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울의 물을 마르지 않게 하는 법
강호진 지음 / 영림카디널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포주의)

 

이 소설을 다들 <다빈치코드>나 <장미의 이름>으로 읽어내고 있는데

표면적인 부분을 살피자면 물론 그렇게 읽어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의 독법은 조금 다르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분상에서 경계나 사물을 이해하는 법 아니겠는가?

자신이 이해한 해석과 내용은 늘 자신의 인식수준을 대변하기도 한다.

나는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불교도 아니고, 추리도 아닌

스승찾기의 괴로움에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는 스승이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 현인호에게는 스승이 없다. 

일단 현인호는 불교미술사 박사과정을 밟다가 지도교수와의

마찰(지도교수의 논문표절에 대한 폭로)로 인해 학교를 그만둔 상태다.

 

물론 홍제스님이라는 현인호가 존경해마지 않는 명백한 귀감이 존재한다.

그러나 3일간의 이야기로 구성된 소설의 첫 날부터 홍제스님은 실종상태다.

그리고 소설내내 홍제스님은 오직 현인호의 회상속에서만 재현되는 신기루같은

존재다.

소설에서 현인호는 학문과 종교, 어디에도 제대로 된 스승을 가지지 못한

가련한 인물이다.

소설의 플롯은 바로 그 유일한 스승인 홍제스님이란 존재를

현인호가 추적하는 추리형식을 지니고 있다.

현인호가 영락사 주변암자를 돌아다니며 여러 승려들을 만나

 홍제스님의 행적을 탐문하는 것은 실은 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구하러 다니는  순례와 다를바 없는

스승찾기의 일환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건을 풀게되는 결정적 계기는 스승들의 가르침이 아니다.

채집한 정보들(문헌들과 기록들)과 그의 이성이 추적해낸 결과물이다.

그러니까 현인호가 지식과 논리적 추리를 통해 다다른 결론은

바로 홍제스님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지식을 통해 얻은 것이 고작 '이 시대의 스승은 죽었어!'라는 불행한 사실이라니.

어찌보면 작가의 정신적 성숙과 현실 인식의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소설의 여전히 읽을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이성이 추구해서 얻어낸 불행한 자리에서 소설이 멈추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소설에 처음부터 끝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벙어리 아이가

극적인 순간마다 등장했다 사라진다.

소설의 플롯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 아이가 왜 자꾸 등장해야하는지

나는 읽으면서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다 읽고 생각해보니 작가는 그 아이를 통해 스스로  

애써 도달한 논리적, 이성적 귀결에 흠집을 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스승없는 냉혹한 이성과 지식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작가의 모습이 그 아이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세월이 지난 지금 작가는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의 성숙이 어디까지 익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는 이후 소설대신 불교인문서들을 펴내고 있어 확인하기 어렵다.

그의  다른 소설을 기대해본다.) 

.

형식이 추리소설이라고 추리소설의 문법 안에서만 이해하라는 법은

없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또 다른 숨은 내용과 맥락을 파악해서

자신만의 사실과 삶으로 건져올리는 탐정이 되어야 한다.

그게 어쩌면 표면적으로 추리를 표방하는 이 소설이 은근히 담고 있는

진짜 의미가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일반적 해석에 대해 덧붙이고자 한다.
이 소설을 평론가나 사람들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에 비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다소 미흡한 해석이다.

<장미의 이름>은 아드소 수사와 윌리엄 수사란 제자와 스승의 짝으로

형성되어있고, <다빈치코드>는 스승따윈 필요없는 이성적 정합에

골몰하는 글이다. 이 소설은 스승찾기의 맥락으로 보자면 결이 다른 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