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예술 - 포스터로 읽는 100여 년 저항과 투쟁의 역사
조 리폰 지음, 김경애 옮김, 국제앰네스티 기획 / 씨네21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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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의 취향을 저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 저항도 아름답고 예술도 그러한데 저항의 예술이라니. 포스터 한 장 한 장마다 저항의 메시지와 함축된 분노가 강렬한 사진과 글로 외치고 있다. 프로파간다 예술은 가슴을 쿵쿵 울린다.

​여기 실린 메시지와 이미지로 세상의 부조리를 직면하고 고통을 공유하며 다른 사회적 목소리를 낼 기운을 얻는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오래오래 두고두고 볼 만한다.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창의적으로 저항하고 조롱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삶의 환희가 탄생한다. 저항은 인간에게 막을 수 없는 불꽃과도 같지만 영향력을 가진 이들은 대개 우리의 저항할 권리를 장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항은 심각한 위험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저항하는 이들은 비웃음을 당하거나 체포당하거나 투옥되기도 하며 고문당하거나 때로는 목숨을 잃기도 한다. 우리는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 우리의 권리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평화로운 시위에 대한 권리는 자유 사회의 기본권으로 정해져 있다. 이는 표현의 자유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작가와 예술가들이 재능을 발휘하고, 우리 모두는 예술을 통해 웃고 울고 노래하고 즐길 수 있으며 이러한 자유가 훼손된다면 분노할 것이다. "171쪽

48쪽. 백인 아닌 여성들은 강제 불임수술을 반대하는 싸움을 해야 했다. 한쪽에서는 낙태를 못하게 하고 한쪽에서는 강제 불임수술을 한다. 여성의 몸이 이용되는 두 극단적인 사례에서 아이를 가지지 않을 권리와 아이를 가질 권리가 누구에 의해 조종되는지 돌아보게 된다.

53쪽. 2013년 3월 9일 실제 구글 검색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포스터. 구글의 자동완성 기능의 현실이고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99쪽. 이 책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포스터. 전쟁 반대 행진을 위해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한다. 2003년 이라크에 대한 영국의 군사침공에 항의하기 위해 개최된 집회에서 사용되었는데,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의 이미지를 꼴라주로 활용. 전쟁 대신 차를 만들었더라면 이 세상은 더 얼마나 평화로웠겠느냐고.

167쪽. 플라스틱 뱅이 아니라 킬러 백이다.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의 소규모 서핑 공동체에서 파생한 영국의 환경 자선단체에서 제작한 포스터. 오늘날 플라스틱 해양오염의 심각성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여기 나온 녹색 비닐봉지는 실제 그리스에서 다이빙하던 사진작가가 찍은 것이라고. 이 캠페인이 진행된 뒤 2015년부터 영국에서는 비닐봉지 사용에 요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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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장소들의 지도 - 잃어버린 세계와 만나는 뜻밖의 시간여행
트래비스 엘버러 지음, 성소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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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사라져가는 장소들의 지도'이지만,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지지 않았어도 잊혔거나, 혹은 이미 사그라지는 곳이거나 현재 위협받고 있는 37개의 장소들의 이야기이다. 

낯선 곳을 방문하기 전에 먼저 지도로 살펴보는 일은 늘 흥분된다. 내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각각 나를 끌어당기는 장소들을 살펴보고, 도보로 갈 수 있는지 차로 가야 하는지 가늠해보고, 작은 기호도 놓치지 않으려 하며 좁은 골목길들을 눈으로 산책해본다. 그리고 직접 그곳에 갔을 때 내 감각이 얼마나 맞아떨어졌는지 맞춰보는 일도 흥미진진하다. 아무리 위대한 건축물이라 해도 꿔다 놓은 돌무더기로 보이는 일도 있으니 그때는 당혹스럽기도 하다. 왜 그리 감흥이 없을까, 의문이지만 이유를 알 수도 없다. 때로는 사전 공부를 많이 하고 갔을 때 그러기도 하고 혹은 아무것도 모른 채 마주쳐서 그렇기도 하다. 어렵고 힘들게 도착해 마주한 건축물이나 장소에서 그렇게 느끼기도 하고, 그저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장소에서 감동을 받기도 한다. 그러니 내 마음이 부디 설레주기를 바랄 뿐. 

