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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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모르면서도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 레오나르도 빠두라, 쿠바의 기자  


 나는 아직 지젝을 이해하지 못했다. 2주 전에 반납한 책에 대해 오늘에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의 언어가 소화되지 못한 채 머리 속에 흩어져 있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3주 전 억지로 마지막 장을 넘기고서 책 모임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지젝이 하고 싶은 말을 100% 이해했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이 책을 통해 그는 ‘끈기 있는 이데올로기 비판적 작업을 통해 권력자들의 기반을 허물고, 비정상적으로 높은 톤의 목소리로 현존 권력자들을 고생시킬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그가 비판하는 지점을 이해하고 따라가기에 급급한 우리들이 과연 ‘끈기 있는’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나눌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를 이념과 이론을 통해 치밀하게 분석하는 작업은 일정 수준의 학문적 이해와 일상적 긴장을 견뎌낼 강인한 신경을 필요로 할 것이다.   

@ 지젝과 바디우

 “복종하라 그러나 생각하라” 지젝은 칸트의 말을 우리에게 다시 전한다. 현실 권력에 복종하지만 비판적 목소리를 높이라는 그의 주문은 일견 소극적인 대응으로 맥이 빠졌던 게 사실이다. ‘현 세기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고 불리는 그가 내린 처방치고는 ‘약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행동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어떤 문제(미국의 경제 위기 사태)가 애초에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따져보는 대신 그 문제에 7천억 달러를 쏟아 부는 것을 선택했던 미국정부를 사례로 들면서 말이다. 그는 행동 없는 목소리보다는 이성적 판단에 뿌리를 두지 않은 분노적 행동에 대한 경계를 더 많이 주문했다. 그런 행동은 진보적 이성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시민들을 충격과 공포 가운데 오히려 뒤로 물러서게 만들뿐이다.     

@ 영화 <귀향>
역사에 대한 울분. 영화에 대한 한숨   


 지난 3일,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자신의 블로그에 영화 ‘귀향’에 대한 짧은 평과 함께 별점 2개를 매겼다. 영향력 있는 유명인사인 그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처를 주제로 한 영화에 이 같은 가혹한 평가를 내렸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비난했다. 이동진은 영화 <귀향>을 보고 가슴이 아프지 않았을까? 그 역시 식민지 시대 성노예로 끌려간 수많은 여성들의 한(恨)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분명 ‘역사에 대한 울분’을 느꼈다고 이야기했다. 영화 속 몇몇 장면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서사구조의 완결성과 내용의 유기적 연결, 세련된 묘사와 관점, 섬세한 시선 처리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했고 별점을 2개밖에 줄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나는 영화 <귀향>을 보지 않았지만 주변 지인들의 평을 통해 그 영화의 만듦새를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었다. 어떤 이는 지나치게 신파적 감성을 자극하는 서사 구조가 불편했다고 이야기했다. 또 다른 이는 위안부 여성의 1인칭 관점이 주가 되지 못한 부분을 아쉬워했다. 둘 다 영화 전체의 구조적 서사에 몰입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이다. 그 자리에서 눈물 몇 방울 흘릴 수 있겠지만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을 발전시키거나 구체적인 지향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온갖 감성적 자극에 노출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어지간한 심정의 동요로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텔레비전에 아프리카 난민의 모습이 등장하는 횟수가 늘어도 그만큼 구호 활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늘지 않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귀향>과 같은 영화에 한숨을 내쉬게 될 것이다. 현대인의 정서를 감동시키고 그들의 사고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감성의 호소가 아닌 이성을 자극하는 치밀한 구성과 현실적인 그림이다.  


@ 한병철의 <심리정치>
‘기분’과 ‘감정’은 다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기분(mood)’과 ‘감정’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기분은 주관적이며 ‘변화’를 특징으로 하고 ‘즉각적 배설’만을 목적으로 한다. 반면 감정은 객관적, 서술적, 항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법 감정, 도덕 감정과 같은 개념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여기에 기분은 ‘반성’의 층위에 놓여 있지 않다. 행위 주체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층위에 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충분히 설명될 수 있고, 완결된 서사 구조를 가지며, 쉽게 변하지 않는 ‘감정’이야말로 인간의 반성을 가능한 영역이다.  


