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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없는 세상 - 제6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동정없는 세상이라니.
제목부터 냉혹하다 싶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 아, 남자애들은 나랑 다른 걸 상상하면서 제목을 볼 가능성이 크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1.
늘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만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정말 극복하기 힘든 것인가 보다.
그래서일까? 성장소설은 재밌고, 순수하고, 찡한 감동이 있어서 내가 유독 좋아하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남학생의 성장을 다룬 소설은 더 재밌고 흥미롭다.
난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전혀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세계를 책을 통해서 간접체험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일 것이다.
처음 남학생들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성장소설을 읽은 게 이순원의 <19세>였다.
제목부터 야릇한 이 책은, 예전에 과외했던 고3 짜리 남자 아이에게 추천받아서 읽게 되었다.
그 녀석 아직도 종종 기억이 나곤 하는데 잘 살고 있는지....
그 녀석은 일종의 체육 특기생이었는데 공부는 좀 못했지만 나름 언어적인 감각도 있고, 하면 잘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물씬 나는 멋진 아이였는데, 본인 스스로는 책을 잘 읽지 않는다, 싫어한다곤 했었다.
그러면서 그런 자기가 정말 몰입해서 재미나게 읽었던 책이니, 누나도 꼭 좋아할 거라면서 적극 추천해 준 책이 바로 <19세>였다.
역시나 그 녀석 말대로 난 단숨에 그 책을 읽어버렸고, 아! 과도기의 남자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성인의 세계를 동경하며 성장하는구나 싶었다.
2. 이번에 읽은 박현욱의 <동정없는 세상>은 교무실 내 짝꿍 정윤샘의 책꽂이에서 보고,
논술 연수 중에 성장소설로 추천해놓은 부분에서 읽고는 충동구매해버린 책이다.
막상 그 책이 왔을 땐 정말 얇고 크기도 작아서 에게게 했는데, 이번에 포항 내려오면서 버스에서 또
단숨에 읽어버렸다.
원래는 그렇게 단숨에 읽을 게 아니었는데.... 난 원래 책을 느리게 읽기 때문에 오며 가며 버스에서 읽기 위해서 얇은 책을 가져 온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더 가져올 걸 후회스럽다.
3. 이 책은 웃기고 가볍다.
그러나 결코 가벼움만을 담은 책은 아니다. 얇고 작은 책 속에 많은 걸 담고 있다.
수능을 친 직후의 성인도, 학생도 아닌 과도기의 주인공 준호는 여친 서영이와 어떻게 하면 섹스를 하고 동정을 뗄 수 있을까 그 궁리만 한다. 그 나이 남학생들의 머리 속 절반 이상이 그런 생각으로 채워져 있다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소설에서 묘사되는 준호의 엉뚱한 행동들은 정말 폭소를 자아낸다.
이 책은 상당히 성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고, 실제로 작품 속에서 준호는 서영이와 섹스를 나누는 장면이 3번이나 묘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야하다거나, 낯뜨겁다거나, 아이들에게 권하기는 좀 무리겠다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남학생들에게 더 많이 읽히고 싶을 정도다.
이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면 그거야말로 자연스러운 성교육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성에 관한 것은 음지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교육받은 세대이지만, 어디 요즘 그게 말이나 될 일인가.
아이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 알아요!"를 외치지만 막상 이것들이 뭘 알고 그런 자신감을 내비치는지, 그 안다는 게 도대체 어디서 나온 쓸데없는 지식(?)들인지 알게 뭐란 말인가.
4. 이 작품 속 준호는 성과 관련된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 있으나
사회에서 제대로 속시원히 해답을 얻지 못해서 인터넷을 방황하는 우리 아이들과 닮아 있다.
또, 수능 때문에, 대학 때문에 좌절하는 영석이도 성적으로 서열화시키는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서 방황하는 우리 아이들과 닮아 있다.
준호의 가족은 기존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화목한 가정도 아니지만 오히려 그 점으로 인해
이 소설이 더욱 매력을 갖게 만드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준호의 엄마 숙경씨는 남편 없이 준호를 낳아 키우고, 준호의 외삼촌 명호씨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서도 아무것도 안 하면서 백수생활을 하다가 결국 만화가게 사장님으로 정착한다.
이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괜한 훈계조의 설교를 늘어놓는 역할이 아니라
맞담배질을 하고, 같이 포르노 동영상을 보면서도 충분히 준호를 서서히 변화시킬 수 있는 조력자로서 등장한다.
이 모든 요소들은 이 작품이 21세기형 성장소설로 전혀 나무랄 데가 없도록 만들어준다.
5. 물론 이 책을 읽으면서 일부분에서는
"아, 이 부분 좀 훈계조가 느껴지는데?" 싶기도 했고,
문학성이 매우 뛰어난 책이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전반적으로 이 책은 아이들과 같이 읽고 성에 관해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의 불건전한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수정해줄 수 있는 소설로는 최고인 것 같다.
꼭 교육적 목적이 아니더라도 이미 나이가 들어버린 내가 읽기에도 이 책은 유쾌하고 흥미롭다.
또한, 아직도 남자의 세계를 잘 모르는 나에게는 그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즐거움도 충만했고...^^
오랜만에 단숨에 읽히는 소설을 읽고 났더니 다시금 여러 소설들을 읽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