37개의 장소를 훑어보며 우선 내가 가본 곳, 익숙한 곳을 찾아본다. 가본 곳은 팔랑케와 베네치아밖에 없구나. 익숙한 곳은 페트라, 알렉산다르아, 스청, 다뉴브강, 투발루. 가 보고 싶은 곳은 랩티스마그나, 시우다드페르디다, 무엇보다 알렉산드리아. 지도와 함께 현재의 생생한 모습과 장소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충분히 실려 있다.    

멕시코 여행 중 찾았던 빨랑께. 마야문명의 고전기(서기 250~900년)의 가장 중요한 도시. 상업과 예술, 종교의식, 유혈 낭자한 인신공양이 이루어지던 위풍당당한 중심지였다. 마야 달력에 세계의 멸망이 예언되었던 날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곳. 예언은 맞지 않았고 나 역시 이곳에서 감동을 받지 못했다. 티칼과 꼬판 등을 거치며 비슷한 유적들을 너무 많이 봐서 눈이 지루어져버렸기 때문. 가끔 너무 많이 보는 것도 문제다.

현재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인근 지도(196쪽). 파란 지역이 매년 1050번 침수가 일어나는 구역이고 주황색 지역이 이미 운하 벽이 상당히 손상된 주요 건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베네치아는 117개나 되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을 잇는 다리들이 여기저기 있다. 당연히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도시. 4세기부터 게르만족, 서고트족, 훈족의 침입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곳.  

이 광장을 보니 반갑다. 산 마르코 광장(199쪽) 앞에서 마셨던 잊을 수 없는 13000원짜리 에스프레소.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망원경을 못 보고 와서 언젠간 꼭 다시 가야 할 곳. 

이런 풍경이 뿜어주는 이야기를 모르고선 산과 나무와 하늘, 돌로 이루어진 계단과 평지를 발견할 뿐이다. 사라져간 이 장소는 사우다드페르디다. 이곳을 이해하기 위해선 스페인이 멸망시켜 1970년이 되어서야 알려진 콜롬비아 지역의 타아로나 문화. 그리고 사우다드페르디다를 잊지 않은 코기족 사람들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많은 고대문명이 그렇듯 여기도 탐험을 핑계로 한 도굴꾼들에 의해 알려졌다. 남미여행을 언젠가 하려고 늘 계획만 하고 있지만 콜롬비아에 가면 꼭 가볼 도시로 찜해둔다.

꼭꼭꼭 가보고 싶은 곳, 알렉산드리아의 과거와 현재 지도(73쪽)도 눈 안에 꾹꾹 담아둔다. 헤파티아와 에라토스테네스가 있었던 곳에 가보고 싶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궁정을 알렉산드리아로 옮기면서 헬레니즘 세계에 가장 위대한 도시로 부상했던 이곳. 이곳의 도서관에 매혹되었다. 만약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뭔가 되는 걸 선택할 자유가 있다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수석 사서가 되고 싶다. 

알렉산드리아 앞바다 파로스 섬에 지어진 유명한 등대의 상상도(70쪽). 선박을 인도할 목적으로 세운 최초의 건축물로 기원전 3세기 초반에 완공되어 600년 넘게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입구를 지켰다. 지금은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당시 지중해와 홍해의 무역을 지휘했던 당당함이 떠오른다. 

이 지도책의 매력은 역사적 맥락의 이야기들과 함께 현재와 과거의 지도가 상세하게 실려 있고 풍부한 사진자료가 함께 한다는 점. 잠깐 이 지도에서 빠져나와 구글지도를 켜고 사라져가는 장소들을 살펴본다. 호기심이 생기고 가고 싶은 곳이 늘어나고 그곳에 직접 서 있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진다. 이미 사라졌고 사라지고 있는 중이지만 정말 사라져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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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밀 예찬 - 은둔과 거리를 사랑하는 어느 내향인의 소소한 기록
김지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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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밀예찬, 제목 참 좋다. 내밀함을 어찌 예찬하지 않을 수 있으리. 은둔과 거리를 사랑하는 어느 내향인의 소소한 기록이라니. 함께 예찬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리라.

