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파랑
정이담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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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한 여객선 침몰 사고로부터 시작된다. 그 사고로 언니를 잃은 해수, 그리고 해수의 언니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잠수부의 딸 은하. 은하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처음으로 만난 두 사람은 운명처럼 대학교 룸메이트로서 재회한다. 


대학생 시절에는 아픈 과거를 공유하는 룸메이트로서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 안았던 두 사람. 둘은 같은 악으로부터 공격당했지만 서로가 있어 살 수 있었다. 서로의 품 안에서 부서졌던 만큼 사랑이 탄생했다. 그리고 어느 결정적인 하룻밤의 사건으로 둘은 말없이 서로를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상대방은 모르게. 


둘은 정치와 부조리 없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었지만, 우리가 너무 인간이기에 일어나버리는 사고들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은하는 지구 밖 새로운 행성에 낙원 우주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해 지구를 떠나고, 해수는 고래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어 속세로부터 떨어져 고래들과 바다에서 살아간다. 


같은 방에서 숨쉬던 두 사람이지만 하나는 행성이 되고, 하나는 고래가 된다. 나는 생각한다. 하나는 처음부터 행성이었고 하나는 처음부터 고래였다고. 푸른 피를 가지게 되고 지느러미를 가지게 된 것은 그저 아이가 어른이 되듯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훤히 보이는 멸망의 순간에 기꺼이 품 속으로 뛰어들어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 온 생을 다해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람. 그것이 해수에게는 은하였고, 은하에게는 해수였다. 


참사, 고독, 이별, 상처, 첫만남, 재회, 치유, 싸움, 애증, 자발적 구속, 부조리, 악의 평범성, 발견, 희열, 후회, 초조함, 무너지는 마음, 홀가분함, 풍유, 도전, 낙원, 멸망의 이야기를 작가 특유의 유려한 문체로 그려냈다. 두 주인공이 느끼는 모든 감각이 내 피부와 혀에 그대로 전해졌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작가의 전 작품인<괴물장미>가 읽고싶어졌다. 


종종 떠오르는 책으로는 신카이 마코토의 <별의 목소리>가 있었다. 광활한 우주에 멀리 떨어진 점으로서 존재하는 두 인간이 오랜 공백을 감수하고서라도 서로만을 향한 메시지를 띄엄띄엄 주고받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해수는 입을 뻐끔대는 은하를 끌어안아 바닷물을 묻혔다. 귓불 아래 목덜미 사이 까끌거리는 모래알이 굴렀다. 맥박은 민감하게 울렸다. 해수의 포옹에선 알싸한 파래 향이 감돌았다. 소금기 밴 머리카락이 은하의 뺨을 긁었다. 손가락을 넣자 촉촉한 두피가 닿았다. 해수가 얼굴을 가까이할수록 눈동자는 진하고 배경은 옅었다. 그는 은하에게 바다를 옮겼다. 쇄골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 흉부에 스미는 바다 풀 냄새, 맥동이 어지럽게 공진했다. 피가 솟았다 내리며 정신이 산란했다. 은하는 해수가 데려운 바다 속으로 침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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