 한병철이 정의한 개념에 따르면, 지젝은 인간의 기분이 아닌 감정의 영역을 이야기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순간적인 기분에 따른 충동적인 행동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반복해서 경고한다. 20세기 일련의 혁명들이 그렇게 변질되었고 맑스주의 이념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근거로 쓰이게 되었다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오늘날 사람들이 “우리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정말로 믿지는 않는다’고 그저 상상”하고 있다는 점을 가장 먼저 지적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와 구조적인 악영향에 대해 불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스스로는 ‘적어도 자기 세대에는 그것이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과 언제든지 자본주의적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체제에 대한 감정적 분노가 아닌 스스로 객관적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의 근거들이다.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도덕, 정치, 법 감정이야말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 <귀향>의 한계를 지적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섬세한 관점의 연출에 소홀한 매체는 그것이 아무리 민족주의적 가치와 휴머니즘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비판과 공격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게 맞다.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일시적인 기분(감성)들의 소용돌이로 공동체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오류의 가능성과 함께 한 때의 열기로 식어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비자의 기분과 감성을 공략하는 미디어의 포화 상태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에 대한 가치 판단은 논리적 이성과 완결성 있는 서사 구조에 근거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에게 덤벼드는 무수한 정서적 자극 가운데 진정으로 올바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회적 의제에 대해 더 많은 지지자를 더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가장 효과적인 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는 뒤로 물러서서 올바른 일을 생각하고 말할 때이니라


 나는 내가 아직까지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기다리는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금쯤 낙관과 자부심을 가져보아도 좋을 것이다. 물론 난해한 설명과 참여적이고 대단히 편파적인 그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속지 않는 냉소주의자보다 오류를 범하는 철학자가 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진짜 현실주의자는 철학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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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금 영화의 관람객 수가 900만을 넘었다. 2016년 기준 대한민국 성인  인구수는 3천700만. 어림 잡아 4명 중 1명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미래 자동차와 조국 일보는 극장 문을 나선 우리들의 현실이다.  



"인간은 권력의 행사나 복종의 습관으로 타락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 부정하다고 믿는 권력을 행사하거나, 부정하게 탈취되고 억압적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통치에 복종하게 되면 타락하고 만다."


<미국의 민주주의> 서문에서 토크빌은 이렇게 말한다. 개인은 자신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제대로 판단할 줄 안다. 부당한 권력에 의해 자신의 이익이 침해당할 경우, 지방 정부나 언론, 어떤 형태의 정치적 결사를 통해 의사를 밝힐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부정하게 탈취되고, 억압적이라고 여기는 통치에 복종하면 개인은 민주주의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능력이 마비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 영화 <내부자들>, 조국일보 논설주간 이강희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돈과 권력이 더러운 것이란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정치, 경제, 언론 권력이 얼마나 추악하게 공생하고 있는지 새삼-깨달았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고, 입소문을 타고 영화표를 끊은 관객들 역시 그것을 기대했다. 돈과 권력의 나쁜 쓰임새. 하지만 <내부자들> 이전에 <베테랑>이 있었고, <부당거래>, <범죄와의 전쟁>이 있었다. 사실 우리는 볼만큼 봤다. 조국 일보의 주필은 대중들에게 '고민거리'까지 적당히 안배해서 던져준다. 작년 노동법 개정 앞에는 국정 교과서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심사숙고할 여유를 과거사 교과서 싸움에 빼앗겼다. <내부자들>의 흥행 덕분에 대한민국 성인의 4분의 1이 잠시나마 하나의 문제의식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다. 이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 이유를 '냄비 근성'이나 '개돼지_같은' 의지의 차원이 아니라 '상상력의 한계'에서 찾고자 한다.



@ 웹툰 <송곳>


"사람 가르는 법은 누가 안 가르쳐 줘도 다들 그냥 알아요."


웹툰 송곳의 한 대사처럼,  다들 나쁜 것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배워나오는 것 같다. 권력의 나쁜 성질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우리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다. 더 나쁜 것은 인기 드라마, 1000만 영화와 같이 잘 빠진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은 나쁜 것들을 더 쉽게 배운다는 점에 있다. 조국 일보, 미래 자동차. 우리의 현실과 비슷하게 그려질수록 더욱 그렇다. 아주 작은 권력이라도 손에 들어오면 자신이 보고 배운 대로 휘두르려 한다. 권력의 비리 폭로형 콘텐츠가 가져올 수 있는 작지 않은 부작용이다. 사람들은 권력의 폭력성을 무의식 중에 배우고 흉내내기 쉽다.  