이 결심이 잠깐 유보되는 사이 낯설음을 먼저 느꼈다. 저자는 충분히 내밀함을 동경하고 그리워하고 예찬할 만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으니. 내밀함을 예찬하는 사람이 당연히 홀로 머물고 있을 거란 생각은 내 착각이었다. 이 책은 은둔과 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내향인의 기록이었다. 비행기 타고 16시간을 간 곳에서 호텔에 꼼짝 않고 혼자 있고 싶다던 선배도 생각났다. 시부모와 남편과 아들 둘을 떠나 공식일정 외에는 혼자 있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 선배는, 낯설고 신기한 그 외부세상을 전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직 혼자 있고 싶어 했다.

저자는 MBTI 얘기로 글을 시작한다. 좀더 복잡해진 혈액형버전이라는 논란도 있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두면 나쁠 것도 없을 것 같다. 지금 내가 그런 성향이라는 거지 내 운명이 그러하다는 건 아니니까. 미친듯 일하러 다닐 땐 외향적인 사람인 줄 알았지만, 일 관두고 보니 난 뼛속까지 내향인이었다.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억지로 웃고 화통한 척하며 살았는지, 그 오랜 시간이 신기할 뿐. 9년째 내향인 성향 유지 중. 매일 억지로 출근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저자의 다음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다.

"자기 객관화와 자기 합리화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 다음에 뒤따라야 할 성숙한 태도는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어떻게든 해봐야 겠다'일 것이다. 그래서 본성을 거슬러보려고 애쓰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니, 존경한다. 대화에 서툴러도 앞에 앉은 상대방이 불편할까봐 어떤 이야기든 꺼내려는 사람들, 주목받는 게 싫지만 마음 단단히 먹고 무대 위에 오르는 사람들, PPT화면에 의지하여 갈라진 목소리로 발표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여기고 가끔은 애잔함도 느낀다."

그 애쓰는 사람들이 그만 해야 할 때도 잘 알았음 좋겠다. 태어남-자람-어른됨-취업함-결혼-출산-육아-계속 살아감,이라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언젠간 스스로 내려올 때도 있어야 할 테니까.

"세상의 많은 무표정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집중하는 사람의 무표정이 아닐까. 컬링계의 '안경선배', 김은정 선수의 한결 같은 얼굴처럼 말이다...언제나 한결같이 의연한 얼굴의 김연아 선수가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도 생각난다. "경기 중의 표정이나 감정표현은 반복된 훈련의 결과일 뿐, 경기 상황에서 음악의 정서에 실제로 빠져드는 것은 불가능해요." 평상시 덤덤한 얼굴의 그녀가 음악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를 때쯤 보여주는 표정들에 압도당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 또한 무한한 훈련의 결과라는 것이다."35쪽.

열심히 사는 동안 그 무표정에 얼마나 고생과 애쓰임이 함께 하는지. 그들에게도 내밀한 시간은 꼭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린 무표정으로 살기 힘들다. 주로 미소지음으로 상대의 반감을 허물고 적당히 굴복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아무도 의식하지 않아도 될, 가면을 벗고 깊은 한숨이라도 마음대로 쉴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저자 말대로 '숨고 싶지만 돈을 벌어야 겠'으니 말이다. 지극히 내향적인 내 지인도 타인과 있을 땐 얼마나 사교적인지 많이 놀란다. 그렇게 우리는 어떻게든 해낸다(65쪽). 그래서 고양이들이 더 부러운지 모르겠다. 기싸움도 감정적 줄다리기도 자기 파이도 연연하지 않는 존재 고양이 헤네(78쪽). 인간에게 거는 큰 기대가 없으니 인간의 실체에 타격받지 않은 채로 영원히 내밀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양이들은 내밀예찬의 예찬을 받을 만하다.

"어떤 사람에게 해도 무난한, 어떤 상황에서 해도 대충 통하는 의례적인 말들은 편리하지만 게으르다. 어떤 모임에서 실컷 수다를 떨고 돌아오는 길에 어쩐지 공허한 기분이 드는 것은 이같은 이유일 것이다."131쪽.

​이 이야기도 적극 공감되었다. 내게 수다는 스트레스 해소 기능이 없다. 실컷 수다를 떨면 더 피곤하다. 하지 않았도 좋았을 얘기들이 생기고,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의 지루한 이야기들은 그저 지루할 뿐이다. 수다에는 품앗이 기능도 있어서 타인의 얘기를 듣고 나면 내 얘기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는 것도 싫다. 목적과 주제가 있는 대화를 즐길 뿐.

