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저는 중세 시대가 배경이 되는 소설들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래서 <오만과 편견>은 책으로도, 영화로도 여러 번 재탕했을 정도죠. 발까지 길게 내려오는 치마와 촛불과 촛농, 질척한 흙길 등이 주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거짓말을 먹는 나무>도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자연스레 재밌게 읽게 되었어요.


<거짓말을 먹는 나무>의 원제는 'THE LIE TREE'인데요. 책을 읽기 전에는 왜 거짓말을 '먹는다'고 표현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어요. '번역을 잘못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더라고요 ㅋㅋㅋ 하지만 중간까지만 읽으면 왜 제목이 <거짓말을 먹는 나무>인지 알 수 있습니다.



소설이니만큼 먼저 간단히 스토리를 설명해드리자면, 주인공인 '페이스'가 아버지의 죽인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거짓말을 먹는 나무로 진실을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자연과학자인 페이스의 아버지가 소중히 키웠던 희귀한 나무인데요. 나무에게 거짓말을 얘기하고, 그 거짓말을 사람들에게 퍼트리면 나무에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 열매를 먹으면 환각상태를 통해 그 거짓말에 관련된 진실을 알 수 있게 돼요. 엄청난 거짓말일수록, 많은 사람들을 속일수록 열매의 위력은 강력해집니다.



이 소설의 장르는 스릴러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소녀인 '페이스'예요. 그래서 이 작품은 보통의 스릴러 소설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됩니다. 아이가 주인공이고, 중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페이스는 어린들의 말과 시대가 요구하는 관점에 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독자들은 페이스의 제한된 시점으로만 이야기를 이해하게 되죠. 그래서 페이스가 집에서 몰래 빠져나올 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행동할 때 마치 페이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합니다. 일반적인 스릴러 소설에서는 사건의 잔인함이나 해결에 집중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페이스의 변화와 성장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성장 소설의 특징도 보이고 있어요.



"페이스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한 손으로 누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하지만 해변의 햇살이 죽어가고 있었다.

페이스의 자존감은 애정과 정면충돌했다. 그 충돌은 원래 일방통행으로 일어난다. 사랑은 공정한 싸움을 하지 않는다. 그 순간 그녀의 자부심, 자신이 옳다는 걸 알고 있는 마음, 심지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생각마저도 앞으로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할 가능성에 직면하자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거짓말을 먹는 나무>에서 페이스의 배경은 베인 섬마을과 가족들인데요. 둘 다 폐쇄적인 성향을 띠고 있어서 페이스를 옥죄는 기능을 하고 있어요. 특히 자연과학자인 '에라스무스 선더리(페이스의 아버지)'는 페이스에게 다방면으로 영향을 끼치는데요. 페이스가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기도 하지만, 자연과학을 공부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는 중반부 이전까지는 고구마 투성이에요 ㅋㅋㅋ 아버지가 죽고, 거짓말을 먹는 나무가 등장하면서부터 이야기의 국면이 바뀌고 페이스가 변화하기 시작해서 흥미로워집니다! 중반부까지 지겹더라도 참아주세요!



이 작품은 페미니즘적인 메시지도 전달하고 있습니다.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끊임없이 페이스를 제재하던 폐쇄적인 요소들이 많이 강조됐던 것은 결말을 부각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남성중심으로 흘러가던 시대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읽다 보면 독자들도 이야기 속 여자 캐릭터들을 점차 망각하기 시작합니다. 여자는 기능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전제에서부터 이야기가 출발했다면, 어쩌면 이 작품의 반전은 밋밋해졌을 것 같아요. 생각치도 못했던 반전이 기다리고 있으니 꼭 끝까지 읽으시길. :)



"언뜻 봐도 나무가 지난번보다 훨씬 더 큰 걸 볼 수 있었다. 검은 잎 무더기에 가려서 화분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돌 선반을 향해 뻗어가던 갈라진 덩굴손은 이제 선반을 가릴듯이 자라서 창백한 돌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다가 발이 뭔가에 걸렸다. 아래를 내려다본 페이스는 마치 다리가 여러 개인 거대한 거미가 바닥에 철퍼덕 내려앉은 것처럼 검게 얼기설기 꼬인 덩굴들이 밖을 향해 펼쳐져 있는 걸 발견했다.

페이스는 덩굴들 사이의 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으면서 잘못해서 열매를 밟게 될까봐 불안해하며 나무에 다가갔다. 또다시 그녀 주위의 허공에서 작은 숨결들의 불협화음, 녹아내린 말들, 고삐 풀린 소리들이 들렸다.

"왜 내 거짓말에 이렇게 커버린 거지? 우리 아버지의 거짓말이 더 중요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믿었는데." 페이스가 큰 소리로 물었다.

아마도 나무가 날 좋아해서 그럴 거야.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마음속에서 그 생각을 몰아낼 수 없었다. 아니면 내가 나무를 좋아해서 그렇거나."


'거짓말을 먹는 나무' 자체가 판타지적인 소재입니다. 페이스와 거짓말을 먹는 나무의 관계가 페이스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데요. 비현실적인 소재를 등장시킴으로써 독자의 호기심을 더 끌 수 있었고, 전형적인 스릴러 소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느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스릴러적인 요소는 사실 별로 없어요. 주인공도 어린아이고, 정적인 나무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심지어 판타지적이기까지 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작품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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