하지만 권력의 좋은 쓰임에 대한 것은 다르다. 충분히 숙고하고 상상할 시간이 있어야만, 그리고 의식적으로 배울 기회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특히 국민 대중의 힘, 합리적인 통치 권력의 경험이 적은 대한민국에겐 좋은 권력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다. 개인 자신의 이익과 국가, 기업, 언론 권력의 이해를 일치시켜본 경험이 없는 국민들은 권력을 무조건 의심하거나, 으레 무소불위로 휘둘러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사람을 살리는 권력은 없고, 가두고 억압하고 죽이는 권력만 있다. <내부자들> 역시 영화의 4분의 3 이상이 권력의 추악함을 전시하는데 할애된다. 그리고 그것을 폭로하는 결말은 한 순간의 카타르시스로 끝나버린다. 여기서 권력의 다른 모습을 상상할 여지가 없다. 영화 속 권력은 잘못 쓰이거나, 또 다른 폭력인 복수의 수단일 뿐이다.



@ 영화 <쉰들러리스트> 오스카 쉰들러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오스카 쉰들러 역시 <내부자들>의 그들처럼 권력의 정점에 올라 있었다. 타고난 사업적 수완과 수려한 외모, 쉽게 호감을 얻어내는 능력은 살벌한 나치의 통치 하에서도 먹혀들었다. 그는 권력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뇌물을 비롯한 온갖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의 사업적 성공과 약간의 자유만 보장된다면 거리낄 게 없는 사람이었다. 영화의 전개를 통해 쉰들러 또한 한때 권력을 탐했다가, 그것을 수단으로 권력자에게 일종의 '복수'를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자신이 한때 권력자들을 회유해 축적한 전 재산과 인맥을 통해 1,100명의 유대인들을  포로수용소에서 빼돌려 살린 것이다.



@ 군, 정치 수뇌부와 긴밀한 관계였던 사업가 쉰들러


사실 실제 인물 쉰들러에 대한 평가는 갈린다. 그가 순전히 더 큰 돈을 위해 유대인들을 살렸다는 말이 있고, 종전 후 이혼을 하고 몇 차례 사업에 실패했다는 개인사까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속 '오스카 쉰들러'라는 인물이 자신이 가진 권력을 '용도 변경'할 것을 결정하는 순간은 관객들에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먼저 쉰들러의 심경에 변화를 주는 여러 인물들이 중간중간 배치된다. 자신의 사업을 위해 스턴이라는 유대인이 꼭 필요했던 그는 나치오부터 몇 번이나 스턴을 구해내는 과정에서 유대인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매일 아침 일어나 유대인을 사격 총으로 사냥하는 사령관 아몬 괴트의 존재는 쉰들러가 자기 자신을 돌아볼 계기가 된다. 가정부 헬렌의 기구한 운명과, 가족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애걸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쉰들러와 관객들의 마음을 조금씩 두드렸다.


쉰들러가 자신이 가진 힘으로 나치 권력에 복수하는 장면은 이보다도 훨씬 더 정교하고, 차분하게 그려진다. 나치의 잔혹성과 수용소의 공포가 배경으로 물러날 만큼 쉰들러의 힘이 새롭게 쓰이는 과정은 세밀하게 묘사된다. 그는 처음엔 한 명, 두 명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을 빼돌린다. 찜통 같은 기차에 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고무 호스로 물을 뿌리기도 한다.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감정에 휘둘리기도 하며 우왕좌왕한다. 유대인 소녀에게 입을 맞췄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내면은 더 단단해지고, 유대인을 구하기 위한 그의 계획은 구체적인 형태로 완성된다. 자신의 공장 노동자 명단에서 시작해, 그의 돈으로  사 올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람 수 1,100명의 이름이 적힌 '쉰들러 리스트'다. 그의 계획은 중간에 틀어지고, 또 다른 강압에 흔들린다. 하지만 강한 의지와 철저한 계획으로 한 단계씩 준비된 복수는 마침내 성공한다. '쉰들러 리스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죽음의 수용소 대신 생명의 땅으로 넘어간다.




쉰들러의 복수는 권력의 추악함을 폭로하고 물 먹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힘을 거꾸로 생명을 살리고, 부정을 막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쉰들러 리스트'는 권력의 좋은 쓰임에 대한 상상의 지평을 넓혔다. 원래 힘이란 저렇게 쓰일 수 있구나, 거대한 권력도 쓰임에 따라 부패하지 않을 수 있구나 라는 희망을 준다.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포기한 대신 권력의 양면성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냈다.


