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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캘린더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표제작 <임신캘린더>외에도 <기숙사>, <해질녘의 급식실과 비내리는 수영장>이라는 하나같이 기묘한 제목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이다.
원래 이런 단편집을 읽을 때 나의 안 좋은 습관은 표제작만 읽고 치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올해 목표를 책 20권 읽기로 정한 이상, 이 책을 다 읽지 않으면 올해 읽은 책 리스트에 적을 수가 없기 때문에 다 읽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임신캘린더>를 읽고 난 후에는 마음 먹고 읽은 게 아니라 자연스레 손이 가서 읽게 되었다.
내 나이도 어느 새 28이 되었다.
가끔 놀랍다. 난 아직 예전과 다를 바가 없고, 아직도 마냥 어리고 철없는 애인것 같은데
세상은 아마도 나를 28살의 성숙한 여자로 볼 것이다.
결혼을 해야 하고, 아이도 낳아야 하고, 하나의 가정을 꾸리기에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나이로 본다.
학교에서 제자들도 "샘은 언제 결혼하려고 그래요? 남자친구도 없으면서 도대체 언제 시집가요?" 따위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면 세상이 나를 28살의 결혼적령기의 여성으로 본다는 건 확실하다.
근데 내 마음은 아직 마냥 철없는 애일뿐이라고 느낀다.
내가 누군가와 연애하는 모습도 잘 상상이 안되고,
누군가와 결혼을 앞두고 상의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상상이 안 되고,
내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기른다는 건 더더욱 상상이 안된다.
언니 오빠 모두 연애를 하지 않고 있고, 셋 중에 누구라도 연애를 시작하면 그 한 명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이런 환경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난 아직 내 순서가 아니며, 고로 적령기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엔 안 그랬다.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좋은 사람과 같이 사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는데
막상 적절한 나이가 되니까 지금의 내 생활이 흐트러지고 새로운 환경에 부딪혀야 한다는 상상이 괴롭고 생각하기도 싫은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어찌보면 이런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 대해서 자세하게 쓴 이유는
이 책이 나의 이런 마음을 적절히 대변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임신, 결혼, 남편의 직장문제로 인한 이민 문제 등 여성이라면 당연히 겪을 만한 일이지만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일상에 큰 변화를 주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느끼는
일상의 소소한 두려움, 공포 등을 섬세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임신캘린더>에서 임신한 언니의 입덧이 정말 공포스러울 정도로 괴롭게 묘사된다거나,
자신이 임신한 아기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어떻게 나올지 걱정하는 언니나 나의 두려움이 그렇다.
평소에는 임신했다고 하면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먼저 떠오를테지만 작가는 그 이면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나부터도 내 주변 사람이 임신했다고 하면 '기대감'을 갖겠지만 내가 임신했다고 하면 '걱정'을 품게 되는 걸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20살의 내가 결혼의 환상을 품고 있다가 지금 28살의 내가 결혼에 대해 상상하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실린 앞의 두 작품이 상당히 재미있었는데 <기숙사>는 그 일상의 공포감이 더욱 확실히 표현된 작품이다.
양팔과 한쪽 다리가 없는 선생님과 '나'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기묘함은 특히 책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느껴졌다.
뒤에 실린 작품해설에서 봤는데 이 작가가 특히 병적인 인간, 불구자인 인간을 자주 등장시키고 그들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몰입하여 그 기묘한 공포 속으로 몰아넣더니 공포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 또한 너무도 일상적인 흐름에 묻혀버린다.
<기숙사>는 최근 읽었던 추리소설 보다도 훨씬 나의 손에 땀을 쥐게 하고 긴장하게 만들었다.
대중소설이나 로맨스 소설은 읽을 당시에는 참 흥미롭고 페이지도 잘 넘어간다.
문제는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의 느낌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한숨이 나오느냐, 감탄이 나오느냐는
어찌보면 한끝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흥미와 감탄을 동시에 줄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