에 축복 한 자락 함께 얹고 싶어졌다. 저자 덕분에 인류애는 더욱 드높아지고. 좋은 책을 읽었다는 충족감에 기분도 좋고~. 272쪽에는 '마지막은 중요한 술에 관하여'를 통해 영국의 세대별 술문화까지 다 훑어주신다. 저자의 센스 덕에 책을 덮을 때까지 흐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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