​이 내밀예찬엔 팬데믹 상황도 적절히 잘 녹아있다. 이메일을 선호하고 다이어트를 시작하며 술자리를 추모하고 정적을 찾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들. 내향인인 저자가 직장에서 집에서 일에서 자기를 지키며 살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 흔적을 따라가보다 절로 응원하게 된다. 이미 결혼과 출산이라는 은둔하지 힘든 평범테크트리를 탔다면 그저 많이 지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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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식물집사 - 늘 긴가민가한 식물 생활자들을 위한 친절한 가이드
대릴 쳉 지음, 강경이 옮김 / 휴(休)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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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웃자라고, 축 처지고, 노랗게 변하는 식물 앞에서 오늘도 아리송한 나를 위한 참 좋은 실용적 식물 알기 안내서이다. 공학자 출신의 식물학자라니 더 신뢰가 간다.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반려식물을 위한 일기는 눈에 익은 식물들을 위한 내용이 꼼꼼하게 들어가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책 전체에는 식물들의 삶을 깊이 알아갈 때 식물집사로서 느끼는 벅참과 뿌듯함이 기록되어 있다. 차분하게 읽으면서 식물연쇄살식마로서 그동안 쌓인 죄책감이 많이 덜어지기도 했다. 토론토에 거주한다는 저자는 아마도 나만큼 죄책감에 쌓여 있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과거 식물연쇄살식마들의 마음을 이렇게 잘 알 리가 없다.

나 역시 식물이란 옆에 붙어 서서 5분마다 물을 주지 않으면 쓰러져 죽어버리는 예민한 엄살쟁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식물은 아름다워야 하고 잎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하고 잎이 노랗게 변하면 죽어가고 있다고 넘겨짚었다. 이렇게 아끼고 사랑하는데 죽어버리다니 억울함을 느꼈고, 화원에선 그리 예뻤으면서 집에 와선 이상하게 변해버리는 식물에게 배신감까지 들었다. 반려식물을 최고로 만족시키기 위해 내 돌봄노동을 어떻게 최적화해야 하는지 몰랐고, 식물의 성장환경을 이해하고 자연의 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도 몰랐다.

강아지처럼 식물도 집에 오면 적응기를 거치고, 식물에게는 '주관적 생명'이란 것도 있었다. 물주기의 중요성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었고, 빛이 얼마나 중요한 요인인지 생각하지 못했다. 내게 식물은 수동적으로 한 곳에서 얌전히 아름답다는 칭찬이나 받다 어느 순간 생명줄을 놓아버리는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식물 또한 삶과 죽음을 겪고 있었고 반응하고 호응해왔는데 말이다. 그리고 식물은 그 식물에게 제공된 환경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익혀야 한다. 적절한 빛과 물을 공급하고 뿌리가 행복하도록 흙을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식물이 빛 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바꾸는 식물의 생명과 순환을 알아야 한다.

빛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조도계까지 이용해 관리되고 있는 저자의 식물들. "이 공간은 얼마나 밝지?"가 아니라 "이곳에서 내 식물들은 어떤 빛을 볼 수 있을까?"로 바꿔 물어야 한다. 식물의 잎 높이로 눈을 낮추고 식물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식물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누군가 "적은 빛에서도 잘 자란다"라고 말할 때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식물을 장식용으로만 사용하는 것을 합리화하려는 의도일 뿐이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음지에서 지내는 식물을 보며 "50풋캔들의 빛으로 우아하게 굶주리는 중"이라고 말하곤 한다. 식물이 비교적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을 수 있다.61쪽

풋캔들은 촛불 하나가 1피트 떨어진 곳에 있는 1제곱미터 면적을 비추는 밝기. 조도계는 풋캔들로 밝기를 알려 주고 200~800풋캔들이면 오든 열대 관엽식물이 만족스럽게 성장한다고 한다. 빛만 해도 직사광, 여과된 빛, 산란된 빛, 반사된 빛, 하늘 빛에 인공조명까지, 반려할 대상을 위한 기초 공부는 기본이다.