관객인 우리는 미래 자동차의 회장도, 조국 일보의 주필도, 신정당의 대선후보도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의를 위해 출세를 포기한 검사도, 남의 팔을 자르고 복수를 위해 감옥까지 들어간 깡패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의 아버지로, 누군가의 상사로, 누군가의 선배로서 가진 작은 권력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이다. 우리 사회의 큰 악을 폭로하고, 같은 악으로 복수하는 내용의 영화는 그런 지혜를 가르쳐 주지 못한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선한 권력에 대한 상상력이다. 그리고 영화보다 영화 같은 현실 속 작은 희망들이다.



"이 이야기는 실제 실화이고, 당시 폴란드 지역에서  살아남았던 유대인들은 약 4,000명이었으며  그중 쉰들러가 구해낸 유대인들은 1,100명이었다."


@ 영화 <쉰들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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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했다'에서 그렇게 되길 원했다'로


 화 <화양연화>의 인물들은 두 가지 장면을  '예행연습' 한다. 먼저는 한 사람이 배우자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고,  다음은 두 사람이 이별하는 순간이다. 영화의 제목인 <화양연화>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순간을 뜻한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 순간을 의식적으로 '반복'한다. 어떤 때는 장난과 같은 역할극을, 어느 때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말로 두 사람만의 리허설을 한다.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주인공들의  예행연습은 의미 없이 지나가버리는 순간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들은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그대로 진짜 인생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먼저 그들에게 닥쳐올 순간의 밑그림을 그리고, 충분히 그것을 이해하기 원했다. 한 번 만 산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지만 순간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만으로 어떤 의미가 저절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비서실과 신문사에서 일하는 장만옥과 양조위는 각각 타자기와 식자기를 다루는 일을 한다. 두 가지 일 모두 주어진 문자를 그대로 베끼는 '단순 반복' 작업이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은 배우자의 잦은 출장, 속았다는 느낌이 드는 삶의 반복이다. 그들이 자신의 일상을 반복하기만 했다면 모든 것은 한  번뿐인 일과 다름이 없고, 어떤 의미도, 새로운 가능성도 열리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겐 모든 '그러했다'를 '그렇게 되길 원했다'로 바꿀 수 있는 특별한  예행연습이 필요했다.


@ 두 사람만의 연습 장소로 가는 길


 그것은 마치 '실전'인 것처럼 온 신경을 집중한 '연습'이어야 한다. 사실적인 밑그림일수록 실제 작품이 완성되는데 도움이 되는 것과 같다. 실감 나는  예행연습은 무대 위에서의 '부끄러움'을 없애 준다. 장만옥은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될 바로 그 순간을 겁냈다.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을 먹는 식탁에서 갑자기 남편의 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은 끔찍하다. 증오와 질투심을 느끼는 순간만큼 수치스러운 것도 없다.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그녀는 이웃집 남자를 상대로 역할극을 시도한다. '당신 사실 애인이 있지요?' 여자의 물음에 상대 배우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뺨을 때린다. 연습이지만 여자의 눈빛은 흔들린다.


 '그러면 안돼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받아들여줘야죠.' 상대역을 맡은 배우는 여자가 맡아야 할 역할을 알려준다. 곧이어 두 번째 연습이 시작된다. 이번에 여자는 손을 휘두르지 않는다. 그 대신 말없이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흐느낀다.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인생에 증오와 질투심은 솟아나지 않는다. 한 번 분출되면 가벼워질 슬픔의 감정과 체념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두 사람의 '이별 연습'도 이와 같았다. 그들은  예행연습을 통해 부끄러움을 덜어낸다. 비어진 그 자리는 새로운 감정들이 채워질 공간이다. "미리 이별 연습을 해봅시다" 말을 마친 남자는 혼자 뒤돌아 선다. 여자는 울어 버린다. 이번에도 연습일 뿐이지만, 여자의 감정은 실제 이별을 겪는 것만큼 충분히 분출된다.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남자의 품에 안긴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두 팔과 어깨를 오랫동안 쓰다듬는다. 이제껏 벽을 사이에 두고 살아왔으며, 좁은 골목에서 마주치더라도 거리를 두던 두 사람은 어깨를 기대고 밤거리를 달린다.


@ 실제 무대와 다름없었던 둘만의 예행 연습


 그대들은 증오와 질투를 모를 정도로 위대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증오와 질투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만큼은 위대해져라.

