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기행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4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송은경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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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지면 길 건너편 산들은 장밋빛 색조를 띤다. 낙타들이 목을 천천히 흔들며 지나간다. 농부들은 물통을 끌고 와 노래를 흥얼대며 대지에 물을 먹인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듯 보인다. 이 모든 평온에 현혹될 낭만적인 가슴이 없을 뿐, 부족한 것은 없다. 

하지만 나는 이 평온한 가면 뒤로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는 이집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지긋지긋한 모래땅 한가운데서 녹음을 꽃피우고 이 길고 좁다란 땅덩이는 물과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끝없는 무시무시한 투쟁이다. 만약 단 한 순간이라도 전투가 멎는다면 이 덧없는 대지의 장신구들 – 나무, 새, 사람 – 은 모래 속에 잠겨 버릴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를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 위대한 이집트의 신은 인간에게 마지못해 인색한 일당(日當)을 지급한다. 농부는 수천 년에 걸쳐 밤낮없이 일하면서 이 신의 거칠고 무모한 힘을 길들이고자 애쓴다. 신은 범람과 배수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며 농부와 더불어, 그의 이마에 돋은 땀과 더불어, 이집트를 창조한다. –p41~42

얼마 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조르바라는 ‘펄떡이는’ 캐릭터에 무척 매료되다. 하지만, 내가 워낙 ‘문장’에 집착하는 까닭에, ‘조르바’라는 거친 캐릭터(&번역)는 2%쯤 아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지중해 기행>을 읽으며 나의 마음을 과감히 바꾼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타고난 시인이다. 나는 앞으로, 그의 모든 작품들을 사랑할 것 같다. 그 동한 숱한 여행 에세이를 읽었지만, 이렇게 깊은 탄식을 쏟아내기는 처음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지중해 기행>은 1926년에서 1927년 사이에 이탈리아, 이집트, 시리아반도, 예루살렘 등을 기행하며 쓰여진 책으로, 이때는 ‘전쟁’이라는 광풍이 불던 시기이다. 

이탈리아 여행은 짧지만 강렬하다.
저자가 중부에 있는 ‘아시시’라는 도시를 갔는데, 자신이 숭배하는 성 프란체스코의 업적을 무솔리니의 추종자들이 ‘파시즘’의 깃발아래 재배치하는 것을 보고 ‘불끈’하여, 무솔리니를 만나 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정말 무솔리니를 만나러 로마로 달려간다.(와우~). 

괴테처럼 고대의 폐허를 즐기며 낭만적인 여행을 할 수도 있고, 루터를 따라 종교적인 시각에서 이탈리아 여행을 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날 광포하고 호전적인 파시즘을 목도하고 한가한 여행을 즐길 수 없었노라고 이야기한다. 

무솔리니와의 대담은 성사된다. 난 바쁜 사람이니, 질문할 것이 있으면 종이에 써오라는 무솔리니의 요구에,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궁금한 것은 없고, 그저 한번 보고 싶었을 따름이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그 날의 만남 이후,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파시즘에 대해, 그가 왜 독재자인지에 대해 탄식한다. 

그는 멈출 수가 없다. 멈추면 패배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의 가장 큰 특징이자 가장 비극적인 고뇌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쉬지 않고 싸워 이겨야만 한다. 멈춰 서거나, 결단을 못 내리거나, 토론을 시작하는 순간 그들은 패하고 만다. –p30  

이집트 여행도 같은 맥락이다.
오랜 역사에 감탄하고, 삶과 죽음의 신비에 빠져들며 황홀경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전쟁 후 ‘기계와 굶주림에 예속된 인간의 영혼이 빵과 자유를 위해 몸부림치는 시대’에 여행을 하고 있는 저자는 노동자들의 절규에 귀기울이고, 그들의 가슴 저미는 외침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노라고 이야기 한다. 

어느 자그만 역에, 죽은 아이 하나가 흙 위에 버려져 있다. 아이의 부모는 아직도 들에서 일하고 있다 – 남자는 쟁기질을 하고, 여자는 뒤따라가며 씨를 뿌리고. 하루의 노동이 아직 끝나지 않은 탓에 그들은 아이를 묻으려고 어둠이 떨어지기만 기다린다.
아기티가 역력한 그 자그만 시체는 팔이 축 늘어졌고 실개천 속에서 머리가 퉁퉁 불었다. 검게 변한 사체가 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싶어 스스로 흙을 파고 있는 듯하다. –p62~63 

신의 그늘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혁명을 꿈꾸었던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와 그의 아내네페르티티에 대한 사랑도 아낌없이 표현한다. 현대 기술을 가졌으나, 기존 신념이 붕괴되고 있는 유럽과 민족적인 구심점을 지녔으나 이제서야 기술에 눈을 뜨기 시작한 동양에 대한서도 이야기한다. 

<시나이 반도>, <예루살렘> 편에서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냉철하면서 인간적인 진가가 발휘된다. 겉멋만 부리는 성직자를 비웃고, 젊은이들과 정신과 물질의 가치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며, 거친 사막의 생명력에 귀를 기울인다. 유대인들에게 방랑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기질이며 <디아스포라>야 말로 당신들의 조국이라는 일침을 가한다. 

우리가 사흘 동안 여행하면서 본 것이 바로 이 인간들의 인정 넘치는 만남이다. 배두인족은 사막에서 같은 동족을 만나면 서로에게 몸을 굽히고 손을 꽉 잡는다. 그리고 저 소박하고 유서 깊은 스티코미티아가 시작된다. “어떻게 지내시오? 부인은 어떠시오? 낙타는 어떻소? 어디서 오는 길이고? 어디로 가시오?” 질문을 받는 사람이 대답을 해주고 나면 이번에는 그 사람이 똑 같은 질문들을 한다. 그리고 상대의 대답이 시작된다. <살림>과 <알라>란 말이 반복해 나오는 가운데 이 만남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의당 갖추어야 할 신성하고 숭고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p119~120   

세계지도와 사전을 여러 번 들쳐보며, 며칠 동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시선으로 지중해를 돌아다녔다. 올해 읽은 어느 책 보다 많은 밑줄을 그은 것 같다. 80년도 더 지난 그의 여행기가 감동적인 이유는, 여행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나 여행지에 대해 나의 문제이고, 아픔인양 고뇌하는 작가의 마음, 그러면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는 중립감,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 등이 진정한 지식인의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의 섬세한 관찰력과, 아름다운 문장들은 독자의 마음에 글자 그대로 '심금'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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