무엇보다 저자의 식물들이 마음껏 사랑받고 자라는 저자의 공간이 참 아름다웠다. 식물을 아끼는 사람들은 마음도 아름다울까. 내가 아는 식물러버들은 마음이 까칠하고 뾰족해 사람 상대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사람보다 말 없고 고분고분한 식물들한테 매달린다는 의심도 지울 수 없다. 무슨 이유든 식물을 환대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사정이 있겠지. 나도 그 사정이 있다. 저자의 반려식물 일기를 열심히 밑줄 긋고 읽으며 그 중 하나를 나의 반려로 만들어보려 한다. 나도 반려식물일기를 써야지. 식물연쇄살식마의 과거를 떨쳐버릴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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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램프 군과 과학실 친구들
우에타니 부부 지음, 조은숙 옮김 / 한겨레아이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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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책을 시리즈 그림책으로 내고 있는 우에타니 부부. 이번엔 <알로올램프 군과 과학실 친구들>. 과학실과 과학준비실이 나누어진 공간, 과학준비실에는 쓰지 않게 된 실험 기구들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열리지 않는 선반'이 있다. 학교의 교실에는 화이트보드 대신 전자칠판이 들어섰고 실험기구 친구들은 많이 신형으로 바뀌어 있다. 특히 알코올램프 군과 대척점에 있는 신형 과학실험기구의 대표주자 가스렌지 군은 오만하기까지 하다..

새롭고 성능이 좋은 가스렌지 군은 불붙이기 대결과 화력조절 대결에서 알코올램프 군을 물리치고 기세등등해진다. 그러다 가스렌지 군은 건방떨다 사고를 치고, 그 사고는 커지기 전에 경험이 많은 실험실 선배들의 도움 덕에 위기를 넘기고, 가스렌지 군이 겸손하게 사과하고 모두모두 화합하는 이야기.

어렸을 적 분동이 생각났다. 아무리 새로운 실험도구들이 늘어난다 해도 분동이 없다면 뭐로 양팔저울에서 질량을 재지? 도르레가 없다면 그 기능을 어떤 신형 기구가 대신할 수 있지? 용수철저울도 숫자를 디지털화해서 보여주는 것 이상 그 역할을 어떻게 신형화할 수 있지? 소리굽쇠가 없으면 소리의 전달방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신형 과학실험 도구들이 아무리 과학적으로 발전한다 해도 본래 그 기능을 배신하긴 어려울 텐데. <알코올램프 군과 과학실 친구들>처럼 오랜 기구 친구들의 경험과 원리는 지속될 수밖에


* 아쉬워서 첨언.

어린 친구들에게 오래된 과학실험기구의 역사를 알려주려는 의도도,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해가는 신구세력의 화합도 다 좋지만, 이 책의 과학실은 젠더 이퀄리티가 보장되지 않은 문제적 장소다. 일본 교사 부부가 쓴 글이고 일본의 과학실 문화는 다를 수도 있을까? 이 부부의 그림책에서 등장하는 과학실험실은 남자아이들만의 것은 아닐 텐데 캐릭터 대다수가 '~군'으로 불리고 있다. 오래된 기구들은 모두 '~씨'로 불린다. 증발접시는 영감님이고. 유일하게 깔때기 양이 등장하고 깔때기의 눈에 속눈썹을 달아 여성임을 표현했지만, 전체 이야기 속에서 한 딱 번 호명된다. 알코올램프 군이 상황을 정리하며 불 끄기 역할을 다른 기구들에게 나눠줄 때다. "깔때기 양은 혹시 모르니 소화기 군을 불러와줄 수 있을까?" 이게 다다. 기구들이 힘을 합쳐 불을 끄고 있을 때에도 깔때기 양은 소화기 옆에 서 있을 뿐이다.

"~군, ~양'이라는 호칭이 어린아이들이 볼 책에 실리기엔 너무 낙후된 표현인 데다 김 양, 김 군 등 이름 없이 성과 함께 불릴 때는 부정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군, 양 호칭이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겠지만 번역 과정에서 이렇게 오래된 표현을 거를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젠더불평등한 과학실에 낑겨있는 깔때기 양도 안쓰럽다. 또한 초등학교 과학시간은 여자아이들도 참여한다. 이 정도 감각이야 요즘 세상엔 당연히 요구되는 거 아닌가 싶은데, 어린이 책에 이런 말을 보태야 하다니 많이 씁쓸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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