-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이제 증오와 질투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만큼 위대해졌다. 몇 번의  예행연습 덕분이었을까. 인생이라는 진짜 무대에 오를만한 담력이 생겼다. 장만옥은 남편의 외도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이 느끼는 증오와 질투의 감정을 인정했다. 남편의 부재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강박적으로 겉모습을 치장하던 모습은 이제 사라졌다. 화려했던 치파오의 무늬가 옅어지고, 빈틈을 보이지 않던 올림머리 역시 자연스럽게 풀어 내렸다. 그녀는 남편 없이 '누군가의' 아이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


 양조위 역시 장만옥과의 연습을 통해 달라진다. 다른 남자를 만나는 아내를 떠나 새 직장을 구해 이국으로 거처를 옮긴다. 증오와 질투를 느끼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보다 생산적인 방법을 간구한다. 그는 어릴 적 꿈인 무협소설을 연재하며 자신만의 서사를 새롭게 써나 간다. 장만옥은 그런 그를 옆에서 돕는다. 그가 쓰는 이야기를 가장 먼저 읽고 좋고 나쁨을 이야기해준다. 남자의 홀로서기를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 서로가 상대역이 되는 공간


 '진짜 이별'이 있은 3년 후, 장만옥은 양조위를 만나기 위해 싱가포르로 향한다. 과거 "우리는 그들과 달라요"라고 말하며 끝내 양조위를  따라나서지 않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 스스로 비행기표를 끊고 그가 머물고 있는 호텔방까지 찾아 들어온다. 그가 머무는 침대 곁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던 그녀는 방 안을 천천히 살피다, 담배를 하나 피우는데 그  담배꽁초는 나중에 양조위에게 발견된다. 그것은 두 사람의 엇갈린 만남을 보여주며 사실상 두 번째 이별을 의미한다. 결국 그 둘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그들에게 이별 순간은 단 한 번이 아니었다. 감정이 충분히 몰입된 실감 나는 리허설이 한 번 있었고, 그것은 몇 가지 은유를 통해 다시 한 번 반복되었다. 연습과 반복을 통해 그들의 만남과 이별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는, 어느 쪽이 좋을지 확인할 길이 없는 단 한 번의 무의미한 사건이 아니라 각자의 의지로 선택한 결말이 된다. 모든 "그러했다"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바뀐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이별은 영원히 간직할 추억이 된다. 둘 만의 세계에서 화양연화는 끝없이 변주된다. Ja, es muss sein.


 그 모든 "그러했다"를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바꾸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니체,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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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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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속 '개인 독립사'


 대한민국은 독립된 주권국가이다. 전작권이 나라 밖에 있고, 기형적으로 산업의 대외 의존도가 높지만 국제법상 “193개국”에 속해 있는 엄연한 독립국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독립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하나의 짧은 독립사(獨立史)를 그린다. 바로 ‘대한민국으로부터의’ 독립이다.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에게는 주로 ‘나라 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줬어

-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지금 독립을 요청 중이다. 조국으로부터의 독립, 바로 ‘개인’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하느님이 보우하는 것도, 길이 보전되는 것도 모두 다 ‘대한민국’인 이 나라에서 역설적으로 애국심(愛國心)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나라의 이름을 빛낼 인재가 아닌 평범한 개인들에 게는 지나치게 무심한 이 나라의 국적을 2014년 한 해만 2만 명의 사람들이 포기했다. 이는 한국 국적 취득자보다 5,300여명 많은 숫자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매년 5000여명씩 승객이 빠져나가는 함선이 되었다. 승객이 제 발로 나갔는지, 파도에 쓸려나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쓸려 나간 사람도 다시 그 배에 건져지기보다 차라리 구명조끼를 맨 채 망망대해에 떠다니길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 나라 국민들이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충분히 이해하기 시작한 결과이다. <한국이 싫어서> 의 주인공 계나가 평생을 살아온 집에는 한때 쥐가 나왔다가, 바퀴벌레가 나왔다가, 이제는 개미떼가 나오기 시작한다. 딸의 이민을 말리는 그녀의 엄마는 ‘이 모든 게 조금씩 좋아진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단지 이 나라가 워낙 빠르게 발전했을 뿐이다. 정말 대한민국은 굉장한 속도로 모습을 바꿔왔다. 사회에 나온 지 몇 년밖에 안된 평범한 주인공이 그 변화의 모멘텀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이 나라에서 그녀가 처한 상황은 앞으로도 그 겉모습만 바뀔 가능성이 높다. 쥐가 바퀴벌레로 바뀌었다고 해서 위생 상태가 ‘나아진’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학벌도 인물도 모아둔 재산도 변변치 한 개인에게 폐지를 주워 수 십 년 세월을 보내는 미래는 이미 손에 잡힐 듯한 현실이다. 그런 이들에게 대한민국에 남는 것은 나라를 떠나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할 것은 국민 개인만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 자체도 대한민국식 집단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다. 세계 최저 출산율, 최고 속도의 고령화, 인권을 존중하고 경제협력을 도모한다는 나라들 가운데 자살률 1위인 이 나라에서 아무리 국가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해 보았자 애국심은 싹트지 못한다. 국가가 개인을 돌보지 않을수록 인재들은 하나 둘 빠져나가고 국가의 기본 구조를 지탱할 생산인구 역시 기하급수로 줄어들 것이다.


