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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장소들의 지도 - 잃어버린 세계와 만나는 뜻밖의 시간여행
트래비스 엘버러 지음, 성소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평점 :
제목은 '사라져가는 장소들의 지도'이지만,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지지 않았어도 잊혔거나, 혹은 이미 사그라지는 곳이거나 현재 위협받고 있는 37개의 장소들의 이야기이다.
낯선 곳을 방문하기 전에 먼저 지도로 살펴보는 일은 늘 흥분된다. 내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각각 나를 끌어당기는 장소들을 살펴보고, 도보로 갈 수 있는지 차로 가야 하는지 가늠해보고, 작은 기호도 놓치지 않으려 하며 좁은 골목길들을 눈으로 산책해본다. 그리고 직접 그곳에 갔을 때 내 감각이 얼마나 맞아떨어졌는지 맞춰보는 일도 흥미진진하다. 아무리 위대한 건축물이라 해도 꿔다 놓은 돌무더기로 보이는 일도 있으니 그때는 당혹스럽기도 하다. 왜 그리 감흥이 없을까, 의문이지만 이유를 알 수도 없다. 때로는 사전 공부를 많이 하고 갔을 때 그러기도 하고 혹은 아무것도 모른 채 마주쳐서 그렇기도 하다. 어렵고 힘들게 도착해 마주한 건축물이나 장소에서 그렇게 느끼기도 하고, 그저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장소에서 감동을 받기도 한다. 그러니 내 마음이 부디 설레주기를 바랄 뿐.
37개의 장소를 훑어보며 우선 내가 가본 곳, 익숙한 곳을 찾아본다. 가본 곳은 팔랑케와 베네치아밖에 없구나. 익숙한 곳은 페트라, 알렉산다르아, 스청, 다뉴브강, 투발루. 가 보고 싶은 곳은 랩티스마그나, 시우다드페르디다, 무엇보다 알렉산드리아. 지도와 함께 현재의 생생한 모습과 장소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충분히 실려 있다.
멕시코 여행 중 찾았던 빨랑께. 마야문명의 고전기(서기 250~900년)의 가장 중요한 도시. 상업과 예술, 종교의식, 유혈 낭자한 인신공양이 이루어지던 위풍당당한 중심지였다. 마야 달력에 세계의 멸망이 예언되었던 날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곳. 예언은 맞지 않았고 나 역시 이곳에서 감동을 받지 못했다. 티칼과 꼬판 등을 거치며 비슷한 유적들을 너무 많이 봐서 눈이 지루어져버렸기 때문. 가끔 너무 많이 보는 것도 문제다.
현재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인근 지도(196쪽). 파란 지역이 매년 1050번 침수가 일어나는 구역이고 주황색 지역이 이미 운하 벽이 상당히 손상된 주요 건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베네치아는 117개나 되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을 잇는 다리들이 여기저기 있다. 당연히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도시. 4세기부터 게르만족, 서고트족, 훈족의 침입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곳.
이 광장을 보니 반갑다. 산 마르코 광장(199쪽) 앞에서 마셨던 잊을 수 없는 13000원짜리 에스프레소.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망원경을 못 보고 와서 언젠간 꼭 다시 가야 할 곳.
이런 풍경이 뿜어주는 이야기를 모르고선 산과 나무와 하늘, 돌로 이루어진 계단과 평지를 발견할 뿐이다. 사라져간 이 장소는 사우다드페르디다. 이곳을 이해하기 위해선 스페인이 멸망시켜 1970년이 되어서야 알려진 콜롬비아 지역의 타아로나 문화. 그리고 사우다드페르디다를 잊지 않은 코기족 사람들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많은 고대문명이 그렇듯 여기도 탐험을 핑계로 한 도굴꾼들에 의해 알려졌다. 남미여행을 언젠가 하려고 늘 계획만 하고 있지만 콜롬비아에 가면 꼭 가볼 도시로 찜해둔다.
꼭꼭꼭 가보고 싶은 곳, 알렉산드리아의 과거와 현재 지도(73쪽)도 눈 안에 꾹꾹 담아둔다. 헤파티아와 에라토스테네스가 있었던 곳에 가보고 싶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궁정을 알렉산드리아로 옮기면서 헬레니즘 세계에 가장 위대한 도시로 부상했던 이곳. 이곳의 도서관에 매혹되었다. 만약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뭔가 되는 걸 선택할 자유가 있다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수석 사서가 되고 싶다.
알렉산드리아 앞바다 파로스 섬에 지어진 유명한 등대의 상상도(70쪽). 선박을 인도할 목적으로 세운 최초의 건축물로 기원전 3세기 초반에 완공되어 600년 넘게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입구를 지켰다. 지금은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당시 지중해와 홍해의 무역을 지휘했던 당당함이 떠오른다.
이 지도책의 매력은 역사적 맥락의 이야기들과 함께 현재와 과거의 지도가 상세하게 실려 있고 풍부한 사진자료가 함께 한다는 점. 잠깐 이 지도에서 빠져나와 구글지도를 켜고 사라져가는 장소들을 살펴본다. 호기심이 생기고 가고 싶은 곳이 늘어나고 그곳에 직접 서 있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진다. 이미 사라졌고 사라지고 있는 중이지만 정말 사라져버리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