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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ㅣ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도 뭣도 아니고, 읽어본 책은 오로지 상실의 시대밖에 없는 내가 이 책을 고르게 된 건 순전히 서울역의 storyway 편의점에서 기차 타기 5분 전에 고를 수 있었던 책 중에서는 그나마 읽을만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제목이 풍기는 부정적인 이미지 - 그러니까, 책으로 묶어서 내기에 좀 부족한 내용인데 작가의 유명세에 기대어 그럭저럭 팔릴 것을 기대하고 만들어낸 듯한? - 때문에 굳이 적극적으로 사서 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런 기대치를 낮춘 자세로 읽어서 그런지, - 물론 짧은 수상소감들이나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지인들에 대한 인물평 같은 '잡문'이라는 제목에 꼭 들어맞는 글들도 있고, 재즈에 관한 글들도 도통 무슨 얘기인지 무식해서 알아먹을 수가 없었지만 - 몇몇 글들은 꽤나 만족스러운 독서 경험으로 남았다. 서문에서 '설날 복주머니' - 그러니까 안에 들어있는 것이 뭔지 모르고 샀는데 그 중에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는 - 를 열어보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으면 좋겠고, 그렇게 해서 자신 안에 있는 '잡다한 심경'의 전체상 같은 것을 조금이라도 느껴준다면 기쁘겠다고 쓰고 있던데, 그런 느낌이 딱 맞는 것 같다.
역시나 상실의 시대밖에 읽지 않은 내가 '과연 그렇군' 하는 느낌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하루키 자신은 - 막상 소설이 아닌 - "언더그라운드"라는 책을 쓴 이전과 쓴 이후의 세계관이나 소설을 쓰는 자세가 어느 정도 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소설가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좀더 느끼게 되었다고 하면 정확한 설명이려나. "언더그라운드"의 책띠에도 하루키 문학의 일대 터닝 포인트이고, 1Q84를 쓰도록 한 계기가 되었다는 식으로 소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잡문집에도 "언더그라운드"를 주제로 한 세 편의 글이 실려 있고, 다른 글들에서도 간간히 언급이 된다. 마침 그 주에 나온 한겨레21에서는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의 피해자들의 현재의 삶을 추적한 르포 특집을 실었는데, 그 기사에서 인터뷰의 방식과 피해자들을 대하는 기본적인 관점은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에 빚지고 있다고 쓰여 있기에(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1489.html), 결국 연쇄적으로 "언더그라운드", 그리고 "언더그라운드 2"라는 제목이 달린 "약속된 장소에서"까지 읽게 되었다.
그 외에도 상실의 시대의 원제인 'Norwegian Wood'가 사실은 하루키가 번역한 바대로의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노르웨이산 가구'라는 주장에 대한 논평이라던지, 바흐의 인벤션을 쳤을 때의 신체와 정신의 불균형이 치유되는 느낌이라던지, 영문 소설 번역을 '취미'삼아 계속 하고 있는 이유라던지 하는 것들도 인상깊게 읽은 부분이기는 한데, 다른 사람들과 가장 공유하고 싶고, 이 책에서의 비중도 가장 높은 글이라고 생각되는 건 아무래도 예루살렘상 수상소감문으로 쓴 '벽과 알'이라는 글이다. 전체를 다 옮기기에는 여러 가지 부담이 있어서, (영어로 쓴) 원문 링크를 걸어 놓는다.
http://www.salon.com/2009/02/20/haruki_murakami/