 국민은 자신의 나라가 진실로 국민 개인을 위하고 사회적 협력을 가능케 할 때 그 나라에 남아 기꺼이 희생을 치른다. 철저히 개인의 삶을 보호해 국가 체제의 안정을 유지해오고 있는 미국은 영국에서 ‘독립’해 나온 국가였다. 조국인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요청한 이들은 스스로를 ‘애국주의자’라 불렀다. 아직 세워지지도 않은 국가를 위해 그들은 목숨을 바쳐 싸웠다. 미대륙에서 독립적인 생활을 꾸려나간 150년 간의 세월은 그들로 하여금 ‘개인이 자유를 누리고 행복한 삶을 개척하는 사회’의 가능성을 직접 실험해볼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영국 정부의 강압적인 압력은 자유에 대한 감수성과 실현 의지가 충만한 이들에게 완전한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부추겼다. 그들이 조국을 떠날 용기를 내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데 성공했던 이유는 미국에 대한 충성은 곧 개인의 자유, 행복과 동의어였기 때문이다.


@ 온라인 상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춰가는 헬조선 담론



 나는 대한민국이 ‘헬조선’이라 조롱 받는 이 시기를 과도기라고 믿고 싶다. 먼 거리를 전력으로 달려온 열차가 한 순간에 방향을 꺾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헬조선’이란 말로 축약된 국가 체제에 대한 혐오는 지나치게 억눌려온 것들에 대한 순간적인 욕망의 분출이라 생각한다. 청년들이 가진 자아 실현과 표현 욕구,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가정과 회사, 국가를 앞세운 기존의 집단주의적 사회 구조와 맞부딪히면서 생긴 파열음과 같은 것이다. 이는 광복 70년 역사 동안 국가 앞의 개인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하지 못했던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아직 시대가 새로운 세대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급히 인내나 연대, 희망을 이야기할수록 헬조선 담론은 그 덩치를 키워나갈 것이다. 노력이 부족하다는 기성 세대의 책임 회피만큼이나, 정치로 뛰어들어 모든 것을 바꾸라는 진보의 목소리 역시 이 같은 현실혐오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오히려 기성 세대가 잘못 만들어 놓은 구조를 왜 청년 세대가 몸을 부딪혀 깨뜨려야 하는가 반발만 야기할 수 있다. 더욱이 반도의 분단 국가에서 군대식 교육을 받고 자란 청년 세대가 이 구조 바깥의 세상을 상상하기부터가 쉽지 않다. 청년들의 감수성과 소통 방식을 위해 시대가 함께 변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우리는 청년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뿐이다. ‘한국의 어떤 점이 싫은지’ 그리고 ‘어떤 나라를 꿈꾸는지’. 국가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는 개인은 스스로 어떤 삶을 꾸려나갈 것인지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설령 대한민국을 버리고 떠날지라도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성공적인 독립 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한국이 왜 싫은지, 그렇다면 어떤 나라에서 살고 싶은지. 그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자극적인 표현과 막연한 추측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면 끝까지 남의 불행을 위안 삼아 살아가거나, 어렵게 도착한 이국에서 ‘유턴’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먼저 ‘한국의 어떤 점이 싫은지’ 이 질문에 대해 자기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던 아들이 어른이 되어, 자기 자신이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수십 년간 자라온 우리는 이미 대한민국의 일부와 다름이 없다. 자신이 혐오하고 부정하는 대상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그 생각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도 소통할 수 있어도 그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 주인공 계나는 소설 속에서 한국을 두 번 떠난다. 첫 번째는 정말 한국이 싫어서. 한국에서 더 이상 못 살겠어서 떠밀리듯 나간다. 그녀는 한국 사회의 지나친 경쟁과 개인에 대한 존중 부족, ‘진짜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모습, 계층 상승의 가능성이 막힌 신분 사회가 잘못 되었다고 느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었지만 그녀는 가족, 직장만 옮기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정이나 회사가 아닌 ‘국가’를 떠나려 했던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사회구조적인 문제로서 이해했다.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로 어렵게 도출된 답이 이민이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 자신이 원하지 않는 나라에 대해 오랫동안 현실적인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민을 떠나서도 한국적인 사고와 습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누구보다 처절하게 영어 공부를 하며 새로 주어진 기회를 붙잡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계나가 두 번째로 한국을 떠난 이유는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떤 나라에 살고 싶은지’ 충분히 고민했고, 자신이 살기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 호주를 선택했다. 그곳에선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 일을 하고, 여자 혼자서도 안정적인 사회 경제 활동이 가능하며 어떤 식으로든 지속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보장되었다. 물론 한국에는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남자, 그리고 그가 가져다 줄 수 있는 경제적 안정이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한국에서 살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고민을 거듭한 결과 자신이 안정적인 ‘자산성 행복’보다 즉각적인 ‘현금흐름성 행복’을 조금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고,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서도 결국 자신이 납득할만한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이렇게 먼저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원치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 객관적 이성적 합리적으로 이해한 뒤에야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 개인의 독립은 그런 질문이 충분히 해결된 뒤에야 가능하다.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나서 문득 이민을 결심하거나 그래도 한국에 남기로 새삼스레 다짐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헬조선 담론에 쉽게 휩쓸리거나 무력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오늘 힘들고 내일은 더 힘들겠지만 모레는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모레가 오기 전에 죽는다. 모레의 태양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다 . - 알리바바, 마윈

 

 나는 마윈의 말 속에서 어떤 지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성공의 그날까지 쉬지 않고 도전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물결이 흘러가듯 세대는 교체된다. 헬조선 담론은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파열음이라 생각하자. 청년 세대는 어느 정도 그것을 안고 가야 한다. 부무 세대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 모두 좋은 것일 수는 없다. 현실이 버거운 사람은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왕 남기로' 결정한 청년들이라면 독립된 개인의 삶을 충분히 상상하고, 우리가 기성세대 주류 세대가 되었을 때 조금씩 그것을 실현해 나가면 된다. 우리가 살았던 대한민국이 왜 싫었는지,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대답을 더 분명히 하기 하기 위해 많이 읽고, 많이 쓰고, 생각하는 것으로 이미 충분한지 모른다. 오늘과 내일이 힘들어도, 내일 모레 살아 있으면 된다.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


 나는 대한민국으로부터 독립을 꿈꾼다. 그리고 많은 나들이 그것을 꿈꾸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많은 청년들이 ‘헬조선’이란 표어 아래 모여 있지만 머지 않아 각자 자신만의 언어를 찾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한국이 싫은지, 그렇다면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 것 충분히 고민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날수록 '독립된 개인들의 나라' 진정한 의미의 민주국가가 올 것이다. 나는 한국이 싫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싫어하고 싶지는 않다. 그토록 싫어하는 헬조선의 모습을 어른이 된 내 안에서 발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이 보였다.


- 고은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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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불평등기원론 / 사회계약론 동서문화사 월드북 10
장 자크 루소 지음, 최석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 어쩌면 기록을 쌓기 위해 달린다


 연말에 시작한 아침 달리기 기록이 50번을 채웠다. 브런치에 올린 글도 30편을 채워간다. 모든 것이 데이터 베이스화 되고, 쉽게 공유되면서 개인의 '인정 욕구'는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채워질 수 있는 요즘이다. 매일 아침마다 strava 앱을 이용해 달리기 기록을 재고, 일반 블로그 대신 접근성이 높은 브런치 앱을 사용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결국 보다 용이하게, 많은 이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함이다.  


@ '인정 욕구'는 인간 존재 자체를 정의한다.


 한국에서만 100만 독자를 끌어모은 책,  <미움받을 용기> 역시 '인정 욕구'에 관한 내용이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모든 것을 과거의 트라우마로 설명해, 현재를 바꿀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들러 심리학에서 현재의 모든 나쁜 상황은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바로 그 인정 욕구만 버리면 누구나 자신을 긍정하며, 타인을 바꾸려 들지도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루소에 따르면 '인정 욕구를 버리라'는 주문은 인간 존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처방이다.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평판과 명예와 특권에 대한 일반 욕구"가 모든 불평등의 기원이라 밝혔다. 인간이  '자기완성'과 '정신의 진보'를 추구하는 한 타인의 평판에 대한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개인이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 욕구와 인정 욕구의 갈망은 한 몸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인류가 걸어온 모든 역사는 '인정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명제를 거역하는 건 인간 사회를 떠나 미개한 자연인의 상태로 돌아가겠다는 것과 같다.


@ 우리 모두의 '인정 욕구'에 솔직해질 것


 무엇보다 인정 욕구를 자극하는 '사회적 불평등'은 소유권, 법률, 정치 제도에 의해 끊임없이 강화된다. 개인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인정 욕구'를 채우고자 시도하면 기본적으로 이를 제지하는 거대한 장벽이 있는 셈이다. 누군가 평판과 명예,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의 노동과 희생, 그리고 그들의 정신적 노예 상태라는 대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허영과 경멸, 치욕과 선망은 한 몸이자 서로를 성립 조건으로서 필요로 한다. 공동의 선, 혹은 정의와 평화를 외치며, '약자를 강자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선언 역시 결국 개인의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 다수를 기만하는 '악덕'인 경우가 태반이다.


 선과 악을 말함에 있어서의 언어적 혼란. 나는 그대들에게 이것이 국가의 징표임을 알린다. 
-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루소가 묘사한 '자연 상태의 인간' (아직 '인정 욕구'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정도로 확장되지 않은 상태)은 하나의 이상향으로 떠올랐다. 루소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은 반문명, 즉 개인의 일반적인 '인정 욕구'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삶을 모색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는데 멀게는  프랑스혁명, 가깝게는 비트 세대와 히피, 힙스터 문화가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정작 루소 자신은 인간이 자연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인정 욕구에 기반한 사회 불평등 구조 즉, 사유 재산과 법률, 정치적 조직체 모두는 인류 정신 속에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고, 진보의 과정 속에서 순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인간 개체는 완성되고, 인간 종은 멸종한다


 결국 인간의 '인정 욕구'를 부정한 반문명 운동은 현실과의 관련성을 잃어버린 채 고립되고 퇴행했다.  프랑스혁명은 앙시앵 레짐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비트 세대와 히피 문화는 한때의 유행으로 끝났다. 문제가 되는 건, 이들 운동이 추구한 '순수성과 진정성, 비상업적인 자아'의 가치가 맹목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소설가 장정일은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란 책을 통해 '진정성의 역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 앤드류 포터는 '타인의 인정에 무관심하고자 하는 욕구'가 역설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상업적 마케팅'에 이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유기농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대표 사례로 들었다.     


 타인의 시선을 배제한 순수성, 즉 진정성을 지나치게 쫓는 것 역시 허영이며 위선, 기만일 수 있다.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진정성(다르게 말하자면, '인정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정도)에 집착해 인간 존재의 본성과 사회 현실에서 쉽게 실망하고 등을 돌리는 태도이다. 장정일은 "진정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들이 너무나 쉽게 세계 종말을 이야기하고 비관적이며 어쩌면 신학적인 사고로 빠지기 일쑤"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를 후보자들의 인격, 품성의 결격에서 찾는 태도를 일례로 제시했다.  


@ 진박 찾기가 혐오스럽다고 투표권을 버려선 안 된다

 결국 개인의 '인정 욕구'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양분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해 나간다. 법률, 정치, 경제 제도와 그에 종사하는 사람들 모두 자신의 인정 욕구를 쫓아 열심히 하루를 살아간다. 내가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하고, 웹상에 나의 글을 올리려는 정력과 시간을 쏟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인정 욕구를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그와 현명하게 타협해야 한다. 그런 실제적 노력만이 정치적 혐오와 마케팅의 속임수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 법률, 정치, 경제 제도가 개인을 얼마나 기만하고 있는지, 그것을 운영하는 주체들이 가진 '인정 욕구'에 비춰 이해하고, 나 역시 그들과 같은 것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자. 그런 다음에야 서로의 자유를 최대화하면서 동시에 서로에게 주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경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 바라건대 그가 고매한 자를 넘어 고양된 자이기를

 인간은 행복이 아닌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개인이 가진 인정 욕구의 정점에 도달하고자 애쓰면서 동시에 주변 사람들과의 타협점을 찾는 일이야말로 바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이성과 덕만으로 완성될 수 없는 존재이다. 인정 욕구로부터의 자유, 순수한 진정성의 추구는 인간 사회의 현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모든 것을 비관하거나 스스로 변질되기 쉽다. 그보다는 인간의 본성인 인정 욕구에 솔직해지고, 장차 다가올 '위대한 경멸의 순간'을 기대하는 편이 낫다.


 그대들이 체험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경멸의 순간이다. 그대들의 행복, 그대들의 이성과 덕이 역겨워지는 순간이다. 

- 니체,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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